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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스터네츠
|타악기|
|분류||타악기|
|호른보스텔
작스 분류
|111.141
(부딪혀서 소리 내는 체명악기)
캐스터네츠(castanets, 독일어: Kasta netten, 프랑스어: casta nettes, 이탈리아어: casta nettae)는 타악기, 그 중에서도 체명악기에 속하는 악기이다. 캐스터네츠란 단어는 에스파냐어의 카스타니아(밤나무의 열매)에서 유래하였다. 그 이름대로 안쪽이 파여진 작은 두쪽으로 밑부분을 끈으로 맨 것이다. 재질은 보통 굳은 나무가 쓰이나, 금속 또는 상아제도 있다.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크로탈과 같은 것으로, 이 종류의 악기는 세계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으나 캐스터네츠는 탬버린과 같이 특히 에스파냐나 남이탈리아의 향토 무용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악기이다. 연주자는 좌우 양손에 한 벌씩 가지고, 한쪽 줄에 엄지손가락, 다른 쪽엔 인지나 가운데손가락 또는 약지의 하나 또는 두손가락 이상을 끼고 손을 잡듯이 맞부딪혀 소리를 낸다. 현재는 순수한 리듬악기로 쓰는 예가 많다. 오케스트라에 쓸 때에는 본래의 주법 그대로 연주하기에는 곤란하므로 긴 막대를 붙여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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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리 따지면 스트레스, 체지방만 늘어난다.”
다이어트를 하면서 칼로리 섭취량을 지나치게 줄이거나 칼로리에 집착하게 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의 분비가 촉진되면서 체지방이 증가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대학의 재닛 도미야마(Janet Tomiyama) 박사는 여성 121명을 대상으로 하루 1,200칼로리로 제한하고 칼로리를 기록하는 그룹, 보통 때처럼 식사하되 매일의 섭취 칼로리를 기록하는 그룹, 하루 1,200칼로리를 섭취하지만 기록은 안 하는 그룹, 평소와 같은 식사를 하면서 칼로리 기록을 하지 않는 그룹 등 네 개 집단으로 나누어 실시한 실험 결과 칼로리를 제한한 그룹의 여성들은 평소와 같은 식사를 한 여성들에 비해 코르티솔 수치가 증가했다. 특히 음식의 칼로리를 일일이 기록하는 그룹에서 스트레스는 더 심했고 코티졸의 수치가 가장 높았다.
다이어트를 위해 무조건 섭취 칼로리를 낮추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채소나 해조류는 칼로리가 낮으면서 포만감을 느끼게 해준다. 저칼로리인 반면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함량이 적기 때문에 채소나 해조류 위주로만 섭취하게 되면 영양소불균형 등의 영양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하루에 보통 1200~1500kcal을 섭취해야 하며 800kcal이하의 초저열량 다이어트는 일시적으로 체중 감량의 효과가 있지만 체지방이 아닌 근육량의 감소로 체중감량이 되는 것이며, 장기간 이행시 건강에 무리가 갈 수 있다. 같은 종류의 음식이라도 조리방법에 따라 칼로리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튀기거나 볶음 보다는 굽거나 쪄서 조리하는 것이 좋고 칼로리 정보를 무조건 믿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의 농도가 높아짐에 따라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지 않고 저장하려 하기 때문에 체지방 합성이 증가되고, 특히 스트레스에 민감한 부위인 복부에 지방이 쌓이기 쉽기 때문에 복부비만의 위험성이 높아지게 된다. 지나치게 섭취 칼로리는 줄이는 식이 요법만으로 체중을 감량하는 것보다 운동 요법을 병행하여 체중을 감량하는 것이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스트레스 날려버리고 건강한 다이어트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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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벨벳 케이크
레드 벨벳 케이크(Red velvet cake)는 감칠맛나고 감미로운 초콜릿 케이크의 일종이다. (사실, 초콜릿 재료는 꼭 들어가지는 않아도 된다.) 버터밀크, 버터, 밀가루, 코코아 파우더, 사탕무, (혹은 붉은색 식용 색소)가 주 재료이다. 레드 벨벳 케이크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매우 인기가 높고, 기타 미국 지역에서도 인기가 있다. 레드 벨벳 케이크 위에 덮는 것 – 프로스팅으로서는 조리된 밀가루 프로스팅이라고 알려진 버터 루(밀가루를 버터로 볶은 것)가 인기가 높다. 또한 크림 치즈 버터크림 프로스팅도 인기가 높다.
역사[편집]
제임스 비어드의 1972년 작 "미국 제과"(American Cookery)[1]에서 3 가지 레드 벨벳 케이크 제조법을 설명하고 있다. 쇼트닝과 버터 등 들어가는 재료의 양에 따라 만들 수 있는 세 가지 벨벳 케이크를 얘기하고 있다. 이들은 붉은 색을 내기 위해 모두 식용 색소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신맛이 나는 식초와 버터밀크가 혼합되어 반응하면 코코아를 붉은색이나는 갈색으로 만든다는 현상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그 당시 시대 상황으로 봐서, "네덜란드식으로 가공한" 알칼리성의 코코아가 널리 알려지기 전에는, 붉은색이 더 선명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연스러운 착색 현상 때문에, "레드 벨벳"(붉은 벨벳, red velvet)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악마의 음식"(Devil's Food)라는 별명도 얻었다. [2]
색을 내는 방법[편집]
더 어두운 색의 코코아가 널리 퍼지자, 레드 벨벳 케이크의 예전의 붉은색을 내기 위해서, 사람들은 붉은색 색소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식량 배급 제도가 시행되자, 일부 제빵사들이 끓인 사탕무를 이용하여 케이크의 색을 더 잘 내기 시작한 사실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갈아서 끓인 사탕무나 사탕무 이유식을 넣는 것이 오늘날의 레서피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레드 벨벳 케이크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점차 인기를 얻어갔으며 1950년대 그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일반적인 식용 색소의 인체에 대한 유해성이 염려되면서 인기는 사그라들었다.
제조 비법[편집]
뉴욕의 월드로프-아스토리아 호텔[편집]
캐나다의 이튼'즈[편집]
각주[편집]
- Beard, James. 《James Beard's American Cookery》. 보스톤: Little, Brown.
- Scott, Suzanne (2003년 6월 7일). “It's All Mixed Up! The History and True Facts About Baking Devil's Food Cake”. New Jersey Baker's Board of Trade. 2004년 10월 10일에 확인함.
바깥 고리[편집]
- (영어) Allrecipes Red Velvet Cake Recipe with Buttercream Frosting
- (영어) Red Velvet Cake Recipes from southernfood.about.com
- (영어) So Naughty, So Nice -- Popularity, legends, and history of Red Velvet Cake, New York Times, 14 Feb 2007
- (영어) Plate Of The Day Food Blog - Famous Brooklyn Red Velvet Cake
- (영어) [1]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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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건 이후 경복궁
경복궁 동십자각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망루(望樓).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3호. 조선 후기. 경복궁의 궁담 동남 모서리에 있던 것으로 1880년경에 건립되었다.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1872년 4월 7일 신무문(神武門)을 개건하고 1873년 봄부터 건청궁(乾淸宮)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와 서향각(書香閣)을 본떠 어진(御眞)을 봉안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해 12월 10일 사시에 순희당(純熙堂)에서 불이 나서 인지당·자경전·복안당·자미당·교태전·복도·행각 등 합계 364칸 반이 연소되는 대화가 있었다. 이듬해 정월부터 복구공사가 착공되었으나 공비의 부족으로 지지부진, 1875년 3월이 되어서야 공사가 본격화하여 1876년 4월에 대체적인 복구공사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4일에 또 불이 나서 먼저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으니, 침전 일각 830여 칸이 소진되고 말았다. 이 재해의 복구는 상당히 늦어져서 1888년 2월 25일에야 교태전·강녕전·인지당·자미당의 상량문의 제술(製述)이 있었다. 1890년 6월에 경성전(慶成殿)의 화재가 있었으나 곧 진화되었다.
1896년(건양 1) 2월 16일 경복궁의 수리공사에 착공하고 97년 5월 20일에는 경복궁의 만화당(萬和堂)을 경운궁(慶運宮)에 이건하였다. 1899년 9월 21일에 영보당(永保堂)에 불이 나 28칸이 소진되었다. 그후 고종이 주로 경운궁에 시어하게 되면서 경복궁은 소강상태로 들어가는데, 이것으로 경복궁의 공역은 일단 마무리되고 또 나라가 멸망함으로써 궁궐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1917년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한 대내 일곽이 불에 탔다. 이것의 복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일곽을 헐어다 재건에 썼다. 이때에 철거된 전각은 교태전·강녕전·연길당·경성전·연성전·인지당·흠경각·함원전·만경전·홍복전 등 400여 칸에 달하였다.
8·15광복 이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안의 북동쪽에 건축되었으며, 6·25전쟁 때 문루가 불탔던 광화문육축의 석대를 궁 남쪽에 옮겨 시멘트로 문루를 세웠다.
1996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2009년까지 총 1,789억 원이 투입되어 경복궁 복원사업이 이루어진다. 1995년에는 강녕전이, 1999년에는 자선당 등이 복원되었으며, 2001년 10월에는 흥례문(홍례문)이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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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복(일본어:割腹·切腹·腹切り·屠腹 갓푸쿠·셋푸쿠·하라키리·도후쿠[*])은 10세기 이후 일본의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들이 사용한 자살 방법이다. 17세기 이후에는 무사의 명예를 존중한 사형제도로서 형식을 갖추게 된다. 할복 때 무사는 미리 정해 놓은 규칙(배의 가운데의 복부를 깊이가르고 다시 L자로 긋는다)에 따라 그들의 복부를 깊게 가르며, 보조자가 뒤에서 무사의 머리를 베어준다. 또한 봉건 영주에게 충성을 표시하거나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도 행해졌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 패배한 세력의 수장 역시 패배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할복을 시행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배려 덕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등이 유일하게 할복을 모면하고 영지삭감으로 일단락지어졌으며 이를 제외하면 일본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패배한 성주는 무조건 할복했다.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도>에서 할복의 이유를 '복부에 인간의 영혼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의 해부학적인 신앙에서 용사의 배를 갈라 무사도를 지키는 자결방법으로 적절히 여겨졌다' 고 기술하였으며, 할복 제도는 1873년 (메이지6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긴 했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군인과 우익 인사 사이에서 할복 자살은 계속되었다. 메이지 천황의 죽음에 노기 마레스케 육군대장의 자결과 1945년 8월 25일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14인의 할복, 1970년 우익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육상 자위대에서 연설 후 할복자살한 사건 등이 있다. 할복은 제도적으로는 없어졌지만 무인다운 명예로운 자살이라는 사상은 아직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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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물건)
선물(膳物)은 어떤 사람에게 물건을 주는 행위나 그 물건을 말한다. 주로 생일 등 어떤 기념일에 서로 주고 받으며 나라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물건을 주는 지는 다 다르다. 주로 발렌타인데이 때에는 초콜릿을 선물로 주며 크리스마스 때에는 산타클로스가 벽난로에 걸어진 양말에 선물을 놓고간다는 유래도 있다. 곤충의 세계에도 선물이 존재한다.곤충학자 김정환의 《곤충마을에서 생긴 일》에 따르면 춤파리가 그 실제 사례이다. 번식시기인 4월경에 수컷 춤파리는 암컷에게 꽃벌등의 작은 곤충을 사냥한 뒤 고치에 넣거나 그대로 가져가서 선물하는데, 암컷이 곤충의 체액을 먹는 동안 수컷은 암컷과 짝짓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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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에라스무스 킨더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삶[편집]
뉘렘베르크에서 태어나 15세에 이미 교회에서 노래를 하고 바이올린을 켰다. 1634년 시의 허락과 지원금을 받아 이탈리아에서 새 음악을 공부했다. 1936년 시의 명을 받아 다시 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그 후로는 평생 뉘렘베르크에 살면서 시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이자 교수가 되었다. 뉘렘베르크와 남부 독일에 새 음악을 전파하는데 즁요한 역할을 했다.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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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모
빙모(氷帽, ice cap)는 빙관(氷冠) 또는 관빙(冠氷)이라고도 하며 육지를 덮고 있는 5만km²미만의 빙하의 덩어리이다. 육지를 덮고 있는 빙하 덩어리가 5만km²이상에 걸쳐서 펼쳐진 경우에는 빙상으로 불러 구별한다.
빙모는 평원에 많은 빙상과 달리 기복이 많은 지형에도 다수 볼 수 있다. 특히 빙하 덩어리가 산의 산정부에서 산중턱에 걸쳐 덮듯이 빙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많다. 보통 이 빙모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산정을 경계로 갈라지고 각각 산록을 향해 흘러내리며 산의 표면이 노출된 표면에는 새로 내린 눈이 쌓여 새로운 빙모가 형성되어 간다.
지구의 지형
|산악·평원 지형|
|하천 지형|
|빙하·설빙 지형|
|해양 지형|
|화산 지형|
|풍화 지형|
|식생 지형|
|인공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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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guide 바젤
바젤은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도시이다. 후기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대성당과 화려하게 장식된 붉은 사암 시청사가 들어서 있는 거대한 시장은 역사적인 도시의 랜드마크이다. 구시가지를 거쳐 걷는 동안, 작은 부티크, 앤틱 서점을 지나게 될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디자이너의 상점, 바젤 전통 꿀 케이크를 맛 보기 위해 '렉컬리 후스(Läckerli Huus)'를 방문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바젤은 이런 동시에 전통에 근간을 둔 매우 개방적인 도시로 헤르조그 & 드 뫼롱(Herzog & de Meuron), 마리오 보타(Mario Botta), 디이너 & 디이너(Diener & Diener) 및 리하르드 메이어(Richard Meyer)등 널리 알려져 있는 건축가에 의해 건축된 몇몇 현대적인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바젤에는 약 40여 개의 박물관이 있으며 스위스 내에서 가장 높은 밀도를 자랑한다.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박물관으로는 바젤 미술관으로 조형미술가 장 팅길리의 많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바이엘러 재단, 문화 박물관 등은 많은 방문객에게 아낌없이 찬사를 받고 있으며 갤러리와 극장 또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바젤은 세계적으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공연, 심포니 오케스트라, 챔버 오케스트라 등의 본거지 중의 하나이다.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클래식 공연과 비정기 공연 등이 바젤 극장 및 공연장에서 계속 열리고 있다.
바젤은 초록의 그린 시티이다. 라인강 제방 지역에 위치한 몇몇 식물원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잠깐 동안 산책을 하기에 완벽한 장소이다. 또한 에토차 하우스(Etoscha House)는 스위스에서 가장 큰 동물원으로 마치 나미비아의 사바나 지역에 온듯한 놀라운 광경을 제공한다.
아우구스타 라우리카와 아우그스트 근처에는 인상적인 로마시대의 유적지가 있는데 이 곳 박물관에서는 이 지역의 과거 로마 시대의 출토품을 볼 수 있다. 매력이 넘치는 바젤의 전원지역은 봄에는 체리가 한창으로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독일, 프랑스, 흑림과 보 주 산맥은 바젤 국경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매년 열리는 파스나흐트 카니발은 바젤 사람들이 가장 중요히 생각하는 축제이다. 사순절 다음 월요일에 시작되며 모르게슈트라이히와 함께 정확히 새벽 4시에 시작되는데 거리의 모든 불빛이 한 순간에 꺼지면서 다채롭고 밝은 불을 가진 행렬이 거리를 통과하며 행진한다.
여름
라인강은 바젤의 비공식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이면 해안에서 회사원, 학생 등이 함께 모여 일광욕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중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라인강은 휴식을 위한 완벽한 장소이자 페리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겨울
바젤은 스위스의 문화적인 수도로 잘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구시가를 걷다가, 또는 40여 개에 이르는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등 곳곳에서 예술과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다. 또한 바젤을 여행하다가 발견하게 되는 최고 수준의 현대 건축물도 이목을 집중시킨다.
하이라이트
주요 이벤트
- 바젤 파스나흐트(Basel Fasnacht, 카니발) - 바젤의 대표적인 축제로 매년 부활절 뒤 월요일의 6주 전, 즉 성회일 다음 월요일에 시작되어 3일 간 열린다. (2/3월)
- 바젤월드(Baselworld) - 세계 제일의 시계, 보석 패어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유명 회사들이 참가하여 최신 트렌드를 제시하고 소개한다. (3/4월)
- 아트 바젤(Art Basel) – 20세기부터 시작된 현대적인 예술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회로 국제 예술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아트 페어로 꼽힌다.(6월)
- 다비도프 스위스 인도어스(Davidoff Swiss Indoors) - 국가적으로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로 가장 중요한 실내 테니스 경기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들이 참가한다. (10월)
- 바젤 가을 페어(Basel Autumn Fair) – 스위스에서 가장 재미난 패어로 셀 수 없이 많은 마굿간과 승마를 주제로 한다. (10/11월)
- 바젤 크리스마스 –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전통적인 마켓으로 바르퓌세 광장(Barfüsserplatz)과 뮌스터 광장(Münsterplatz)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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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풀
|수박풀|
|생물 분류|
|학명|
|Hibiscus trionum
L.
수박풀(Hibiscus trionum)은 중앙아메리카 원산으로, 한국 각처의 밭에 나는 한해살이풀로 높이는 30-60cm이다. 전체에 흰색의 거친 털이 있고, 줄기는 곧게서거나 가로 누워 있으며, 가지가 갈라진다. 잎은 어긋나며, 잎자루가 있고, 근생엽은 둥근 모양으로 경생엽은 깊게 3-5갈래, 수박잎 모양, 갈개는 선상 긴 타원형, 도란상 긴 타원형이다. 꽃은 연한 노란색이며 가지 끝의 잎겨드랑이에서 나오고, 꽃자루가 있다. 이른 아침에 피며, 정오 전에 시든다. 꽃받침은 5갈래이며 꽃잎은 5장이다. 수술은 짧은 단체 웅예, 암술대는 끝이 5갈래이고 꽃 아래 작은 포는 11갈래로 가장자리에 털이 난다. 열매는 삭과로 긴 타원형이며 떨어지지 않는 꽃받침에 싸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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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출생||1473년 2월 19일
폴란드 왕국
|사망||1543년 5월 24일
폴란드 왕국
|분야||천문학, 수학, 약학, 경제학, 교회법|
|출신 대학||파도바 대학교|
|주요 업적||지동설 창시|
|종교||가톨릭|
|서명|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라틴어: Nicolaus Copernicus / 폴란드어: Mikołaj Kopernik 미코와이 코페르니크[*] / 독일어: Nikolaus Kopernikus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전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가져온 폴란드의 천문학자이다. 여러가지 이름 표기는 그가 태어난 곳(폴란드)과 그의 모국어(독일어) 그리고 그가 즐겨 쓴 라틴어를 감안하여 세가지 언어로 표기한다. 인공원소 코페르니슘의 이름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그는 라틴어, 폴란드어, 독일어, 그리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모두 말할 수 있었다.[1][2][3][4]
코페르니쿠스는 현재의 폴란드 중북부에 있는 당시의 한자동맹 도시인 토룬(폴란드어 Toruń, 독일어 Thorn)에서 관리이자 주철업을 하는 아버지 니콜라스 코페르니크과 당시의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방 출신인 어머니 바르바라 바첸로데 사이에서 네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 밑에서 여의고 토룬에서 초등 및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 코페르니쿠스는 1491년 당시 독일의 작센에 속했던 폴란드 남부지방의 대도시 크라카우(현 크라쿠프)로 가 대학에 입학하여 1494년까지 수학 및 천문학을 공부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1495년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가 삼촌의 권유로 신학과에 입학한다. 이탈리아에 머무르면서 코페르니쿠스는 또한 로마 및 파도바 대학에 등록하여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논의에만 몰두하던 스콜라학의 학통을 따르지 않고 천체관측과 궤도 계산을 위주로 하던 실지천문가였다.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성질에 대한 통념이 기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으로 암흑기에서 과학혁명으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했는데, 이것은 당시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을 폐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코페르니쿠스가 행했던 인간중심의 지구중심설에서 객관적인 입장의 태양중심설로의 발상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이른다. 흔히 대담하고 획기적인 생각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만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었다.
이탈리아 유학시기 접한 플라톤주의와 고대문헌 조사의 영향으로 지동설을 구상하게 된 코페르니쿠스는 레기오몬타누스가 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핵심적 문제제기가 실린 책 <요약>을 접하고 자신의 우주 모델에 대한 개략적인 생각을 더욱더 발전시켜나갔다. 그 후 1510년에 태양 중심 천문체계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했으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해설서Commentariolus>라는 제목이 붙은 짧은 요약본 형태의 원고를 지인들에게 돌렸다.
[짧은 해설서] 발표 후 코페르니쿠스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1543년《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발표한다. 우주와 지구는 모두 구형이며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처럼 지구도 원운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행성을 하나, 하나 따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체계로 보아 행성간의 관계를 부여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과 큰 차이점을 두었다.
책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매우 미약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널리 퍼져 나갔다. 1616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금서목록에 추가되기도 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천문학과 물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줌으로써 혁명적 씨앗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관측 결과와 완전히 부합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 많은 과학자들. 특히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차
- 1 생애
- 2 연구
- 3 저서
- 4 그가 미친 영향
- 5 유해 발견
- 6 각주
- 7 참고문헌
- 8 바깥 고리
생애[편집]
출생[편집]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토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토룬은 폴란드의 번창한 도시로 발트해에서 약 15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1470년대 토룬의 인구는 약 만 명이었고 많은 상인들과 공장주들이 이곳에서 외국과 무역을 했다. 1200년대 프로이센의 영토로 이교도인 슬라브인의 땅이었던 토룬은 동유럽의 게르만 기사단에게 정복당한 후 기독교로 개종되어 약 200년 간 기독교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있었다. 1400년대 초, 폴란드의 지도자들이 이에 반발하여 게르만 기사단과 전투를 벌였고 토룬은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니콜라우스의 아버지는 정치적 활동도 활발하여 그 후에 벌어진 또 한 번의 전투에서 토룬의 다른 상인들과 연합해 폴란드 왕을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어머니인 바바라 바첸로데 또한 토룬에서 유명한 상인의 딸이었다. 니콜라우스라는 이름의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소년 시절에는 니클라스로 불리다가 크라쿠프의 대학에 가게 되면서 라틴어 철자법에 따라 니콜라우스가 된 것으로 보인다. .[5]
어린 시절[편집]
코페르니쿠스의 아버지는 그가 열 살 때 돌아가셨다. 그의 큰누나는 수녀가 되었고, 작은 누나는 상인과 결혼했다. 코페르니쿠스 형제는 대학에 다닐 수 있을 지가 불확실해졌지만 외삼촌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당시 서른 여섯 살이었던 외삼촌 루카스 바첸로데는 두 개의 가톨릭 교구 운영 위원회 위원이었다. 운영 위원회는 참사회라고도 불렸는데 각 교구의 경제적인 업무를 맡고 있었다. 바첸로데는 먼저 코페르니쿠스 형제를 자신이 졸업한 세인트 존스 스쿨에 보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학교에서 라틴어를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추고 기본 산술 등을 배웠다. 그 후 형제는 무슨 가톨릭 학교에 입학했다. 토룬의 비스툴라 강 상류에 위치한 이 학교는 폴란드의 수도인 크라쿠프에 위치한 크라쿠프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준비단계였다. .[5]
대학 시절[편집]
크라쿠프 대학은 야기옐론 대학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야기옐론 왕조는 게르만 기사단의 침입을 막아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대국을 건설했으며 16세기에 정치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강력한 왕조였다. 이 왕조의 왕들은 정치적으로 강건했을 뿐 아니라 예술과 과학 분야를 지원해 폴란드의 문화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전통 문화와 맞먹을 정도가 되게 했다. 특히 크라쿠프 대학의 천문학 연구는 북유럽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Nicolaus Nicolai de Thuronia라는 이름으로 1491-1492년 겨울 학기에 크라쿠프 대학에 등록했다. 당시 유럽의 대학의 교육 과정은 대부분 비슷했다. 학생들은 신부, 의사, 법률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십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하면, 우선 4년 동안 일반적인 학문과 예술을 공부했다. 그 후 일부 학생들은 신학, 의학, 법률 중에서 한 분야를 택해 여러 해 동안 더 공부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예술 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강의는 라틴어로 진행되었고 많은 과목들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들과 함께 이루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우주 전체를 밀접한 논리적 관계로 묶어 하나의 체계로 설명하고자했다. 그는 자연의 모든 사물은 흙, 물, 공기 불이라는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하늘은 완벽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으면 하늘의 별과 태양, 행성들은 제 5원소인 에테르로 이루어져있다고 주장했다. 신은 우주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우주가 그 질서에 따라 움직이도록 관리한다. 인간은 물질적 요소와 영적인 요소가 섞여 이루어진 존재로 생각되었다. 유럽의 교수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분석하고 해설을 달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해설서들을 공부하고, 동료들과 토론하며 후에 펼칠 자신의 사상의 밑거름을 쌓아갔다. 학생들은 또한 수학, 천문학, 유클리드 기하학 등을 공부해야 했다. 교재로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과 사크로보스코의 <천구>가 쓰였다. 유클리드는 기원전 300년 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수학자로 그가 저술한 <기하학 원론>은 그의 연구와 더불어 그 이전의 수학자들의 연구를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은 1900년대 초까지 기하학 교재로 사용되었다. <천구>는 1200년대 초에 영국의 수학자 사크로보스코가 쓴 책으로 하늘과 지구의 형태나 사계절의 변화 등을 설명하고 있다. 대학에서 코페르니쿠스는 다양한 천문학적 지식을 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원 우주 이론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심, 주전원의 개념은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부분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후에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새로운 우주 체계를 제시하는 바탕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오마이오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행성 이론을 수정한 많은 학자들의 책을 공부했다. 게오르그 푸르바흐는 1450년대에 비엔나에서 <새로운 행성 이론>이란 책을 쓴 학자로 그의 책에는 프톨레오마이오스의 옛 모델을 수정한 내용이 담겨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푸르바흐가 만든 일식과 월식의 시간, 위도 등을 담은 표를 베끼거나 다른 여타 표들을 정리하는 등 천문학적 관심을 높여갔다. .[5]
계속되는 배움[편집]
코페르니쿠스는 크라쿠프 대학의 예술 과정에서 4년간 공부한 뒤 학위를 받지 않고 1495년 가을, 대학을 떠났다. 그의 외삼촌 바첸로데는 1489년에 바르미아의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사실상 그곳을 다스리는 통치자였다. 1495년 코페르니쿠스가 외삼촌을 만나기 위해 프롬보르크에 도착했을 때, 바르미아 가톨릭 대교구 참사회 위원 중 한 명이 사망했다. 바첸로데는 그 자리에 니콜라우스를 임명하려 했다. 바티칸의 허락을 받은 뒤, 코페르니쿠스는 그 해 여름 참사회 회원이 되었다. 다음 해, 바첸로데의 뒤를 이어 성직자가 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모든 자금은 바첸로데가 지원했다. 코페르니쿠스가 공부한 교회법은 판사의 권한, 판결을 내리는 과정과 규정, 성직자들이 성사를 행하고 재산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권리와 의무, 결혼에 대한 모든 법률과 규정, 여러 범법 행위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해 교회의 운영과 관련시켜 내린 판결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성직자들에게는 일반적인 법이 아닌 교회법이 적용되었다. 볼로냐에서 공부하던 무렵, 코페르니쿠스는 참사회 회원으로서의 권리를 입증하는 공증서를 받은 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다시 천문학에 몰두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497년 초, 코페르니쿠스는 도메니초 마리아 다 노바라는 볼로냐 대학의 천문학 교수의 집에서 하숙했다. 그는 노바라의 천문학 관측을 도우면서 천문학적 지식을 넓혀갔다. 또한, 그는 레기오몬타누스의 <알마게스트의 발췌본>을 공부했다. 1500년 여름,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 대학에서 4년 동안의 법률 공부를 마치고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돌아와, 1501년 6월 말, 그는 프롬보르크에서 열린 바르미아 가톨릭 대교구 참사회로부터 2년 동안 더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1501년 10월, 코페르니쿠스는 파도바 대학의 의학 과정에 등록했다. 대학의 의학 강의는 2세기 무렵 로마의 의학자인 갈레노스의 저술을 바탕으로 했다. 2년 동안의 학업이 끝나고 1503년 5월 31일,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에서 멀지 않은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5]
학문과 성직[편집]
1503년 가을, 바르미아로 돌아온 코페르니쿠스는 참사회 위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교회 소유 재산의 관리 감독, 로클로우 교회 학교의 수업 진행 감독 등의 일을 맡았다. 또한, 그는 외삼촌인 바첸로데 대주교의 비서, 주치의로 일하면서 그에 해당하는 수당도 받을 수 있었다. 이 업무를 위해 그는 대주교의공관인 리츠바르크 성에 머물렀다. 그는 여가 시간에 그리스어를 독학하며 이를 위해 그리스어로 쓰인 몇몇 편지들을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1509년에 번역한 테오필락투스의 <도덕, 시골뜨기, 사랑꾼의 편지들>이다.
그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천문학을 놓지 않았다. 그는 1504년에 행성들이 게자리에서 하나로 만나는 대화합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기존의 천문학 표와 비교해 본 결과 그는 몇몇 차이를 발견했다. 레기오몬타누스의 <알마게스트의 발췌본> 또한 계속 공부하고 있었는데 레기오몬타누스의 몇몇 해석은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펼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그는 다양한 분석과 계산을 통해서 자신의 태양중심설을 발전시켜갔다. 1510년, 코페르니쿠스는 바첸로데 대주교의 비서직을 그만두고 프롬보르크의 가톨릭 참사회 위원으로만 일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에는 천문학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그 때까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새로운 행성의 배열을 커다란 여섯 장의 종이 위에 옮겼다. 이것이 바로 <짧은 해설서>이며 코페르니쿠스는 이것의 필사본을 자신의 몇몇 친구들에게 돌렸다. 그는 이 얇은 책에서 등속 중심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며 태양 중심 우주론을 제시했다.
틈틈이 천문학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코페르니쿠스는 성실하게 참사원의 임무를 다했다. 1511년부터 1513년까지 그는 참사회의 고문으로서 참사회 업무 수행에 필요한 서류와 문서들을 작성하고 재정 거래를 관리했다. 1512년, 루카스 바첸로데가 죽고 코페르니쿠스의 볼로냐 대학 동료였던 파비안 루찬스키가 그 뒤를 이어 대주교가 되었다. 1516년에 코페르니쿠스는 바르미아 참사회의 영토를 관리할 임무를 맡아 소작농 문제를 해결하고 1517년에는 화폐 개혁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1520년, 계속해서 바르미아에 대한 약탈 행위를 벌여오던 게르만 기사단이 프롬보르크를 공격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국왕과 동료 위원들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등 프롬보르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프롬보르크는 함락되지 않았다. 1522년, 코페르니쿠스는 왕립 프로이센 의회의 회의에 참석해 은전 주조 개혁에 대해 논의했다. 1523년, 파비안 루찬스키 대주교가 사망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다음 대주교가 선출될 때까지 참사회 위원들에 의해 임시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1525년, 폴란드와 게르만 기사단은 최종 평화안에 서명했다. 그 무렵 일어난 루터의 종교 개혁은 바르미아에도 영향을 끼쳤다. .[5]
천문학적 활동기[편집]
경력이 높은 회원이 되어 할 일이 감독과 조언 등으로 줄어들면서 1530년대,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1529년 그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관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을 완전히 개정하려고 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런 계획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출판을 권유했다. 1533년에는 교황의 비서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교황과 추기경들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이론을 들은 쇤베르크 추기경은 그의 업적을 치하하며 자신에게 그의 이론을 알려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결국 1542년, 계속된 교정 끝에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원래 이 책의 제목을 <회전>이라 칭하려 했지만 인쇄소에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로 바꾸어 출판했다. 책은 출판되었지만, 그 해 코페르니쿠스는 뇌출혈을 겪었다. 그 후 그는 몸의 오른쪽 부분이 마비되었다.
연구[편집]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천문학[편집]
태양중심체계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기원전 3세기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310?~230B.C.)이다. 그는 저서 『태양 및 달의 크기와 거리에 대해서』에서 태양은 지구에 비해 6~7배 더 넓고 그 크기는 지구의 300배에 달한다고 서술하였다. 그는 태양이 지구보다 크기 때문에 태양의 연주운동은 지구의 공전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항성의 일주운동은 지구의 자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는 당시의 과학기술로는 별의 시차에 의한 효과를 관측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아폴로니우스와 기원전 2세기의 히파르코스는 행성이 단순히 원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 위에 있는 작은 원 위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원을 주전원, 큰 원을 대원이라고 부른다. 두 가지 이상의 원운동이 합해져 행성의 진행방향이나 속도가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으로 행성의 접근에 의한 밝기 변화, 순행과 영행의 속도차이를 대략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각각의 행성들을 관측해 보면, 이들은 항성들을 배경으로 동쪽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 정도 각각 다른 시기에 잠시 정지했다가, 몇 주 동안 서쪽으로 움직인다. 이런 현상을 ‘역행 운동’이라 부른다. 서기 15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런 역행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기하학적 모델을 제시했다. 그의 모델은 두 개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 원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모원’이다. 작은 원은 모원에 의해 운반되는 ‘주전원’이다. 행성은 주전원을 따라 돈다.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이 두 원운동을 결합함에 따라 행성이 모원 속으로 들어가 지구에 가장 가까웠을 때,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 따르면, 태양은 원궤도를 따라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 원의 중심은 지구의 중심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 원은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약 3.5 퍼센트 정도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놓여 있는 이심원이었다. 그는 태양이 이 이심원 궤도를 일 년에 한 번 회전하며, 이심원 궤도 자체가 지구 둘레를 하루에 한 번 회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이심원 궤도는 별들에 대하여 고정된 상태로 있으며, 태양의 이심원 궤도, 행성들의 궤도가 지구에 대하여 하루에 한 번 회전하는 것이다.
13세기 초, 영국의 천문학자 존 오브 할리우드는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라틴어식 이름인 요하네스 시크로보스코라는 필명으로 ‘천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은 기본 교재로서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그래서 다음 세대인 13세기 중엽이 되자 좀더 발전된 교재인 캄파누스가 쓴 ‘행성의 도구’가 등장했다. 이 책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간단한 역학적 방법으로 설명해 놓았다.
14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다마스쿠스에 있던 이븐 알 샤티르(Ibn Al Shatir)는 천동설의 입장에서 동시심을 제거하여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체계를 생각했다. 원운동에서 직선왕복운동을 일으키는 방법은 그에 앞서 13세기의 나시르 알 딘 알 투시(Nasir al-din al-Tusi)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들의 업적이 코페르니쿠스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지적되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기록은 없다.
15세기 중엽 비엔나 대학의 게오르그 푸르바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의 도구‘를 새롭게 해석해 새로운 책 ’새로운 행성 이름‘을 썼다. 그는 투명한 수정으로 된 틀로 프톨레마이오스의 모원과 주전원을 만들어 보려 했다. 즉, 우주의 구성과 운동을 실제 물질을 사용해 주체적으로 표현해 보려 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의 궤도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이 행성들의 위치를 잘 예측해주기는 하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해 놓은 원칙에서 많이 벗어나 있음을 깨달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의 천체들이 등속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원운동은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론적 요구를 실제로 만족시키기는 매우 어려웠다. 우선 태양의 궤도가 문제였다. 사계절의 길이는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각각 약 91.25일이 아니라, 봄(춘분부터 하지까지)은 92.75일, 여름(하지부터 추분까지)은 93.75일, 가을(추분부터 동지까지)은 89일로 각각 다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처음의 가정을 부정하여 태양의 운동 속도가 일정하지 않거나 태양의 궤도면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행성들의 겉보기 운동은 매우 불규칙했다. 예를 들어 화성은 평균 속력에 비해 훨씬 더 느리게 움직일 때도 있었고, 훨씬 더 빨리 움직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2년에 한 번 정도, 별들 사이에서 화성이 동쪽으로 점점 느리게 움직이다가 멈춘 뒤 여러 달 동안 뒤로 움직이더니 다시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별들을 배경으로 행성이 서쪽으로 느리게 움직이는 운동을 가리켜 역행한다고 말한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역행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가설은 천체들의 영원한 운동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 고대의 개념들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래서 커다란 원의 둘레를 움직이는 작은 주전원의 운동이 일정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는 지구와는 다른 등속 중심이라는 점을 도입해, 이 점을 중심으로 각운동의 속력이 일정하도록 했다. 새로운 개념의 도입으로 모델은 더욱 복잡해졌지만, 그 영향을 계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행성들의 표를 만드는 데 쓰이게 되었다.
한편 중세 아랍 천문학자들은 등속 중심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데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들은 원의 둘레를 움직이는 운동의 속력이 그 원의 실제 중심에 대하여 일정하지 않고, 다른 어떤 점에 대해 일정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동속 중심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방법은 결국 또 다른 작은 주전원들을 만들어 회전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 외에도 코페르니쿠스로 하여금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보다 더 정교한 모델을 구축하도록 만든 요인들이 더 있다.
첫째, 프톨레마이오스 모델에서와 같이 태양과 달을 포함하여 각각의 행성들이 주전원을 그리면서 지구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궤도를 따라 돌고 있다고 하면 우주를 총체적이고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다.
둘째,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달 궤도의 편차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달은 한 달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일정 기간 지구 가까이 접근해 있어야만 했다. 따라서 외견상의 크기 역시 계산이 가능할 정도로 크게 달라야 했는데, 사실은 그리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태양중심설[편집]
에우독소스[편집]
그리스 시대의 에우독소스(Eudoxos, 400?~350?B.C.)는 동심천구설을 주장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지구를 중심으로 한 27개의 천구들로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려 했다. 실제 천체의 회전궤도는 원형이 아니며 그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에우독소스의 가설은 후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채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편집]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B.C.)는 우주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지구를 중심으로 두고, 달을 기준으로 지구와 가까운 공간을 '지상계', 달 윗 공간을 '천상계'로 말이다. 그에 따르면 두 세계는 각각을 이루는 물질부터 다른데, 지상계는 흔히 볼 수 있듯 불, 물, 흙, 공기의 4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천상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테르로 차있다. 두 세계에서 일어나는 운동도 차이가 난다. 아직 지구가 원형이라는 확실한 인식이 없을 적,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계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직선운동이 주를 이루고, 천상계에 있는 천체들은 등속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아리스타르코스[편집]
현재 기록이 남아 있는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310?~230B.C.)의 유일한 저서는 『태양 및 달의 크기와 거리에 대해서』이다. 그는 별이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고 주장했으며, 한 별이 다른 별 주위를 도는 것과 같은 특정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별이 너무 멀리 있어서 육안으로는 관찰하기가 힘들고 망원경을 통해서만 증명이 가능했다. 따라서 대중 사이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리스타코스는 삼각법을 이용하여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의 18~20배라고 하였다. (실제로는 약 400배이다.) 또 그는 에라토스테네스가 사용한 방법을 사용하여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고 달과 태양에 대해서도 탐구하여 태양의 겉넓이와 부피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히파르코스[편집]
히파르코스(Hipparchos, 190?~120?B.C.)는 사실은 천체의 회전 궤도가 정확한 원이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오차를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을 도입하고 회전속도가 변하는 것은 이심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코페르니쿠스[편집]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태양중심설은 현재의 태양계의 구조와는 차이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구조와 거의 비슷하고 단지 우주의 중심에 있던 지구와 달의 위치를 태양과 바꾸어서,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오게 하였다. 원형 궤도와 주전원, 이심 등의 기존의 지구 중심적 구조는 그대로 차용하였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화된 태양계의 구조설을 코페르니쿠스 체계(Copernican system)라고 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모델은 프톨레마이오스 모델이 가지고 있던 몇 가지 문제점들을 해소해 주었다.
첫 번째는 행성들의 배열순서와 그것들의 주기에 관한 문제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 주위를 도는 행성들을 회전주기가 짧은 순서대로 지구와 가깝게 배치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태양과 금성, 수성의 회전주기가 약 1년 정도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셋의 순서를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이 문제는 공전의 중심 자체가 바뀌어서 생긴 문제이기 때문에 태양을 중심에 두는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행성들의 역행 운동에 대한 문제였다. 지구중심설로서 이를 설명하려면 주전원과 등속 중심 등을 사용하여 매우 복잡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는 우주구조 자체로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의 전체 골격은 그대로 두고 세부만 바꾼 변혁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천구는 그대로 존재했고, 행성과 지구는 여전히 이 천구들에 고정되어 돌도록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원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그대로 고수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가장 자연스러운 운동은 등속원운동이라고 생각하여 그에 맞지 부합하지 않는 관측 데이터에 맞추기 위해 주전원, 이심 등을 그대로 도입하였다.
저서[편집]
짧은 해설서는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우주 모델의 기본 틀을 서술한 40쪽 짜리 원고형태의 요약본이다. 1510년 무렵 필사본으로 발표되었으며 현재 비엔나에 있는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에 단 세 권만이 남아 보관되어 있다. 책은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후에 더욱더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1543년, 그의 걸작이라고 칭송받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을 출판하게 된다.
코페르니쿠스는 [짧은 해설서Commentariolus]의 복사본을 크라쿠프에 있는 몇몇 자신의 지인들과 동료들에게만 돌렸다. 비록 그가 살아있을 때 출판 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알려지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생각을 공식적으로 출판했을 때 교회로부터 박해받을 위험을 크게 우려했다는 증거는 없다. 실제로 1533년, 교황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Ⅶ) 와 여러 추기경들이 참석했던 바티칸의 강연에서 교황의 비서였던 로마의 요한 비드만스타트(Johann Albrecht Widmannstetter)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의 대략적인 내용을 강의 했다. 교황과 추기경들은 그 이론에 관심을 가졌으며 1536년 11월 1일, 바티칸 강연에 참석했던 추기경중 하나인 니콜라스 폰 쇤베르크(Nicolas von Schönberg)는 코페르니쿠스에게 편지를 써서 그 책의 출간을 재촉하기도 했다.
짧은 해설서의 복사본은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뒤에도 존재했지만, 그 뒤에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짐에 따라 소멸되었다. 때문에 19세기 후반, 필사본이 발견되어 출판되기 전까지 짧은 해설서의 존재는 간접적으로만 확인되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짧은 해설서에서 우주에 대한 7가지의 새로운 상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 모든 천구들은 공통되는 하나의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지구는 무게가 향하는 중심, 달의 천구의 중심일 뿐이다
- 모든 천구들은 [[태양]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의 중심은 태양의 근처에 있다.
-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대천구(항성들의 천구)의 높이와 비교하면 매우 작아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이다
- 대천구의 겉보기 운동은 실제 운동이 아니라, 지구의 운동에 의해 생긴 결과이다. 지구는 고정된 극을 회전축으로 삼아 자전하며,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항성들의 대천구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
- 태양의 겉보기 운동은 실제 태양의운동이 아니다. 지구와 지구의 궤도 껍질의 운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지구는 다른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구는 적어도 두 가지 운동을 하고 있다.
- 행성의 역행 운동은 실제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지구의 운동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의 운동만으로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불규칙한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8]
짧은 해설서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는 행성들이 투명하고 단단한 천구의 껍질에 박혀 있다고 믿었다. 또 천체구조가 역학적으로 합리적인 모습을 갖추려면 모든 껍질이 자신의 정확한 중심에 대해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기오몬타누스가 [알마게스트의 발췌본]에 제시한 방법을 이용하여 모델을 만들려고 했지만 투명한 껍질이 서로 교차하는 문제가 발생하여 새로운 제안을 하게 된다. 이 새로운 제안이란 ‘궤도 껍질 중의 하나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를 운반하고 있다’ 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를 하나의 행성으로 만들어 ‘태양 중심 체계’를 만들었다. 하나의 일관성 있는 체계로 통합되지 못하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와는 달리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일관성 있는 하나의 체계였다. 그러나 행성들의 실제 운동은 일정한 속력의 원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27개의 주전원을 더 만들어 행성들의 관측결과와 일치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20년의 세월동안 27개의 주전원의 중심 위치, 반지름의 길이, 회전 속력 등 100개가 넘는 값을 정확하게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모델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9]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편집]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출판한 책으로 태양은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태양중심설(지동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쓴 ‘짧은 해설서’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전신이 되었으며 꾸준한 연구를 통해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우주모델에 관한 내용을 1532년 거의 마무리 지었다. 1539년 5월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였던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노트를 읽고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관한 해설서를 집필해 1540년에 출판하였고, 노트를 책으로 출판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1542년부터 루터파 신학자 안드레아 오시안더의 감독 아래에서 인쇄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책이 출판되기 전부터 마르틴 루터가 코페르니쿠스 모델에 반대하였다. ‘여호와가 그 자리에 서 있으라고 명령했던 것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말이 성경에 분명 써 있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루터주의자였던 오시안더는 책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이며 교회와 마찰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여 코페르니쿠스의 허락 없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계산상의 편의를 위한 추상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문을 추가하기도 하였다.[10]
코페르니쿠스는 책의 기본구조를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와 동일하게 했다. 두 책은 모두 ‘철학적’ 부분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이 부분에서 우주의 생김새는 구형이고, 지구의 크기는 우주와 비교해 매우 작다고 밝히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행성 배열에 따르면, 행성들은 주기가 길면 길수록 더욱 큰 궤도를 가진다. 이런 관계는 나중에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수학적 원리를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11]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1권부터 6권까지 총 6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동설 사상은 모두 1권에 다 서술되어 있다. 1권의 내용은 수식을 사용하지 않는 단순하고 우아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총 14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제1~3장에서는 우주나 여러 천체, 지구 역시 구형이라는 점, 제4장에서는 천체가 원운동을 한다는 점, 제5장에서는 지구도 자전하면서 태양을 원운동 한다는 점, 즉 지동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제6~8장에서는 지동설에 대한 천동설 입장의 반론을 들어 이것을 논박하고, 제9~11장은 지동설의 입장에서 어떻게 천계의 여러 현상이 합리적으로 설명되는가를 총괄하고 있다. 제12~14장은 제2권에 대한 수학적 준비로서 원호의 표와 삼각법의 기초정리를 들고 있다. 2권에서 6권까지는 1권과는 달리 복잡한 계산들과 수식들로 이루어진 책을 쓰게 되었는데, 코페르니쿠스가 이를 천문학자들이 읽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2권에서는 구면천문학에 대한 내용을 서술했고, 3권에서는 지축의 선회운동에 의한 세차운동을 포함한 지구의 운동, 춘분점의 이동에 대한 수학적인 설명을 담고 있다. 또한 4권에서는 달의 운동, 5권에서는 행성들의 경도 방향 운동, 6권에서는 행성들의 위도방향에 대한 내용을 서술했다..[12]
책의 내용은 당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천동설)을 반박하는 내용으로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혁명적인 이론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예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는 출판을 망설였다. 그러나 책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매우 미약했다. 크게 반발하는 세력이나 열렬한지지 또한 없었다. 400부의 초판이 발행되었는데,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아 수요가 적었으며 400부의 초판은 다 팔리지도 못했다. 책의 내용이 전문적이었기에, 당대의 능력 있는 천문학자가 아닌 이상 이해하지 못했다.
책에 쓰여진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가장 먼저 반발했던 개신교 신학자들과 달리, 16세기까지 침묵하던 로마 가톨릭은 1616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금서로 지정하게 된다. 헤르메스주의자였던 브루노가 코페르니쿠스체계를 옹호했기 때문인데, 우주의 중심을 태양이라고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도 헤르메스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되었다. 옛 이집트 종교가 참된 신앙임 동시에 가톨릭도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극단적인 자세를 취한 브루노는 이단으로 여겨져 교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와 관련된 모든 사상은 모두 한통속이라고 취급 받았으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도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다가 1758년 금서에서 풀려났다..[13]
그가 미친 영향[편집]
후대의 평가[편집]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인간은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 낙원으로의 복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거룩함, 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이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새로운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의 자유과 감성의 위대함을 일깨워야 하는 일이다.||”|
— 괴테, 지동설의 부각에 대한 괴테의 언급중에서 [14]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면서 마지막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였다||”|
코페르니쿠스는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체계를 설정함으로써 ‘행성들의 관계’를 부여했다. 후에 이런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모델은 케플러가 행성 운행에 대한 세 가지 법칙을 찾아내는데 바탕이 되었으며 갈릴레이, 뉴턴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다. 비록 성직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문학에 열정을 받쳤으며, 전통적인 우주관을 넘어 지구가 하나의 행성임을 밝힌 위대한 과학자로 평가된다.[15]
이어지는 태양중심설의 계보[편집]
토머스 딕스[편집]
토머스 딕스는 영국의 천문학자이자 대중 과학 운동가이다. 그는 1576년 <지속되는 예측 prognostication everlasting>을 발표했는데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모델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 모델에 대한 영어로 쓰인 최초의 책이다. 딕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가 무한하다고 언급하며 태양을 중심에 두고 모든 방향으로 무한히 펼쳐진 우주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5]
티코 브라헤[편집]
티코 브라헤는 덴마크의 천문학자로 1546년 덴마크의 크누스트루프에서 태어났다. 그는 벤이라는 섬에 우라니보르그라는 천문대를 세워 직접 운영하며 많은 관측을 수행했다. 그는 대표작 <새로운 천문학 입문 astronomiae instauratae progymnasmata>에서 그의 우주모델을 펼쳐보였다. 그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타협을 시도하고 있었다. 다음은 그의 우주 모델의 내용이다. -지구는 우주 중심에 고정 -태양과 달의 운동, 고정된 별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다. -태양은 다섯 행성의 궤도 운동의 중심이다. -수성과 금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태양의 궤도 안쪽에서 궤도 운동한다. -화성, 목성, 토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지만 궤도 안쪽에 태양과 지구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수정된 자신의 우주모델을 통해 소원과 이심의 개념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시차가 관찰되지 않는 등의 증거를 들며 지구의 움직임은 부정했다. .[5]
1571년 12월 27일 태어난 독일의 천문학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꾸준한 학업으로 티코 브라헤의 조수가 되기도 했으며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케플러는 관측 결과에 대한 분석과 기하학적 신비주의에 입각하여 우주를 설명했다. 다음은 케플러의 우주모델의 내용이다.
- 지구는 행성이다.
- 지구를 포함한 여섯 개의 행성은 여섯 개의 입방체와 연계될 수 있다. 안쪽 입방체의 꼭짓점들이 그 입방체를 둘러싼 구의 표면에 접하도록 하고 구는 다음 입방체 표면의 안쪽 측면에 닿게 한다. 각각의 구는 행성의 궤도가 된다.
그는 수많은 관측 결과를 집대성하여 분석함으로써 행성의 운동에 대한 케플러의 3법칙을 발표했다.
<케플러 3법칙>
- 제 1법칙
각각의 행성은 태양의 둘레를 타원형을 이루며 돌고 있고, 태양은 타원의 두 초점 중 하나에 위치하고 있다.
- 제 2법칙
태양과 태양의 둘레를 따라 돌고 있는 행성을 연결하는 가상선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면적을 휩쓸고 지나간다.
- 제 3법칙
어떤 두 행성의 주기의 제곱은 태양에서 그 행성들까지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케플러는 1619년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옹호하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의 개요 epitome of copernican astronomy>발표를 발표했다. .[5]
1564년 2월 15일 태어난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초신성 연구를 통해 천체는 변함이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반박하였다. 망원경을 발명했으며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 중 네개를 발견했다. 이 관측 결과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지지하는 증거가 되었다. 달이 지구 둘레를 돌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도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렇게 되면 지구와 달이 서로 떨어져버리게 된다는 것이 당시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반증이였다. 그러나 목성은 스스로도 이미 궤도 운동을 하고 있고 위성 또한 존재함으로 그 반증을 반박한 것이다. 갈릴레이는 금성의 상변화도 관찰했는데 이 현상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가정이 있어야만 설명 가능하다. 은하수는 별로 이루어져 있고 달의 표면은 분화구가 있다는 등 관측 사실들을 <별들의 소식 siderius nuncius>에 실어 출판하였다. 그가 관측한 흑점 또한 완벽한 무결점의 아리스토텔레스식 우주관을 반박하는 증거이다. 갈릴레오는 <두개의 주요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 dialogue on the two chief world systems>를 출판했다. 이 책은 두 사람과 중재자 간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지지를 드러내고 있다. 갈릴레오는 태양중심설에 대한 지지로 종교재판을 받기도 한다. .[5]
그 이후[편집]
유해 발견[편집]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세상을 떠난 이후 고고학자들은 수 세기에 걸쳐 그의 유해를 찾으려 노력해 왔다. 1807년 나폴레옹은 그의 무덤을 찾다가 실패하였고, 폴란드 공산 정권은 정부와 교회의 관계가 껄끄러워 유해 찾기 작업이 순조롭지 않았다. 2005년 8월 14세기에 건축된 플라우엔부르크 대성당 제단 아래를 파고 들어가자 여러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중에 코페르니쿠스의 것으로 보이는 아래턱이 없는 두개골과 다리뼈 등이 나왔다. 유골은 사망 당시 연령이 60 ~ 70세로 추정되었다. 부러진 코, 왼쪽 눈 위 흉터 등 두개골의 특징이 현존하는 코페르니쿠스 초상화에 나타난 모습과 일치하였다. 2008년 11월 20일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의 유전학 전문가 마리 알렌은 기자회견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책에서 나온 두 가닥 머리카락의 DNA가, 그의 유해로 추정되는 뼈의 DNA와 일치한다'라고 밝혔다. [16] [17]유해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아 아래턱 부분은 소실된 상태였다. 뼈의 상태를 조사한 결과 약 70세 가량 노인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는 코페르니쿠스가 죽었을 때의 나이와 일치한다.[18]
각주[편집]
- Daniel Stone: The Polish-Lithuanian State, 1386-1795.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1, ISBN 0-295-98093-1, p. 101. ([1])
- "He spoke Polish, Latin and Greek. (그는 폴란드어, 라틴어, 그리고 그리스어로 말했다.)" Barbara Somerville: Nicolaus Copernicus: Father of Modern Astronomy. Compass Point Books, 2005, ISBN 0-7565-0812-6, p. 10. ([2]).
- "He was a linguist with a command of Polish, German and Latin, and he possessed also a knowledge of Greek rare at that period in northeastern Europe and probably had some acquaintance with Italian and Hebrew. (그는 폴란드어, 독일어, 라틴어를 모두 썼으며, 그때 당시 잘 찾아보지 못할 만큼의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 그는 아마도 이탈리아어와 히브리어도 했을것이다.)" Angus Armitage: Copernicus and Modern Astronomy. Dover Publications, 2004 (originally 1957), ISBN 0-486-43907-0, p. 62.
-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잘 했으며, 그리스어로된 비잔티움 시를 라틴어를 번역할 만큼 잘 했으며 (Armitage, The World of Copernicus, pp. 75–77), 폴란드어도 잘 했다는 증거가 있다 (Norman Davies, God's Playground, vol. II, p. 26). 이탈리아에 있을 동안 아마도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어를 배웠을 것이다. ([3] "O historii i o współczesności" ("About History and Contemporaneity"), 5월 2003.])
- 오언 깅그리치, 제임스 맥라클란 (2006). 《지동설과 코페르니쿠스》. p. 24-31.
- 오언 깅그리치, 제임스 맥라클란 (2006). 《지동설과 코페르니쿠스》. 바다출판사., p.175-176
- 영문위키피디아,짧은해설서(Commentariolus)
- 오언 깅그리치, 제임스 맥라클란 (2006). 《지동설과 코페르니쿠스》. 바다출판사., p.118-9
- 오언 깅그리치, 제임스 맥라클란 (2006). 《지동설과 코페르니쿠스》. 바다출판사., p.127-9
- 오언 깅그리치, 제임스 맥라클란 (2006). 《지동설과 코페르니쿠스》. 바다출판사., p.166-178
- 오언 깅그리치, 제임스 맥라클란 (2006). 《지동설과 코페르니쿠스》. 바다출판사., p.175-176
- [4] , 사이언스올 지식백과 :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 존 그리빈 (2004).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것, 과학》. 들녁., p.40~43
- [5], 네이버캐스트 :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지동설의 부각에 대한 괴테의 언급 중에서.
- 오언 깅그리치, 제임스 맥라클란 (2006). 《지동설과 코페르니쿠스》. 바다출판사., p.188-195
- 《매일경제》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유해 찾아냈다. 2008년 12월 10일 확인.
- 《중앙sunday》책 속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DNA로 진짜 유골 확인
- 《npr》Scientists say Copernicus' remains, grave found. 2008년 12월 10일 확인.
- '지동설' 코페르니쿠스, 500년 만에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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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편집]
- 지동설과 코페르니쿠스, 오언 깅그리치, 제임스 맥라클란 저, 이무열 옮김,바다출판사(2006)
- 사람이 알아야할 모든 것, 과학, 존 그리빈 저, 김옥진 강윤재 옮김, 들녘(2004)
- 아무도 읽지 않은 책, 오언 깅거리치 저, 장석봉 옮김(2008)
- 코페르니쿠스, 인류의 눈을 밝히다, 마하일 일라인 저, 이종훈 옮김(2009)
-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 한국과학문화재단 시리즈04, 니콜라이 코페르니쿠스 저, 민영기, 최영재 공역(1998)
바깥 고리[편집]
- 코페르니쿠스 - 네이버캐스트
- O’Connor, John J.; Edmund F. Robertson.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영어).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Archive》.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 (영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 수학 계보 프로젝트 (미국 수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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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벌타스만 국립공원(Abel Tasman National Park)은 뉴질랜드 남섬의 북쪽 끝에 위치한 국립공원이다. 이 공원은 1942년에 조류학자와 작가 페린 몬크리프에 의해 발견되었다. 면적은 225.3 km²이며, 뉴질랜드에서는 가장 작은 국립공원이다.[1]
이 국립공원은 숲과 타카카 계곡 북쪽의 언덕진 시골과 리와카 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골든 만과 태즈먼 만의 바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1km에 이르는 긴 해변
트랙 위에 놓인 흔들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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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테아 왕국
나바테아인[편집]
나바테아인(Nabataeans)은 기본적으로 상거래를 주업으로 했으며, 요세푸스의 보고에 따르면 나바테아인은 오아시스에서 살았으며 아라비아반도의 북동부와 시리아의 경계지에 걸쳐서, 또한 유프라테스 강에서 홍해에 걸쳐 즉 이라크 서부까지 이르는 영토에서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경까지 활약한 민족이다. 이슬람 시대 초기에 아랍인들은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원주민을 나바테아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지리[편집]
나바테아 왕국의 중심지는 나바투(후일의 페트라 또는 크세르아셀이다)였다. 나바테아의 주요도시로는 수도였던 나바투 즉 페트라(Petra)와 상업도시(Hegra, 현재의 마다인살리Mada'in Salih)를 들 수 있다. 페트라는 현재 요르단에 소재한다. 페트라에는 '알 카즈네'(Al Khazneh, الخزنة)라는 건물이 있는데 아랍어로 '보물창고'를 뜻하는 기원전 1세기 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식 건축양식의 건물로서 영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 편의 배경이다.
역사[편집]
기원전 4세기 경에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세력권 내에 있었다. 기원전 31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장군 안티고노스는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나바테아는 강력하게 항전하였다. 나바테아왕국의 통일정권은 하리타트 3세(재위 BC 87~BC 67) 시기에 이루어진다. 통일과 함께 그 경계가 로마제국과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하리타트 4세 시기를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까지 그 영토가 미쳤다. 그 후에 로마의 황제 트라야누스는 105년 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그 후 로마 제국 초기에 나바테아인들은 유목생활을 점차 버리고 상업활동을 주로 하게 되었고 관료제에 기반한 국가조직이 정비되었다. 또한 그리스화한 나바테아법을 발달시켰다.
언어[편집]
북쪽 지역에서는 아랍어와 혼화되었다. 그러나 남쪽 지역에서는 순수한 모습이 보존되어 현재의 아랍어의 기원이기도 하다.
나바테아 사람의 언어에 관하여 마카베오기 상권과 하권,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 잡지'에서는 나바테아 왕국을 “아라비아의 왕”으로 읽었으며, 발굴된 나바테아 문자 비문의 인명 연구에서 아랍어 특징이 뚜렷하기 때문에 아랍어의 일파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알타바리 같은 아바스 시대 이후의 이슬람 지역의 역사가들도 나바테아 사람을 아랍인의 일파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 아람어 문자의 후신의 하나인 나바테아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5세기 무렵까지, 시리아 북부에서 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까지 넓은 지역에 많은 나바테아 문자 비문군이 확인되고 있지만, 이들은 나바테아 사람의 활동 범위의 확대에 겹치는 것으로 생각되고 비문군은 대부분의 경우, 아람어로 만들어져 있다.
기원 전후부터 아라비아 반도에서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전역에 아랍계 지파가 무역과 정착 등 다수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아랍계의 여러 세력은 원래 완전히 독자적인 문자를 갖지 않았고, 구어는 물론 아랍어 시스템에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문어로 아람 문자와 아람어를 차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바테아 사람도 마찬가지 아람 문자를 자신의 서체로 변화시킨 나바테아 문자를 사용, 아람어 비문 등을 썼다. 오늘의 아랍 문자의 바탕이 된 것은 4세기에서 5세기 무렵 아라비아 반도의 헤자즈 지방을 중심으로 이용되고 있었던 나바테아 문자 종류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5세기 이후부터 나바테아 문자나 최초 기의 아랍 문자로 아람어가 아닌 아랍어로 쓰여진 비문을 볼 수 있게 된다.
기타 페트라 주변에서는 남 아랍 문자라는 문자가 다수 발견되고 있지만, 어떤 경위로 나바테아 사람에게 전해 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경제[편집]
농업에서 나바테아인들의 개간 기술은 높이 발전된 상태였다. 태양열이 작열하는 기후에서 그들은 주위지역의 강수를 모아 밭으로 끌어 들였다. 농업지 면적은 10분의 1 또는 20분의 1을 차지하였다. 나바테아인의 개간기술에 관하여 권위자는 예루살렘 대학의 에베나리(Evenari)교수이다.
나바테아인의 왕[편집]
- 나바욧 이븐 이스마엘(Nabayot ibn Ishmael) (이스마엘의 아들 느바욧(Nebajot)은 성경 창세기 25장 13절에도 나온다).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나바테아인의 기원을 가리킨다.
- 나트누Natnu (기원전 650년 경)
- 누후루 이븐 나트누Nuhuru ibn Natnu
나바테아왕국의 지배자[편집]
- 하리타트 1세 Harithath (Aretas) I. 169–144 v. Chr.
- 말리쿠 1세 Maliku (Malichus) I. 144–110 v. Chr.
- 하리타트 2세 Harithath (Aretas) II. 110–95 v. Chr.
- 에로팀 Erotim ~110–100 v. Chr.
- 우바이다 1세 Ubaidah (Obodas) I. 95–87 v. Chr.
- 아르라빌 1세 ar-Rabil (Rabbel) I. 87 v. Chr.
- 하리타트 3세 Harithath III. (Aretas III. Philhellen) 87–62 v. Chr.
- 우바이다 2세 Ubaidah (Obodas) II. 62–~50 v. Chr.
- 말리쿠 2세 Maliku (Malichus) II. ~50–28 v. Chr.
- 우바이다 3세 Ubaidah (Obdas) III. 28–9 v. Chr.
- 하리타트 4세 Harithath IV. (Areta IV. Philopatris) 9 v. Chr.–~40 n. Chr.
- 말리쿠 3세 Maliku (Malichus) III. ~40–~70
- 샤킬라트 Shakilat ~40–~60
- 아르라빌 2세 ar-Rabil II. (Rabbel Soter) ~71–106
- 가밀라트 Gamilat ~71–90
- 말리쿠 4세M aliku (Malichus) IV.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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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목차
마고 전설[편집]
아주 오랜 옛날에 힘이 장사인 천태산 마고할미가 있었다. 하루는 옷을 만들기 위해 솜을 자아 실을 뽑으려고 물레를 돌렸는데, 팔 힘이 좋아서 자꾸 물레가 흔들렸다. 자기의 팔 힘이 센 것은 탓하지 않고 애꿎은 물레만 탓하였다. 그렇다고 살살 돌리자니 일이 더딜 것 같아 물레를 눌러 놓을 돌을 구하기로 하였다. 주변을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돌이 없어 멀리 동해로 나갔다.
바닷가에서 마침 물렛돌 할 만한 돌을 세 개 찾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머리에 이고, 다른 길쭉한 돌은 지팡이로 삼고, 마지막 하나는 치마폭에 싸서 가져왔다. 그런데 지금의 사천만 쪽으로 오다가 다시 보니 머리에 이고 오던 돌과 지팡이로 짚고 오던 돌은 너무 작아 보였다. 그래서 작은 돌 두 개는 도중에 내버리고, 치마에 싸서 오던 큰 돌 하나만 두문리까지 가지고 왔다.
마고할미가 가져오다가 버린 작은 돌은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의 서쪽에 위치한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의 구암리 구암마을 앞에 있고,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에 서 있는 돌이 ‘마고할미 물렛돌’이다.
관련 전설[편집]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 중에 마고할미와 매고할망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주 흔한 편에 속한다. 마고(麻姑)나 매고(埋姑)는 원래 마고신화에서 나온 것으로 한민족의 생성 신화라 할 수 있다. 환인 환웅 단군 이전의 이야기로 현재 학계에서는 단군신화를 역사적 실체로 보면서, 그 이전에 홍수신화나 마고신화 등이 생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를 이룬다.
전설에서 단군에게 굴복한 ‘마고’처럼 산신이 되거나 선문대할망 같이 빠져죽거나 마고에 대한 얘기는 다양하다. 18세기 장한철(張漢喆)이 지은 <표해록(漂海錄)>에 사람들이 한라산을 보고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선마고(詵麻姑)이다. 마고에 빌었다는 의미로 선문대할망이 한자 선마고로 표기된 것이다. 이토록 전국 곳곳에 마고가 섬을 만들거나 산을 만들고 치마로 돌을 날라 쌓았다는 성이 있는 것을 보면 같은 계열의 여신임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이야기의 전설을 살펴보면 양주의 노고할미와 삼척의 서구할미가 마고로 나오는데 둘 다 할미지만 형상은 판이하다. 노고할미가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인자한 할머니라면 서구할미는 구미호처럼 둔갑술을 부려 사람들을 해친다. 노고할미가 엄청난 거인이라면 서구할미는 거인은 아니지만 생김새가 괴이하고 마음씨가 고약하다. 이처럼 마고에 대한 이야기는 전국에 산재되어 한국의 창세신화와 함께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1]
할미산성[편집]
경기도 용인시 석성산에는 할미산성이 있었고, 할미산성의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성을 반씩 맡아서 누가 먼저 쌓는가를 내기했는데, 할아버지는 돌을 잘 다듬어서 제대로 성을 쌓고 있었고, 할미는 치마자락에 잔돌을 줏어 담아서 성을 쌓았다고 한다. 결국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해 성을 쌓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해 내기에서 졌다고 한다.
선문대할망[편집]
노고할미[편집]
서구할미[편집]
강원도 <삼척군지>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취병산 서쪽 백월산 중턱 바위굴에 서구할미가 살았는데 심술이 많아 어린애들을 홍역 같은 병에 걸려 죽게 했다. 요염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신해 남자들을 홀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재물을 바치지 않으면 해도 입혔다. 생김새도 산발에 낚시코에, 손톱은 길다랗고 앙상했다.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했는데 효자인 최아무개가 머리에 쑥뜸을 뜨자 “효자가 벌을 주니 달게 받겠다”고 하면서 며칠 만에 죽었다고 한다. 서구할미가 죽어서 바위로 변한 것이 서구암이라는 것이다.
온달산성[편집]
충청북도 단양군의 온달산성은 온달을 중심으로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장발리에 세워진 선돌은 온달장군이 성을 쌓기 위해 석재를 마고 할멈에게 가져오도록 부탁했는데, 마고 할멈이 지금의 장발리에서 돌을 캐 성산 꼭대기까지 날랐다. 그런데 성이 다 되어 갈 즈음에 신라군과 싸움에서 온달장군이 패하여 성을 빠져 나왔다는 전갈을 받고 마고 할멈이 들고 있던 큰 돌을 냅다 던지니 그 돌이 날아가 세로로 섰다고 한다. 그러나 마고 할멈은 온달장군의 누이동생 화신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평양 왕림고개[편집]
그외[편집]
이외에도 경기도 용인 상하리 고인돌에는 원래 평안도에 살았던 마고할미와 관련 설화가 남아 있는데 마고할미가 이곳을 다스리기 위하여 고인돌을 세웠는데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다가 마지막에는 이곳에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경기도 화성시에는 마고할미가 육지에서 돌을 날라 쌓았다는 「형도(衡島)」 탑 전설이 있고 경기도 이천시 중리동에는 옛날 마고할미가 금강산을 만들기 위해 흙과 바위를 나르다 흘린 흙 한줌이 산이 되었다는 「도드람산전설」 등이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의 충주산성도 마고할미가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충주산성은 금봉산(錦鳳山), 즉 남산(南山) 정상에 위치하여 남산성 또는 금봉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마고선녀(麻姑仙女)가 7일 만에 축성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옥황상제가 살고 있는 서쪽을 향해 수구가 뚫려 있는 것을 보고 괘씸하게 생각한 옥황상제는 마고할미를 성주가 아닌 성지기로 삼았고 그 뒤 이 산성이 마고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고모산에는 길이 1.6km, 너비 4m에 이르는 고모산성이 있다. 삼국시대에 쌓은 성이라고 하며, 천하장사 고모할미와 마고할미가 경쟁하여 하룻밤만에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고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 정곡마을 뒷산에 있는 마고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석성(石城)으로 북쪽의 가파른 절벽을 이용하여 동쪽과 서쪽, 남쪽에만 성벽을 쌓았는데 마고할미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울산시 중구 성안동에느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과 마고할미의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숯못'이라는 생태공원이 있다. 숯못 생태공원은 숯못 7700㎡과 인근 야산을 포함 총 3만6000㎡의 규모인데 숯못은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반티이못(함지못)이라 할 정도로 작은 못이었다. [3] 이 전설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서 내려 오는 전설과 거의 같다. 탄천문화제에서 '숯못'이라는 생태공원이 탄천(숯내)으로 바뀌어 삼천갑자 동방삭의 전설이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득한 옛날에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에 서왕모(西王母)라는 여선(女仙)이 살고 있었다. 그는 곤륜산에서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명약을 가지고 있었던 신선이었다.
이 곳에 숨어 들어간 동방삭은 불로불사약은 찾지 못했으나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먹고 돌아와 장수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동방삭은 전한의 무제 때에 조정에서 벼슬해 상시랑, 태중대부까지 오르면서 해학(諧謔)과 능한 변설(辨說)로 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궁중에서는 윤활유격인 역할을 하여 그 말 한마디로 긴장에 쌓인 분위기를 봄날처럼 부드럽게 했다. 그런데 그도 서왕모의 대노를 사게돼 도피행각이 계속된다.
서왕모의 명을 받은 마고 할미는 동방삭을 잡으려고 찾아다녔으나 변신술에 능한 그를 잡을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마고 할미는 숯못에서 기다리기로 하여 세월이 간지 얼마였는지도 몰랐다. 숯못에 앉아 검은 숯을 바래면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긴 손톱도 다 닳고 말았다.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하루는 숯을 바래고 있을 때였다.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보니 이상했다.
"노파는 왜 숯을 그렇게 씻고 있오?"하고 물으니 노파가 답하기를 "검은 숯이 흰숯이 되도록 물에 씻어 바래는 중이라오"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길손은 무심코 "헤헤, 난 삼천갑자를 살아도 검은 숯을 희도록 바래는 일은 첨은 보는 일일세, 에헴"해 버렸다.
이 말은 들은 마고할미는 "너를 잡으려고 기다린지 오래네, 이제 네 명도 끝장이구나"하며 동방삭을 잡아가버렸다.
이 숯못에서 한마디의 실언으로 1만8000년의 운명이 끝날 줄은 그는 미처 몰랐다.
같은 지역의 울산광역시 남구 상북면 길천리의 「동뫼산전설」은 마고할미가 언양성을 쌓는 일을 도우려고 밀양에서 산을 하나 뽑아 가져오다가, 성을 다 쌓았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 두어 산이 되어서 일명 밀양산(密陽山)이라고 했다는 전설이다. 또한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봉남리에는 태고 때 성모 마고할미가 반야도사와 혼인한 뒤 딸 여덟을 낳아서 모두 무당이 되게 하였다는 지리산에 얽힌 전설 등이 있다.
민속 행사[편집]
해마다 경기도 용인시 석성산 할미성에서 대동굿이 펼쳐지는데 대동굿은 온 마을의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서 펼치는 굿이다. 경기도 일대에서 전승이 되고 있는 도당굿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용인 할미성 도당굿은 일반적인 경기도 도당굿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마을의 풍장패가 길놀이 풍물굿을 먼저 친 다음 타동(他洞)에서 함께 동참하기 위해서 오는 풍물을 맞아들이는 것이 색다른 모습이다.
참고 자료[편집]
- 박제상 저. 김은수 역. 《부도지》. 한문화. 2002년. ISBN 8986481782
- 김정숙. 《자청비 가믄장아기 백주또》. 각. 2002년. ISBN 9798989719136
- 권태효. 《한국의 거인설화》. 도서출판 역락. 2002년. ISBN 8988906683
- 윤치원. 《부도지》. 대원출판사. 2002년. ISBN 9788972610632
- 고혜경.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한겨레출판사. 2010년. ISBN 9788984314054
- 최원오 글. 이선주 그림. 《당금애기 바리데기》. 현암사. 2010년. ISBN 9788932315652
- 박제상 저. 김은수 역. 《부도지》. 한문화. 2011년. ISBN 9788956991313
- 조현설 글. 이선주 그림. 《자청비》. 휴머니스트. 2012년. ISBN 9788958625292
- 김계옥. 《부도지》. 글로세움. 2012년. ISBN 4808997222216
- 노중평·박경중. 《마고의 세계》. 수서원. 2013년. ISBN 9788967980023
- 조현설. 《마고할미 신화연구》. 민속원. 2013년. ISBN 9788928505128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마고할미인가 마귀할멈인가” (한국어). 한겨레(네이버). 2004년 12월 24일. 2010년 6월 20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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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고선녀의 전설…용인 할미산성은 신라의 성터” (한국어). 데일리안. 2009년 5월 3일. 2010년 6월 20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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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1=이(가) 없음 (도움말)
- 삼천갑자 동방삭 전설 '숯못' , 생태공원 조성 뉴시스(2007.07.03) 기사 참조
- “'할미성토속굿' 재현 대동제 25일 용인서 열려” (한국어). 연합뉴스(네이버). 2008년 9월 23일. 2010년 6월 20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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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1=이(가) 없음 (도움말)
바깥 고리[편집]
- (영어) Return to Mago
한국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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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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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국기는 1851년 10월 31일에 제정되었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된 가로 줄무늬로 구성되어 있다. 빨강은 볼리비아의 용사들을, 노랑은 볼리비아의 광물 자원을, 초록은 풍요로움을 의미한다.
정부기, 군기, 정부 선박기에는 국장이 그려져 있는 형태의 기를 사용하며, 민간기와 상선기는 국장이 없는 형태의 기를 사용한다.
정부기, 정부 선박기
비율 15:22
군기
비율 15:22
해군기
비율 2:3
1825년 당시 국기
1826년부터 1851년까지 쓰인 국기
¹ 일부가 남극에도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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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
사화(士禍)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 중기에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4차례의 옥사를 말한다. 이들 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년)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4대 사화’라고 부른다.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의 비리를 규탄하면서 점차 정치적 영향력이 커져갔다. 그러던 중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훈구 세력의 불만이 폭발하였고, 양 세력간의 갈등으로 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사화는 사림 세력의 역사적 성장이라는 추세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를 통해서 사림들은 많은 피해를 입기는 하였으나 지방의 서원이 향약을 기반으로 지지기반을 확산하는 등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 이르면서 중앙 정계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며, 이후 사림 정치를 주도하였다.
배경[편집]
성종 때에는 훈구 대신과 사림이 정치적 입장은 달랐어도 서로간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오히려 두 세력은 서로 협력하여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기념비적인 편찬사업을 마무리하였다. 여기에는 훈신 중에도 서거정·노사신·최항·양성지 같은 이들은 원성을 듣던 인물이 아니었고, 또 양파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성종의 뛰어난 정치적 역량과도 관계가 깊었다.
세조 때 현직자와 퇴직자에게 아울러 주던 과전법을 폐지하고 현직자에게만 주는 직전법으로 개편한 것은 조선시대의 토지제도가 가지는 한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실시할 수 없어서 직전법도 폐지되고, 이제는 새로이 관리가 되더라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땅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뿐이었다. 신진관료는 여기에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불건전한 토지 제도를 개혁하자는 주장이 그들 사이에 점차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 토지 문제를 에워싼 신·구의 대립이 귀족간의 분열과 파쟁을 일으킨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토지 문제를 에워싼 신·구파의 대립은 다른 면에서 볼 때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었다.
4대 사화[편집]
|사화||발생 연도||발생 원인||가해자||피해자|
|무오사화||1498년||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유자광, 연산군||김종직, 김일손, 김굉필, 권경우, 이목, 허반, 임희재(임사홍 아들), 표연말, 정여창|
|갑자사화||1504년||폐비 윤씨 사건, 연산군 왕권 강화 계획||연산군||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이세좌, 한명회, 귀인 정씨, 엄귀인, 인수대비, 정찬손, 심회, 정안지, 한치형, 이극균, 성준, 조지서, 정성근, 정인인, 이승건, 홍한, 김천령
|기묘사화||1519년||조광조의 개혁 정치 반발||남곤, 심정, 홍경주, 중종||조광조와 그의 추종자들|
|을사사화||1545년||소윤과 대윤의 권력 싸움||소윤||윤임,유관, 유인숙, 계림군, 봉선군, 이덕응, 정희, 정욱, 나식|
무오사화[편집]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에 일어났으며, 사초(史草)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부른다.
연산군(1494~1506)이 즉위하면서 서로 협력하던 훈구파와 사림파의 사정은 달라졌다. 원래 시재(詩才)와 감성이 뛰어난 그의 어머니(성종의 비, 폐비 윤씨)가 신하들의 충돌로 죽게 된 것을 알고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학덕 있는 훈구 대신들은 대부분 사망하고, 사림 세력은 더욱 커져서 그들의 분방한 언론(言論) 활동이 왕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평소 사림의 공격을 받아 수세에 몰려 있던 훈구 대신의 잔류 세력인 유자광 등은 1498년(연산군 4년) 김일손이 지은 사초를 문제 삼아 왕을 충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관련이 있는 김일손·표연말(表沿末)·정여창(鄭汝昌)·최부(崔溥) 등 수십 명의 사림을 사형·유배 혹은 파직케 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종직 문인으로 구성된 영남 사림이 대부분 몰락하고 말았다.
갑자사화[편집]
갑자사화(甲子士禍)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일어난 사화이다.
사림을 정계에서 몰아낸 후 연산군은 훈구 대신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던 중 연산군을 싸고도는 척신(戚臣)들이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尹氏)의 폐비사사(廢妃賜死) 사건에 윤필상(尹弼商) 등 훈신이 관여했음을 폭로하여 이 사건에 관련된 훈신과 아직 남아 있던 사림까지 몰아냈고. 특히 가족. 제자 처벌하였다....
기묘사화[편집]
두 차례의 사화로 쓸 만한 인재들을 처단하고 난 뒤 연산군의 음탕과 사치는 심해지고,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눌렀으며,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쓰였다 하여 국문학습을 탄압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도 했다.
백성과 사림의 여망 속에 왕이 된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고 도학(道學)을 숭상하여 무너진 유교정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특히 1515년(중종 10년)에 젊고 깨끗한 조광조(趙光祖)가 중용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젊고 기개 있는 사림이 현량과(賢良科)라는 추천제도에 의해서 대거 등용되었다. 이때 등용된 사림은 기호출신이 많아 기호사림으로도 불린다. 이들의 가문은 조선 초기에 큰 벼슬을 지낸 훈신의 후예들이 적지 않았으나, 체질적으로는 전형적인 성리학자로 변신해 있었다.
조광조 일파는 삼사(三司)의 언관직에 포진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公論)이라고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즉 연산군의 학정에 대한 경험에서 무엇보다도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어 경연을 강화하고 언론활동을 활성화했으며, 내수사 장리의 폐지, 소격서(昭格署)의 폐지, 그리고 향촌 사회에서 향약(鄕約)의 실시와 《삼강행실》, 《이륜행실(二倫行實)》, 《주자가례》, 《소학》의 보급, 균전제 실시를 통한 토지집중의 완화, 방납 폐단의 시정 등을 주요정책으로 내세웠다.
사림의 정책들은 지방 중소지주층의 이익을 크게 반영하고, 농민의 부담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것이었으나,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특히 조광조 일파는 공신에 책봉된 100명 가운데 4분의 3은 부당하게 공신이 되었으므로 그들의 공신 칭호와 토지 및 노비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공신들의 원한을 샀다. 또 공신들은 의정부와 6조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삼사(三司)에 포진한 사림의 견제가 공신들에게는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언관(言官)의 권한이 너무 큰 것은 나라를 어지럽게 할 뿐 아니라, 《경국대전》의 권력체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행동으로 비판하였다.
중종은 처음에 사림을 신임했으나, 나중에는 지나치게 군주를 압박하는 데 싫증을 느꼈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1519년(중종 14년) 남곤(南袞)·심정(沈貞) 등 훈구 대신들은 조광조 일파에게 반역죄의 누명을 씌워 무참하게 죽이거나 유배보냈다.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이 사건으로 사림의 개혁정치는 4년 만에 끝나고, 그들이 추진했던 정책도 대부분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때 화를 입은 조광조·김정(金淨)·김식(金湜)·김구(金銶)·기준(奇遵) 등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높은 추앙을 받아 16세기 후반에 사림 시대를 여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을사사화[편집]
이 사건은 외척(外戚)간의 권력싸움에서 빚어진 것이 다른 사화와 다르다. 즉 중종이 돌아가자, 첫째 계비(莊敬王后)의 소생인 인종(仁宗)이 즉위하고 왕비의 동생인 윤임(尹任, 大尹)이 세력을 떨쳤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타계하자 둘째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소생인 명종(明宗)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 역시 어린 관계로 왕후가 수렴청정하고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小尹) 일파가 실권을 장악했는데, 집권하자마자 전 왕의 외척인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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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 도시
자매 도시, 우호 도시, 자매 결연 도시는 시민의 문화 교류나 친선을 목적으로 하는 도시 관계의 개념이다. 대한민국의 국어사전에서는 "도시 상호 간에 문화를 제휴하고 그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 친선 관계를 맺은 도시"로 정의하고 있다. 유럽 연합에서 이러한 관계를 friendship towns, partner towns로 옮기고 있으며 영국에서는 twin towns라고 부른다. 북아메리카,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에서는 "자매 도시"라는 용어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며 전 소비에트권에서는 "형제 도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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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쇠라
생애[편집]
쇠라는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샹파뉴 출신의 법공무원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파리 출신이었다. 쇠라는 조각가인 쥐스탱 르캥과 함께 처음 예술을 공부하였다. 쇠라는 1878년과 1879년 에콜 데 보자르에 출석했다. 브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1년간 복무한 뒤 1880년 파리로 돌아왔다. 자신만의 작업실로 옮기기 전까지 파리의 센강 좌안에 그는 두 명의 학생 친구들과 작은 작업실을 공유했다. 그는 그 다음 2년간 흑백화를 그리는 데에 노력을 쏟았다. 그는 1883년 처음으로 그의 주요한 작품을 남겼다. 작품의 이름은 〈아스니에르의 물놀이〉였다. (아스니에르의 센강 참고)
파리 살롱에서 그의 그림이 거절당한 뒤, 쇠라는 이와 같은 주류파에서 벗어나 대신 파리의 독립적인 예술가들에 가담하게 된다. 1884년 그와 다른 예술가들은 (막시밀리안 루스(Maximilian Luce)를 포함하여) 독립 예술가 협회(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s)를 결성했다. 여기서 그는 동료 예술가인 폴 시냑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쇠라는 점묘주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후에 같은 작풍으로 그림을 그린 시냑과 공유했다. 1884년 여름 쇠라는 그의 걸작인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그리기 시작하여 완성하는 데에 2년이 걸렸다.
쇠라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막염, 폐렴, 전염성 앙기나나 디프테리아 중 하나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2]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서커스〉는 그의 죽음으로 영원히 미완성이 되었다.
쇠라는 신인상주의의 일파이며 '신인상주의'라는 이름에 걸맞게 점묘화라는 새로운 그림 표현 기법을 창조해내었다
과학적 배경과 영향[편집]
19세기에 미셸 외젠 슈브뢸(Michel Eugène Chevreul)과 오그던 루드(Ogden Rood), 다비드 주터(David Sutter) 등의 과학자인 저술가들은 색과 광학 효과, 지각에 대한 논문을 썼다. 헤르만 폰 헬름홀츠나 아이작 뉴턴 등의 과학적 발견도 비과학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되었다. 슈브뢸은 당시 예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했을 것인데, 그가 원색과 중간색의 색상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슈브뢸은 오래된 태피스트리들을 복원한 프랑스 화학자이다. 태피스트리들을 복원하면서 슈브뢸은 올바르게 어떤 부분을 복원하는 단 한가지 방법은 없어진 울(양모로 만든 섬유) 주위에서 색상들의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주변의 염료가 무엇인지 모르면 정확한 색상을 얻을 수 없었다. 슈브뢸은 두가지 색이 살짝 포개지거나 매우 가깝게 병치된 것이 멀리서 보면 다른 색깔로 보이는 효과를 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현상의 발견은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점묘화 테크닉의 기초가 되었다.
슈브뢸은 또한 관찰자가 한 색을 본 뒤에 정확히 반대되는, 보색의 '잔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붉은 색의 사물을 본 뒤에는 원래 사물에서 녹색 잔상을 보게 된다. 이러한 보색(예를 들어 빨강에는 녹색)의 잔상 효과는 망막의 지속성 때문이다. 색들의 상호작용에 흥미 있어한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에 보색을 강하게 사용한다. 슈브뢸은 묘사할 물체의 색을 칠하기만 하지 말고, 조화를 얻기 위해 색상을 추가해 알맞게 조정하라고 예술가들에게 조언했다. 슈브뢸이 언급한 조화를 쇠라는 '정서'라고 불렀다.
맥길 대학교(McGill University)의 Anne Beauchemin 교수는 대부분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슈브뢸의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고, 대신에 1867년에 슈브뢸의 발견을 소개한 샤를 블랑(Charles Blanc)의 저서 Grammaire des arts du dessin을 읽었을 것이라 한다. 블랑의 책은 예술가들과 예술 감정가들을 위한 책이었다. 색은 그에게 정서적 중요성을 지녔고, 블랑은 신인상주의자들이 채택할 이 이론을 가까이하라고 예술가들에게 노골적으로 권장한다. 블랑은 색은 '취향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만, 아무래도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과 가까워야 한다고 한다. 블랑은 색들의 강도를 일정하게 하지 말고, 각 색상들의 역할을 계획하고 이해할 것을 주장했다.
역시 색과 광학 효과를 연구했던 오그던 루드 역시 신인상주의 화가들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슈브뢸의 이론이 뉴턴의 색 혼합에 대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데 반하여 로드의 저작은 헬름홀츠의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그것은 안료가 함께 섞이고 병치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효과에 대한 헬름홀츠의 분석이었다. 루드는 삼원색이 빨강, 녹색, 남색이라고 보았다. 슈브뢸이 그랬던 것 같이, 루드도 두 색을 병치하면 멀리서 볼 때에 제3의 특이한 색처럼 보인다고 언급했다. 원색을 다른 원색 옆에 병치하면 물감을 섞어서 같은 색을 만들 때보다 더욱 강렬하고 만족스러운 색상으로 눈과 정신이 지각한다고 루드는 지적했다. 루드는 안료의 색과 광학의 색(빛)이 같은 방식으로 혼합되지 않기 때문에, 색의 더함과 뺌의 특징(가산혼합과 감산혼합)의 차이를 인지하라고 예술가들에게 충고했다.
쇠라의 정서와 과학의 융합[편집]
쇠라는 회화의 과학적 접근에 대한 색채 이론가들의 개념을 명심했다. 쇠라는 음악가가 음악의 화성을 위해 소리와 템포에서 변주를 하듯이 화가도 미술에서 조화와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쇠라는 색채의 과학적인 적용이 다른 자연 법칙과 비슷하다는 이론을 세웠으며, 이 추측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쇠라는 자기 고유의 발견적 방법들을 기초로 지각 대상에 대한 인식과 광학 법칙으로 미술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선과 색채의 강도, 색채 도식을 사용하여 이 언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쇠라는 이 미술적 언어에 en:Chromoluminar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890년 모리스 보부르(Maurice Beaubourg)에게 보낸 서한에서 쇠라가 감성과 조화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어떻게 느끼는지 엿볼 수 있다. 쇠라는 '미술은 조화이다. 조화는 톤이 비슷하거나 요소들에서, 그리고 색채와 선에서 유추한다. 명랑함과 고요함, 슬픔의 혼합에서 이러한 것들이 빛의 영향과 지배 아래 있음을 생각하면 말이다.[3].
쇠라의 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즐거운 정서는 선을 위로 향하게 하고, 따뜻한 색상을 주로 사용하여 밝은 색조들을 지배적으로 만든다면 낼 수 있다. 고요함은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을 사용하여 밝음과 어둠을 균형있게 쓰고, 선을 수평적으로 쓰면 낼 수 있다. 슬픔은 어둡고 차가운 색상을 사용하고 아래를 향하는 선을 쓰면 된다.
성취[편집]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각각의 사회 계급의 구성원들이 공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색으로 칠해진 병치된 작은 점들은 이런 색들을 감상자의 눈에서 시각적으로 혼합되게 해주는데, 이는 물감의 안료가 원래 갖고 있는 색과는 다른 색이다. 쇠라가 약 3m정도의 너비인 이 그림을 완성하는 데는 2년이 걸렸는데, 이 시간 동안 그는 공원에서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습작 스케치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60개 정도의 습작이 있다고 한다.) 현재 시카고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주석[편집]
참고 문헌[편집]
- Seurat, Georges. Letter to Maurice Beaubourg (1890), in Impressionism and Post-Impressionism: Sources and Documents. L. Nochlin (ed.) Englewood Cliffs (NJ), 1966, p. 113
- Hunter, Sam. Georges Seurat, in S. Hunter and J. Jacobus, Modern Art (3rd ed.). New York: Harry N. Abrams, Inc. 1992, p. 27
바깥 고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 조르주 쇠라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다음)
- 조르주 쇠라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조르주 쇠라 - 네이버캐스트
- (영어) smARThistory podcast: Seurat's Evening Honfleur
- (영어) Nocturnes John Updike on Seurat from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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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디르네(터키어: Edirne, 그리스어: Αδριανούπολη, 불가리아어: Одрин)는 터키의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이다. 그리스와 불가리아 국경근처의 도시로 터키의 에디르네 주의 주도이다. 영어권에서는 아드리아노플로 알려져 있다.
지리적 위치[편집]
북서쪽으로 불가리아, 서쪽으로 그리스, 남서쪽으로 에게 해와 면해 있는 에디르네 주의 중간에 있다. 그리스와 불가리아 국경 근처로 툰자 강과 메리츠 강의 합류 지점에 있다.
런던과 이스탄불을 잇는 철도가 지나며, 간선도로로 중앙 유럽, 이스탄불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다.
역사적으로 에디르네는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 사이의 주요통로가 지나는 관계로 전략적인 요충지로 여겨져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트라키아의 부족들이 최초로 정착하여 살았고 일찍부터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125년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재건되고 확장되어, 그의 이름을 따서 하드리아노폴리스 또는 아드리아노폴리스로 개명되었다. 로마 속주 트라키아의 수도로 번창했으며 371년 발렌스 황제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후에도 계속해서 비잔티움 제국의 중요한 도시이자 부수도로 남아있다가 10세기에 불가르 족에게 함락되었고, 제4차 십자군등 라틴인들에게 2차례의 심각한 약탈을 당했다.
1360년과 1362년 두 차례에 걸쳐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의 침공으로 오스만의 세력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오스만의 유럽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15세기에 들어서 오스만 제국의 수도이자 행정·상업·문화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수도의 자리를 이스탄불에 내주었다.
근대에 이르러 수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외국의 지배를 받고 파괴되어 점차 쇠퇴해갔다. 1829년, 1878년 러시아에게 점령되었으며, 1913년 제1차 발칸 전쟁중에는 불가리아에 점령되었고 다시 터키로 넘어갔다가 1920년 터키 독립전쟁 중 그리스에게로 넘어갔으나, 1922년 결국 다시 터키로 넘어왔다.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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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스 암스트롱
|메달 기록|
|랜스 암스트롱|
|남자 사이클|
|미국의 선수|
|올림픽|
|실격||2000 시드니||개인 도로독주|
|세계 자전거 경기 선수권 대회|
|금||1993 오슬로||개인 도로레이스|
생애[편집]
텍사스 주 플레이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어렵게 살았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부모는 10대의 어린 나이였으며, 부부 관계가 좋지 못했다. 결국 그의 부모는 랜스가 2살 때 이혼했고, 그의 양육권은 모친이 가져갔다. 그 후 모친은 테리 암스트롱과 재혼했고, 생부가 그의 친권을 포기하고 그는 암스트롱 집안에 입적되어 계부의 성인 암스트롱 성씨를 쓰게 되었다. 모친과 재혼한 계부와의 관계도 악화되어 모친은 다시 이혼을 했고, 랜스 암스트롱은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살며 운동을 했다.
항간에는 어린 암스트롱 형제와 자전거 경매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아름답게 윤색된 유럽의 동화에 그의 이름을 갖다 얹은 것일 뿐, 그의 어린 시절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어머니 린다의 거듭된 결혼 실패로 랜스는 같이 살며 지내던 형제가 없는 외동이로 자랐으며, 그의 생부는 다른 여성과 재혼한 후 다시 자녀를 보아 그에게 아버지가 다른 이복 형제가 있기는 하나, 그는 그의 생부 및 이복 형제와 만나지 않았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철인3종경기를 거쳐 사이클 영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헌신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텍사스 주 대표 선수로 청소년 철인 3종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주목받기 시작했고, 결국 전문 사이클 선수가 되기로 했다. 모토로라 사이클 팀에 입단했고, 이후 미국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1993년 국제 사이클 연맹(UCI) 세계 선수권 도로 부문에서 우승했다. 그 후 유럽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며, 유럽 선수들이 주도하는 도로 사이클계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는 미국 선수로 주목받았다.
중병으로 투병한 전력 때문에 다시 전문 선수로 일어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깨고, 그는 재활 훈련을 하여 1998년 선수로 복귀하고 미국 우편 공사 팀에 입단했다. 이후 1999년 ~ 2005년 투르 드 프랑스에 사상 최초로 7연속 우승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1999년 그는 ABC가 선정한 올해의 세계운동선수로 선정되었고, 2002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Sports Illustrated>> 잡지는 그를 올해의 남자 스포츠 선수로 뽑기도 했다. AP 통신은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그를 올해의 선수로 ESPN이 주관하는 ESPY 시상식에서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그를 수상자로 지목하는 등 미국 최고의 스포츠 선수 중 하나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2005년 시즌부터 미국 우편 공사 팀이 디스커버리 채널 팀으로 스폰서가 변경되어, 그는 디스커버리 채널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펼쳤고(2007년 다시 미국 우편 공사로 변경됨) 그는 2005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통산 7회 우승한 후 7월 24일 그는 선수생활을 그만 두고 은퇴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암스트롱은 자신이 설립한 재단 활동과 기타 스포츠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자신의 암 투병 경험을 살려, 암 치료와 회복을 위한 재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7년 앤드리 애거시, 무하마드 알리, 안드레아 예거, 알론조 모닝(Alonzo Mourning), 카레이서 제프 고든 등의 스포츠 선수들과 "애슬리츠 포 호프"(Athletes for Hope) 재단을 설립했으며 수많은 시민들의 봉사 활동 및 후원을 받게 됐다.[1]
랜스 암스트롱은 2008년 9월 9일 현역 복귀를 선언했으며[2]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 팀에 입단했다. 아스타나 팀 소속으로 2009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서 3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3위를 차지하였다. [3] 2010년 시즌, 라디오셱 팀으로 소속팀을 옮기며 계속 활약하지만, 도핑 논란이 부각되면서 큰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한다. 결국, 2012년 그는 도핑 혐의를 인정하고 이전의 기록이 삭제되고 사이클 계에서 영구 퇴출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도핑 의혹과 영구제명[편집]
암스트롱은 이미 암에서 완치된 후 복귀할 때부터 도핑 의혹에 시달렸다. 프랑스 등 유럽 언론들은 그의 도핑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했으나, 미국 쪽에서는 사이클 계를 주도하는 유럽의 편견과 음모라며 이런 의혹을 일축했다. 그러나 2010년 팀 동료 플로이드 랜디스가 암스트롱이 금지약물인 에리트로포이에틴(EP0)과 테스토스테론을 투약하는 사실을 목격했다고 증언해 도핑 의혹이 다시 크게 부각되었고 이로 인해 2년 가까이 미 연방 경찰의 내사를 받으며 지루한 법정 공방이 계속되었으나, 기소 없이 수사가 종결되었다.[4] 또한 2004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지만 도핑 혐의로 메달을 박탈당한 또다른 팀 동료 타일러 해밀튼은 2011년 CBS 방송 프로그램 〈60분〉에 출연해 암스트롱의 도핑 사실을 고발했으며 2012년에는 자신의 저서 《비밀의 레이스》에서 암스트롱이 투르 드 프랑스 출전에 앞서 금지약물을 투약했다고 폭로했다.[4][5]
법정에서는 기소 없이 수사가 종결되었으나, 도핑을 했다는 증언이 계속되면서, 암스트롱은 2012년 8월 24일 오랫동안 진행된 도핑혐의에 대한 법정공방을 포기하고 미국반도핑기구(USADA)의 영구 제명 징계를 받아들였다. [6] 그리고 2012년 10월, 국제 사이클 연맹(UCI)은 최종적으로 암스트롱이 1998년 8월 1일 부터 대회에서 세운 모든 성적을 박탈하는 처분을 내려, 그의 투르 드 프랑스 7회 우승 기록도 모두 삭제되었고, 동시에 사이클 선수 자격을 영구히 제명하여 그는 국제 사이클 계에서 완전히 퇴출되었다. 2013년 1월에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에서 2000년 하계 올림픽 당시 획득한 동메달도 박탈한다고 발표했다.
그 후 미국 정부는 도핑으로 실력을 속이고 1998∼2004년 미국우편공사로부터 후원금을 받은 암스트롱에게 최대 1억2,000만달러(약 1,300억원)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각주[편집]
- Athletes for Hope
-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 현역 복귀 선언”. 노컷뉴스. 2008년 9월 10일. 2010년 1월 16일에 확인함.
- “암스트롱, 또 ‘인간승리 드라마’”. 세계일보. 2009년 7월 27일. 2010년 1월 16일에 확인함.
- 최인준 (2012년 6월 14일). “'사이클황제' 랜스 암스트롱, 또 다시 도핑 논란”. 조선일보. 2012년 11월 12일에 확인함.
- 박승혁 (2012년 9월 5일). “사이클선수 암스트롱 도핑 의혹 폭로한 책 출간”. 조선일보. 2012년 11월 13일에 확인함.
- 김은경 (2012년 8월 24일). “사이클 암스트롱 법정공방 포기..영구제명 수용”. 연합뉴스. 2012년 11월 13일에 확인함.
바깥 고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 (영어) 랜스 암스트롱 공식 웹사이트
- (영어) 랜스 암스트롱 재단
- (영어) LIVESTRONG.COM - 건강, 운동, 라이프스타일 제공 웹사이트
- (영어) 랜스 암스트롱 프로필(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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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개요[편집]
16세기 이후 서양에 영화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연극 배우나 희극 배우들의 연기를 실시간이 아닌 녹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영화는 무성영화로 이들의 대화 내용은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무성 영화 당시 유명한 영화배우로는 미국의 테다 바라(Theda Bara), 폴라 네그리(Pola Negri) 루돌프 발렌티노 등이 있었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연기력과 외모 외에도 미성을 가진 수많은 영화배우들의 존재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 대중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 장우진, 한국 최초의 여자 영화 배우는? 《씨네서울》 (2000.12.1)
|이 글은 영화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배우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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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벳 앤 시튼
|성녀 엘리사벳 앤 시튼|
|미망인, 설립자, 교육자|
|출생||1774년 8월 28일, 미국 뉴욕 시|
|선종||1821년 1월 4일 (46세), 미국 에미츠버그|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시복||1963년 3월 17일, 교황 요한 23세|
|시성||1975년 9월 14일, 교황 바오로 6세|
|축일||1월 4일|
약력[편집]
초창기[편집]
엘리사벳 앤 시튼은 1774년 8월 28일 뉴욕 시에서 사회적으로 유명한 부부였던 리처드 베일리와 캐서린 찰턴 부부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1] 베일리와 찰턴 부부의 집안은 뉴욕 지역 초창기의 식민지 정착민들이었다. 엘리사벳의 친가는 뉴욕 주 뉴로셸에 정착한 유명한 프랑스계 위그노 집안이었다. 엘리사벳의 아버지는 뉴욕 항만의 의사로 일하였으며, 어머니는 성공회 목사의 딸이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엘리사벳은 성공회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엘리사벳의 어머니 캐서린은 그녀의 나이 3세 때인 1777년에 사망하였다. 가장 막내딸이었던 캐서린이 그 다음해에 이른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출산의 후유증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리처드 베일리는 남은 두 딸에게 새 어머니를 만들어주기 위해 루스벨트 가문의 딸 샬로트 아멜리아 버클레이와 재혼하였다. 새 어머니가 된 샬로트 버클레이는 사회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결손가정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물품들을 나누어주곤 하였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어린 엘리사벳을 항상 동행시켰다.
리처드 베일리와 샬로트 버클레이 부부는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결혼생활의 갈등이 잦아지자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 엘리사벳과 그녀의 언니 메리 매그덜린은 이혼 과정에서 새 어머니에게 가려고 했으나, 거부를 당했다. 아버지 리처드 베일리는 의학 공부를 위해 런던으로 가면서, 자매는 삼촌인 윌리엄 베일리와 그의 아내 사라 펠 베일리 부부와 뉴로셸에서 잠시 동안 같이 살았다. 엘리사벳은 훗날 이 날을 회고하면서 어머니를 두 번씩이나 잃으면서 엘리사벳은 한동안 우울증을 앓았다고 고백하였다. 엘리사벳은 우울증을 치료하고자 자연과 시 그리고 음악(특히 피아노 연주)을 사랑하였다. 또한 그녀는 종종 명상에 빠져 종교적인 글귀나 그녀가 읽은 책 중에 마음에 드는 구절을 그대로 받아 적곤 하였다.
결혼과 자녀[편집]
윌리엄은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 제임스와 함께 1793년에 수출입 무역회사 윌리엄 시튼 회사를 창립하였다. 1788년 유럽을 방문한 그는 이탈리아의 명성 높은 상인 필리포 필리치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윌리엄과 엘리사벳 사이에는 다섯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첫째 안나 마리아(1795-1812), 둘째 윌리엄 리처드 (1798-1823), 셋째 캐서린(1800-1891), 다섯째 엘리자베스이다.[3]
엘리사벳은 비록 대가족을 부양하고 가정 일을 하느라 바빴지만, 자신의 부친과 계모가 가르쳐준 대로 도시 내 빈곤층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나타내었다. 그녀는 부녀자 몇 명을 이끌고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17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비공식적으로 ‘사랑의 여인들(Ladies of Charity)’이라고 불리었다.
사별과 회심[편집]
1802년까지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 제국의 대륙 봉쇄령의 여파와 수척에 달하는 회사 소유의 배들이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면서 시튼 회사는 파산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윌리엄은 병에 걸려 의료진의 권유에 따라 엘리사벳과 장녀 안나 마리아를 대동하고 따뜻한 기후의 이탈리아로 요양을 갔다. 레그혼에 항구에 내린 그들은 검역소에 억류되었으며, 결국 윌리엄은 1803년 12월 27일 억류 중에 사망하였다.[4] 엘리사벳과 그녀의 딸 안나 마리아는 죽은 남편의 이탈리아인 사업 파트너들의 가족이 인계하여 데려갔다. 엘리사벳은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미국으로 귀국한 그녀는 결국 가톨릭교회로 귀의하였으며, 1805년 3월 14일 당시 뉴욕 시에서 하나밖에 없는 가톨릭 성당이었던(반가톨릭 법이 겨우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철회되었음) 성 베드로 성당의 주임사제 매튜 오브라이언 신부로부터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아 정식으로 가톨릭 신자로 받아들여졌다. 1년 뒤에 그녀는 당시 미국의 유일한 가톨릭 주교였던 볼티모어 교구장 존 캐럴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다.
엘리사벳은 자신과 자기 자녀들의 생계를 위해 젊은 처자들을 위한 학원을 열었는데, 이는 당시 과부들의 사회적 지위로 봤을 때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부분의 부모가 자신들의 딸들의 학원 등록을 취소시켰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는 아직 반가톨릭 정서가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에 그녀는 우연히 성 술피시오회 공동체 총장으로서 프랑스 이민자 사회의 일원이었던 루이 기욤 발렌타인 뒤부르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성 술피시오회는 프랑스의 공포정치와 교회에 대한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으며, 미국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준비하던 중이었다. 뒤부르 신부는 미국에 오면서부터 오랫동안 미국 내 가톨릭 사회의 교육열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종교 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창립자[편집]
몇 년 간의 힘들고 어려운 노력 끝에 드디어 1809년 엘리사벳은 성 술피시오회원들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메릴랜드 주 에미츠버그로 이사하였다. 이사한지 1년 후에 엘리사벳은 가톨릭 신자인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성 요셉 학원과 미국 최초의 가톨릭 사립 무료 학교를 개설하였다. 이는 가톨릭교회로 회심한 부유한 재벌 사무엘 서덜랜드 쿠퍼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훗날 그는 존 두보이스 주교와 성 술피시오회에서 새로 설립한 마운트 세인트메리 대학교의 신학 교수가 되었다.
7월 31일 엘리사벳은 에미츠버그에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을 돕기 위한 교회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이 공동체는 미국에서 개설된 최초의 여성종교단체였다. 이 공동체는 처음에는 ‘성 요셉의 사랑의 자매회’라고 불렸으며, 나중에 사랑의 시튼 수녀회로 개명하였다. 이후 엘리사벳 앤 시튼은 ‘시튼 원장수녀’(Mother Seton)라고 불리게 되었다.
엘리사벳은 여생을 자신이 창설한 공동체를 이끌고 발전시키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교양 있는 여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당시 뉴욕 사회의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 소명과 자선 활동을 끝까지 밀고나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직면했던 가장 큰 난관은 내적인 문제에 있었다. 오해로 인하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두 딸과 다른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공동체 안의 여러 젊은 수녀들이 사망하면서 겪은 정신적 괴로움이 그것이었다. 엘리사벳은 1821년 1월 4일 46세의 나이에 결핵에 걸려 선종하였다. 임종 직전에 그녀는 공동체의 모든 회원들에게 “교회의 딸들이 되십시오.”라고 당부하였다. 엘리사벳의 시신은 나중에 성녀 엘리사벳 앤 시튼 국립 성당에 안치되었다.
시성[편집]
1959년 12월 18일 엘리사벳은 교황청 시성성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1963년 3월 17일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1975년 9월 1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됨으로써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미국 토박이로서는 최초로 성인이 되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인으로 시성되려면 순교하거나 최소한 그의 전구를 통해 두 번 이상의 기적이 일어나야 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고 있다. 교황청에는 엘리사벳 앤 시튼의 전구로 이루어진 세 가지 기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시성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판단을 내렸다. 첫 번째 사례는 암에 걸린 사랑의 시튼 수녀회의 거트루드 코젠도르퍼 수녀가 엘리사벳 앤 시튼 성녀의 전구를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례이다. 두 번째 사례는 안 테레사 오네일이 앓았던 급성 림프성 백혈병이 기적적으로 치유된 일, 세 번째 사례는 카를 칼린이 앓았던 뇌염이 치유된 일이다.[5][6]
그녀의 축일은 미국에 가톨릭 교구가 처음으로 설정된 1월 4일로 지정되었다.
미국 사회 내에서 엘리사벳 앤 시튼은 가톨릭 학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뉴욕에 있는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의 청동 정문에는 엘리사벳 앤 시튼의 얼굴이 부조로 새겨져 있으며, 그 밑에 ‘뉴욕의 딸(Daughter of New York)’이라는 영문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과거 그녀가 맨해튼에 있을 때 살았던 자택이 있던 자리에는 성모 마리아와 그녀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졌다.[7]
주석[편집]
- “Mother Seton”. 《Catholic Online》. 2009년 1월 6일. 2009년 1월 30일에 확인함.
- Emmitsburgh Area Historical Society
- Metz, Judith. 《Collected Writings》. Chicago: DePaul Society.
- New Advent Catholic Encycloepedia, Elizabeth Ann Seton: http://www.newadvent.org/cathen/13739a.htm
- “Emmitsburg Area Historical Society”. 《St. Elizabeth Ann Seton》. Emmitsburg Area Historical Society. 2010년 9월 14일.
- “The National Shrine of Saint Elizabeth Ann Seton”. 《The Seton Legacy》. The National Shrine of Saint Elizabeth Ann Seton. 2010년 9월 15일.
- Shrine of St. Elizabeth Ann Seton, Church of Our Lady of the Holy Rosary, New York,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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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물관(6-10월 개관)은 어떻게 모트 마들라인(Mot Madlain)의 산속 주민들이 어떻게 300년간 광석을 손으로 캐서 슈멜츠라(Schmelzra) 계곡에서 값진 은이나 납을 얻기 위해 녹였는지를 상세히 전시하고 있다. 각종 도구와 카트 등이 전시되어 있고, 과거에 광부와 농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또한 스위스에서 사냥되었던 곰에 대한 상설전시도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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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3T00:17:00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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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
|샬롯|
|생물 분류|
|학명|
|Allium oschaninii
O.Fedtsch
샬롯(shallot)은 부추속에 속한 식물 두 종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랑스 회색 셜롯은 보통 그리젤이라고도 하며 학명은 Allium oschanini이다.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서아시아 등지에서 야생으로 자라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참셜롯"이라 일컫는다. 다른 종은Allium cepa var. aggregatum (multiplier onions) 또는 A. ascalonicum라고 불리는 쪽파이다. [1]
세계 각지의 이름[편집]
세계 각지에서 셜롯을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다. 프랑스와 일본에서는 에샬럿(프랑스어: Échalote)이라 부르며, 중국에서는 중국어: 胡葱 호총[*], 중화민국에서는 중국어: 紅蔥頭 홍총두[*]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어: scalogno 스칼로뇨[*]라고 부른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프렌치 셜롯(French shallot)이라고 부르며, 스칼리온을 셜롯이라 부른다.
이름의 유래[편집]
양파와의 비교[편집]
경작과 쓰임새[편집]
북반구에서 셜롯은 2월이나 3월 이전에 파종할 수 없다. 셜롯은 갈라져 나온 조각(offset)에 의해 번식된다. 보통 북반구에서는 9월이나 10월에 파종한다. 재배 시에는 둥그스럼한 부분(bulb)의 상단 부분이 땅 위로 조금 나오게끔 기르다가, 뿌리가 제대로 자리잡았을 때는 둥그스럼한 부분을 둘러싼 흙을 치워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료를 막 뿌린 밭에서는 길러서는 안 된다. 7월이나 8월 경이 수확기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사시사철 수퍼마켓에서 셜롯을 볼 수 있다.) 가나 남동부에 셜롯 전문 재배 지역이 존재한다.
페르시아에서의 활용[편집]
페르시아에서는 셜롯을 موسیر (무-시르)라고 불렀다. 셜롯을 잘개 으깨 요구르트로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특히 이란인들은 케밥을 파는 식당인 케밥-사라스에서 이러한 요구르트를 즐겨 먹는다. 대부분의 셜롯은 야생으로 자라며, 사람들은 수확한 뒤 말려서 시장에 내다 판다. 셜롯을 사가는 사람은 순한 향을 내기 위해 며칠 셜롯을 (물에) 담가두었다가 끓인 후 사용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에서의 활용[편집]
인도네시아에서는 셜롯을 바왕 메라(인도네시아어: bawang merah)라고 부른다. 인도네시아 음식에 있어서, 마늘(바왕 푸티(인도네시아어: bawang putih))과 함께 기본적으로 많이 쓰이는 조미료이다. 날 셜롯은 순한 식초물 담가 오이와 함께 피클링 해 먹기도 한다. 종종 잘게 썰어 금갈색이 나도록 볶기도 하는데, 결과적으로 나오는 바삭한 셜롯 칩을 가리켜 바왕 고렝(인도네시아어: baawang goren)이라 한다. 오포르 아얌(닭 커리), 인도네시아식 볶음밥 등 여러 인도네시아 요리에 곁들여 나온다.
일본에서의 활용[편집]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에샤렛트"라는 것은 대부분은 생식용으로 연백재배(軟白栽培)되고 있는 락교(Allium bakeri)를 말한다. 도쿄 츠키지의 한 청과 도매업자가 Allium bakeri에 "에샤렛트"라고 하는 상품명을 붙여 팔았다. "뿌리 락교"라는 상품명으로는 잘 팔릴 것 같지 않자 "에샤렛트"라는 세련된 상품명을 붙였다고 한다."에샤렛트"가 상품화되었던 1955년 무렵은 아직 일본에서 진짜 셜롯이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그러나 이제 와서는 매우 혼동하기 쉽다.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것을 프랑스 요리에 사용되는 진짜 셜롯과 혼동 하고 있다. 같은 부추속의 동속 이종 식물이지만, 살럿과 락교는 외형도 맛도 다르다. 에샤렛트는, 시즈오카 현의 엔슈 지방에서 특히 많이 재배·소비되고 있다.
바깥 고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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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7T13:56:11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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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류는 꿩과의 새 가운데 일부를 부르는 말이다. 꿩류의 수컷은 몸집이 좀 더 크고 꼬리가 길며 색이 화려하다. 꿩류는 11개 속, 35종으로 분류된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종은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는 꿩(Phasianus colchicu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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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코이족(Khoikhoin)은 호텐토트(Hottentot)라고도 하며, 아프리카 남부에 사는 종족이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코이코이족은 나마족으로 나미비아에 살고 있다. 머리카락은 바싹 말려 있으며 눈에 속쌍꺼풀이 있어 눈이 기울어져 보인다. 언어에 독특한 혀 차는 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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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노산이란?
1. 단백질을 완전히 가수분해하면 암모니아와 유리 아미노산이 생성되는데, 아미노산은 모든 생명
현상을 관장하고 있는 단백질의 기본 구성단위이다.
단백질에서 분리된 아미노산은 대개 아미노기와 카르복시기가 같은 탄소원자에 결합하여 R-
CHNH2-COOH의 일반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α-아미노산이다.
(R는 지방족 ·방향족 ·헤테로 고리의 치환기를 나타낸다)
2. 처음 발견된 아미노산은 아스파라긴으로 1806년 프랑스의 과학자 보클 랭과 로비케가 아스파
라거스의 싹에서 새로운 결정을 분리시켜, 이것을 아스파라긴이라고 명명하였다.
단백질의 가수분해물에서 처음으로 아미노산을 분리시킨 사람은 브라코노이다.
그는 1820년 아교 ·고기 ·양털 등을 황산으로 분해하여, 아교로부터는 글리신을, 고기와 양털로
부터는 류신을 단리시켰다.
그 후, 1935년 W.C.로즈의 트레오닌 발견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에 걸쳐 22종의 주요 아미노
산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 자연계로부터는 펩티드와 특수한 단백질의 구성성분으로서 각종 아미노산이 발견됨으
로써 그 수는 약 80종 이상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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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노산
기본구조(이온형)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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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노산의 종류
1. 단백질을 구성하는 주요 아미노산은 글리신 ·알라닌 ·발린 ·류신 ·이소류신 ·트레오닌 ·세린 ·시스
테인 ·시스틴 ·메티오닌 ·아스파르트산 ·아스파라긴 ·글루탐산 ·디요드티로신 ·리신 ·아르기닌 ·히
스티딘 ·페닐알라닌 · 티로신 ·트립토판 ·프롤린 ·옥시프롤린의 22종이다.
이밖에 자연계에 존 재하는 비교적 중요한 아미노산으로는 β-알라닌 ·膨-아미노부티르산 · 오르
니틴 ·시트룰린 ·호모세린 ·트리요드티로신 ·티록신 ·디옥시페닐알 라닌이 있다.
2. 22종의 주요 아미노산 중 체내에서 합성이 안 되고 음식을 통해서 섭취 해야 하는 필수아미노산
은, 어른의 경우 발린 ·류신 ·이소류신 ·메티오 닌 ·트레오닌 ·리신 ·페닐알라닌 ·트립토판이고, 유
아는 여기에다 히스티딘이 필수이며, 기타는 비필수아미노산이다.
비필수아미노산은 아미노기전이효소(transaminase)에 의해서 체내에서 필수아미노산으로부
터 합성할 수 있으나, 글루타민 ·아스파라긴 ·알라닌 ·프롤린 등의 비필수 아미노산은 훨씬 용이
하게 아미노기전이반응이 일어나서 다른 비필수아미노산을 합성할 수 있다.
→ 류신(Leucine)
α-아미노이소카프론산이라고도 한다.
화학식 C6H13NO2.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으로, 유리 상태로 자연계에 널리 분포한다.
필수 아미노산 중 하나이다.
글루텐 ·카세인 ·케라틴 등의 가수분해물로부터 등전점침전법(等電點沈澱法) ·이온교환법에 의
해 이소류신과의 혼합물을 얻고, 2-브로모톨루엔-5-술폰산염이나 나프탈렌-2-술폰산염으로서
분리한다.
헤모글로빈과 같이 이소류신의 함량이 적은 원료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L-형은 광택이 있는 육방정계(六方晶系)이다. 녹는점 293 ∼295 ℃, 승화 145∼148 ℃.
D, L-형은 이소카프론산의 브롬화 ·아미노화나 이소바렐알데히드의 슈트레커 반응으로 합성된
다.
→ 리신, 라이신(Lysine)
화학식은 H2N(CH2)4(NH2)COOH이다.
분해온도는 224.5 ℃로 물에는 잘 녹고 알코올 ·에테르에는 잘 녹지 않는다.
L-리신은 거의 모든 단백질에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히스톤 ·알부민 ·근육단백질 등에 많다.
사람에서는 필수아미노산으로 체내에서는 합성되지 않는다.
미생물에서는 아스파라긴산으로부터, 효모에서는 아세틸 CoA(조효소)와 α-케토 글루타르산으
로부터 합성된다.
동물성 단백질에 많이 존재하고 식물성 단백질에는 그 함유량이 적다.
따라서, 곡물 섭취량이 많은 동양인에게 부족하기 쉬운 아미노산이다.
그러므로 빵의 원료가 되는 밀가루에 강 화하여 영양가의 향상을 높이고 있는 나라도 있다.
또, 리신의 말단기인 아미노기는 당과 반응하기 쉬워 식품을 갈색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식품
의 가공에도 이용된다.
그러나 리신이 다른 화합물과 결합하면 영양상 효과가 없어지기 때문에 비유효성 리신이라고도
한다.
→ 메티오닌(Methionine)
화학식 C6H11NO2S. 분자량 149.21, 녹는점 283℃이다.
화학명은 α- 아미노-膨-메틸티올-n-부티르산이며, Met.로 약기한다.
대부분의 단백 질속에 함유되어 있으며, 사람의 필수아미노산 중의 하나이다.
조미료인 간장에는 유리상태로 함유되어 있다.
1921년 J.H.뮐러가 연쇄상구균에 대한 한 성장인자로서 고기의 추출액 및 카세인의 가수분해물
에서 발견하였다. 1928년 프로피온알데히드로부터 합성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 구조가 확정
되어, 메티오닌이라고 명명되었다.
천연으로 존재하는 L-메티오닌은 광택이 있는 인편상결정(鱗片狀結晶)으로, 수용액 속에서는
좌회전성, 산성 용액 속에서는 우회전성을 보인다.
물에 잘 녹지 않는 점 등의 성질은 류신과 흡사하며, 류신과 혼정(混晶)을 만든다.
L-메티오닌은 영양상 필수이며, 합성품인 D-메티오닌도 유효하다.
생체내에서 메틸기전이반응에 관여하는 중요한 아미노산으로, 먼저 ATP와 반응하여 δ-아데노
실메티오닌이 되고, 이것이 각종 수용체에 메틸기를 준 다음 호모시스틴 ·시스타티오닌을 거쳐
시스틴이 된다. 붉은 빵곰팡이는 시스틴에서 메티오닌을 합성한다.
간장이나 치즈 등 발효식품의 향기는 메티오닌에서 유도된 알데히드 ·알코올 ·에스테르 등에 의
한 것이 많다.
성인의 1일 L-메티오닌 필요량은 2.2g이며, 지방과 친화성을 가진다. 의약품으로서 사용되는데
간질환이나 각종 중독증에 내복되며, 주사제로는 용해도가 큰 아세틸메티오닌이 주로 사용된다.
→ 발린(Valine)
α-아미노이소발레르산에 해당한다.
화학식(CH3)2CHCH(NH2)COOH, 녹는점315 ℃이다.
필수 아미노산의 하나이다.
단백질에 들어 있는 양은 비교적 적으나, 아마인(亞麻仁)의 단백질 중에는 약 12.7 % 함유되어
있다. 콩나물에는 유리상태로 존재한다.
류신과 그 성질이 유사하기 때문에 단백질 가수분해물 중에서 순수하게 분리하기가 비교적 곤란
한 아미노산의 일종으로, 여러가지 합성법이 있다.
D-발린은 아주 달고, L-발린는 단맛 이외에 쓴맛이 들어 있다.
천연의 L-발린은 무색 판상의 결정이다. 수용액 중에서 우광회전성을 나타낸다.
→ 세린(Serine)
화학식HOCH2CH(NH2)COOH, 분자량 105, 녹는점 228℃이다.
물에는 녹지만, 알코올 ·에테르에는 녹지 않는다.
천연으로 산출되는 L-세린은 무색의 침상 또는 능주상(稜柱狀) 결정으로 분해된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하나로 대부분의 단백질 속에 존재하며, 명주[絹] 의 단백질인 세
리신에 특히 많다. 젖에 함유되어 있는 단백질인 카세인 속에는 인산에스테르의 형태로 존재한
다.
1865년 E.크래머가 세리신에서 순수 분리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그 구조는 1902년 E.피셔와 H.로이크스가 합성하여 결정하였다.
고등동물에서는 비필수아미노산이다.
생체 내에서는 글리신과 함께 대사계의 매체적 역할을 하며, 시스틴과 메티오닌의 상호변환에
관여하고 있다.
D-세린은 누에의 혈액 등에 존재한다.
→ 시스테인(Cysteine)
메르캅토기(술포히드릴기) -SH를 가진 불안정한 화합물로, 공기 중의 산소에 의해 쉽게 산화
되어 시스틴이 된다.
물과 에탄올에 녹고 중성 ·알칼리성 용액에서는 불안정하다.
대부분의 단백질과 환원형 글루타티온 속에 함유되어 있다.
생체 내에서는 메티오닌의 탈메틸 생성물인 호모시스테인과 세린 사이의 티올 이전반응(移轉反
應)에 의하여 중간체인 시스타티오닌을 거쳐 합성된다.
시스테인디술프히드라아제가 그것의 혐기적 대사(嫌氣的代謝)에 관여 하고 있다.
시스테인은 타우린이나 조효소 A(Co A)의 구성성분인 β-메르캅토에틸아민의 모체물질이다.
또, 단백질 분자 속에서 곁사슬의 - SH기는 구조나 생리기능의 발현에 관여한다.
→ 시스틴(Cystine)
화학식 C6H12N204S2.
최초로 발견된 아미노산으로 1810년 영국의 물리학자 W.H. 월래스턴이 대사기능 장애환자의
요결석(尿結石)에서 결정으로 추출하였다.
천연으로는 모두 L형으로 존재하며, 정육각의 판상 (板狀) 결정으로 광학활성을 가진다.
물에는 잘 녹지 않고 약산성과 약알칼리에는 녹는다.
머리털 ·뿔 등의 단백질의 성분이며, 특히 케라틴에는 10% 이상 함유되어 있다.
산가수분해액에 침전되어 직접 분리시킬 수 있다. 각종 환원시약으로 쉽게 환원되어 시스테인이
된다.
고등식물 ·효모에는 NADH(니코틴산아 미드아데닌디뉴클레오티드인산)에 의해 시스틴이 시스
테인으로 되는 환원계가 존재한다.
단백질의 구조해석이 진척됨에 따라 폴리펩티드 사슬의 고차구조의 결정과 효소, 또 호르몬 활
성에 시스틴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 아르기닌(Arginine)
화학식 C6H14N4O2. 염기성 아미노산이다. 분자량 174.21이며, 물에 녹는다.
E.슐체와 E.스타이거에 의하여 백화시킨 루피누스(콩의 일종)의 싹튼 것으로부터 단리되었다.
L-아르기닌은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하나로 존재하는데, 어류의 정자에 존재하는 단백
질 프로타민에 속한다. 청어 ·연어 등에서는 구성 아미노산의 약 70 %가 아르기닌이다. 식물 종
자 속에는 유리상태로도 존재한다.
아르기닌 잔기(殘 基)는 그 구아니디노기(基)로 인해 강염기성을 나타낸다. 알칼리성으로 α-나
프톨과 하이포아염소산을 작용시키면 특유한 빨간색을 띠므로 정량 할 수 있다.
생체 내의 대사경로로서는 H.A.크레브스 등이 발견한 오르니틴회로[尿 素回路]의 구성성분이
며, 아르기나아제의 작용에 의하여 요소와 오르니틴으로 분해된다.
시트룰린과 아스파라긴산으로부터 생성된다.
성인에게는 비필수아미노산이지만 유아에게는 필수아미노산이다.
암모니아나 대량의 아미노산의 독작용(毒作用)에 대하여 보호하는 작용이 있다. 뇌에는 아르기
나아제가 존재하며, 膨-구아니디노부티르산의 전구체인 아르기닌의 양을 조절하고 있다.
무척추동물에서는 아르기닌인산의 형태로 포스파겐으로서 근육의 수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외에, 특이한 구아니딘염기(마그마틴 ·옥토핀)의 전구체로서 널리 존재한다.
→ 아스파라긴(Asparagine)
아스파라긴산아미드라고도 한다. 화학식 C4H8O3N2, 분자량 132.12, 녹는점 227℃이다. L-
아스파라긴의 1수화물로서 존재한다.
1806년 프랑스의 L.N.보클랭과 P.J.로비케가 아스파라거스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아스파라긴이
라는 이름이 붙었다.
콩나물에서 분리 조제하거나 L-아스파르트산-β-에틸에스테르에 암모니아를 작용시켜 합성한다.
아미노산의 하나로서 글루타민과 함께 식물 ·미생물 ·동물세포 속에 널리 존재한다. 또, 유리 상
태로 고등식물에 축적되며, 동물세포 속에도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비필수아미노산이며, 생체 내에서는 L-아스파르트산에서 아스파르트나아제의 작용
에 의해서 합성된다.
대사경로는 아스파르트산으로 돌아가든지, 아미노기가 떨어져나가 옥살아세트산이 되어 TCA회
로로 들어간다.
무색의 사방결정(斜方結晶)으로, 물에 잘 녹지 않으나, 뜨거운 물에는 녹는다. 알코올 ·에테르 ·
벤젠에는 녹지 않고, 산 ·알칼리에는 녹는다.
D형은 천연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단맛이 난다. 말레인산무수물과 암모니아를 가열하면 D, L 혼
합체인 라세미체를 만들 수가 있다.
→ 아스파르트산(Aspartic acid)
아스파라긴산 또는 아미노호박(琥珀)이라고도 한다.
1927년 프리슨에 의해 아스파라긴을 수산화납과 가열하여 생기는 산으로서 발견되었다.
화학식 C4H7O4N, 분자량 133.10, 녹는점 271 ℃. L-, D-형 2종의 이 성질체가 있다.
L-아스파르트산은 단백질의 구성성분 및 유리상태로 동 식물계에 널리 존재한다.
사방정계(斜方晶系)에 속하는 무색의 판상 결정으로, 물과 알코올에는 녹지 않고 산 ·알칼리에는
녹는다.
사람에게는 비필수아미노산이지만 TCA회로와 오르니틴회로 양쪽 대사과정에 관여하는 중요한
아미노산이다.
TCA회로에서는 옥살아세트산 또는 푸마르산을 거쳐 연결된다. 특히 옥살아세트산과 아스파르
트산의 아미노기 전이반응에 의한 상호전환은 많은 세포 속에서 중요한 대사경로를 차지하고 있
다. 이 과정에서는 비오틴을 필요로 한다. 오르니틴회로에서는 알기닌의 생성에 관여하고 있다.
이 밖에 퓨린 ·피리미딘 ·조 효조 A(Co A)의 전구물질이 되고, 알라닌의 생합성과 미생물에서 리
신 ·트레오닌 ·메티오닌의 생합성에도 관여한다. D형은 소나무에 유리산으로 존재한다.
→ 알라닌(Alanine)
α-알라닌과 β-알라닌의 두 종류가 있다.
α-알라닌은 α-아미노프로피온 산이라고도 한다. 화학식 CH3CH(NH2)COOH, 분자량 89.10
이다. 천연으로 발견되기 전에 1850년 스트레커가 아세토알데히드로부터 합성하여 aldehyde
의 처음 두자를 따서 명명하였다.
L형은 단백질 속에 들어 있으며, 특히 명주의 피브로인 속에는 전체 아미노산의 27%를 차지한
다. 자주개자리속(屬)에 유리 상태로 존재한다.
녹는점은 L형이 297℃, D형이 293℃로 모두 분해된다.
알라닌의 구조이성질체인 β-알라닌은 β-아미노프로피온산이라고도 하며, 화학식
NH2CH2CH2COOH, 분자량은 89.10, 녹는점 200℃이다. 판토텐산 ·카르노신 ·안세린 등의
구성아미노산으로 존재하는 외에, 콩과식물의 뿌리혹 또는 개 ·돼지 ·소 등의 대뇌 속에 유리 상
태로 존재하며, 생물학상 중요한 아미노산이다.
대사경로는 글루탐산 생성에 관여하고, 피루 브산을 거쳐 TCA회로로 통한다. D, L형은 α-브롬
프로피온산과 암모니아반응에 의해 합성되지만, L형은 명주피브로인의 가수분해물로부터 분리
시켜 제조한다.
→ 오르니틴(Ornithine)
L-오르니틴은 유리상이며 식물 ·동물 ·미생물 중에서 널리 발견된다.
단백질 성분인 아미노산으로서는 찾아볼 수 없고, 티로시딘 ·그라미시딘 등의 항생 펩티드 중에
존재한다.
고등동물의 생체 내 대사에서는 오르니틴회로의 하나로서 아미노기 또는 암모니아로부터 요소
를 생성하여 체외로 배출하는 경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아르기닌으로부터 아르기나아제의 작용으로 요소와 오르니틴이 생성되고, 오르니틴은 암모
니아나 아미노기를 받아들여 시트룰린을 거쳐 아르기닌을 재생한다.
무척추동물 ·식물 ·미생물에서는 오르니틴회로가 존재하지 않지만 오르니틴은 글루탐산에서 아
르기닌을 합성할 때의 중간체라고 생각된다.
미생물에서는 인지질 중에 에스테르의 형태로 오르니틴이 존재한다.
D-오 르니틴은 그라미시딘 ·바시트라신 등의 항생 펩티드 중에 존재한다. L- 오르니틴은 아르기
닌을 알칼리 또는 아르기나아제로 분해하면 생성되며, 백색결정으로 물에 녹기 쉽고, 녹는점은
140 ℃이다. 에테르에는 잘 녹지 않는다.
→ 이소류신(Isoleucine)
화학식 C6H13NO2. 1904년 P.에를리히가 당밀에서 로이신의 이성질체 (異性質體)인 아미노
산을 발견하여 명명하였다.
L-이소류신은 분자 내 에 2개의 비대칭 탄소원자가 있으므로 2개의 라세미체가 존재한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필수아미노산의 하나로, 펩티드 호르몬인 옥시토신과 펩티드 항생물질인 파
시트라신에 존재한다.
D-이소류신은 단백질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외의 입체이성질체로 L- 및 D-알로이소류신이 있다.
→ 트레오닌(Threonine)
D-트레오스와의 관계에서 트레오닌이라고 명명되었다. 1935년 W.C.로즈가 피브린의 산가수
분해물로부터 분리하였다.
4가지 이성질체가 있는 데, 그 중에서 L형은 단백질 구성성분인 아미노산의 하나이며, 단백질
속에 인산에스테르의 형태로도 존재한다.
필수아미노산의 하나이다.
대사는 아스파르트산으로부터 호모세린을 거쳐 합성되고 글리신과 아세트알데히드, 젖산으로
분해된다.
우유 ·고기 ·달걀 등 동물성 단백질에는 많이 함유되어 있지만, 식물성 단백질에는 함유량이 적
다.
→ 티로신(Tyrosine)
광택이 있는 미소한 바늘 모양의 결정으로, 분자량 181.19, 녹는점 314 ∼318℃이다.
비필수아미노산이며, 물에는 잘 녹지 않는다.
단백질의 크산토프로테인반응(황색) ·미론반응(적색) 등은 티로신에 의한 것이 며, 이들 반응에
의해서 검출 ·정량된다.
대부분의 단백질에 함유되어 있지만, 특히 카세인 ·견사(絹絲) 피브로인에 많으며, 이들의 가수
분해 ·소화 ·부패에 의한 분해에 의해서 생긴다. 오래된 치즈에도 함유되어 있고, 또 유리 상태로
도 발견된다.
1846년 리비히가 카세인의 알칼리 분해물 속에서 발견하였고, 에를렌마 이어가 합성에 성공하
여 구조를 밝혔다.
디- 및 모노-요오드티로신은 갑상선호르몬의 주체인 티록신과 함께 갑상선에 존재한다. 요오드
티로신은 각종 해초(海草) 및 해면에도 존재한다.
티로신은 페닐알라닌의 효소적 히드록시화에 의해서 생체내에서 생성된다.
티로신의 산화적 분 해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 푸마르산 및 아세토아세트산으로 분해
하는 경로이고, 또 하나는 티로시나아제에 의해서 3, 4-디옥시페닐 알라닌이 되고, 다시 변화를
받아 멜라닌 ·부신수질 호르몬 ·아드레날린 을 생성하는 경로이다.
티로신의 대사 연구에는 선천성 대사이상이 크 게 도움이 되고 있다. 이들에게는 아르캅톤뇨증
(尿症)이나 페닐케톤뇨 증 또는 색소결핍증 등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대사경로의 일부가 결여되
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 글루타민(Glutamine)
1883년 E.슐체와 E.보스하르트가 사탕무의 즙액에서 발견하였다.
분자식은 C6O3H10N2, 녹는점 184∼185 ℃의 바늘 모양의 결정이다.
식물의 발아종자(호박 ·해바라기 등) 내에 축적된다.
포유류 혈액 속의 아미노산의 주성분으로, 동식물의 단백질 속에 존재한다.
사탕무의 즙에서 분리시키거나 또는 L-글루탐산-膨-히드라지드의 접촉환원에 의해서 생기며, 단
백질의 가수분해로는 생기지 않는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산의 하나로, 생체 내에서는 암모니아의 저 장역할을 한다.
또, 핵산의 퓨린 핵 생성에 관여하고, 페닐아세트산과 결합하여 해독한다. 신장이나 기타 조직
내에서 글루탐산과 암모니아로부터 합성된다.
→ 글루탐산(Glutamic acid)
α-아미노글루타르산이라고도 한다. 단백질의 구성 아미노산으로서 가 장 널리 존재한다. 특히
밀의 글리아딘 속에는 40% 이상 들어 있다.
1908년 이케다 기쿠나에[池田菊苗]는 미역의 맛성분이 L-글루탐산임 을 발견하였다.
콩·밀 등의 가수분해 또는 미생물을 이용하는 발효법에 의해 합성되어 왔으나, 지금은 석유화학
공업에서 다량으로 공급되는 아크릴로니트릴 을 원료로 하여 합성한다.
→ 글리신(Glycine)
글리코콜(glycocoll) 또는 아미노아세트산이라고도 한다.
시성식 NH2 CH2 COOH. 단백질의 가수분해물에서 최초로 추출된 비필수아미노산이다.
무색의 주상결정으로, 232∼236℃에서 거품을 내며 분해된다.
물에는 녹으나, 알코올 ·에테르 등의 유기용매에는 거의 녹지 않는다.
아미노산 중에서 비대칭 탄소원자를 가지지 않는 유일한 것으로, 광학이 성질체는 없다.
1820년 H.브라코노(1780∼1855)가 처음으로 콜라겐 (col1agen)에서 추출했으며, 감미가
있어 글리코콜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식물성 단백질에는 거의 함유되어 있지 않으나, 동물성 단백질에는 다량으로 함유되
어 있다.
예를 들면, 견사(絹絲) 피브로인에는 40.7%, 젤라틴에는 25.5%가 함유되어 있다.
또, 옥시토신이나 바소 프레신 등의 호르몬, 글루타티온 등 단백질의 각 구성성분이기도 하다.
동물체 내에서는 세린과의 상호전환 반응에 의해 합성되며, 글리옥실산 에 글루탐산 또는 글루
타민이 아미노기 공급원이 되어 글루신을 생성한다.
또, 생체내 대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핵산의 염기성분인 퓨린, 에너지 대사에 관여하는
크레아틴을 비롯하여 혈색소 ·엽록소 ·비타민 B12의 포르피린 합성 등에도 관여한다.
또, 생체 내에서 생긴 유독 한 벤조산과 결합하여 마뇨산(馬尿酸:히푸르산)을 만들어 해독작용
을 한다.
모노클로르아세트산에 암모니아를 반응시키거나 또는 견(絹) 또는 아교를 묽은 염산과 끓여 가
수분해해서 얻는다.
중성 수용액 속에서는 대부 분 +NHCH2COO- 의 형태로 존재한다.
결정형은 α, β, 膨의 3종이 알려져 있다. o-푸탈알데히드에 의해 빛깔을 띠며, 미량이 검출된다.
또, 구리(II)나 금을 함유하는 용액에 글리신을 가하면 빛깔을 띠므로, 구리나 금의 검출시약으
로 쓰인다. 이 경우 구리(II)는 청색, 금은 보라색으로 각각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옥시페닐글리신을 글리신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백색분말이며, 사진용 현상주약(現像
主藥:글리신 현상액)으로서 알려져 있다.
→ 히스티딘(Histidine)
화학식 C6H9N3O2. 여러 가지 단백질 속에 함유되어 있는데, 가장 많 이 포함한 것으로는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으로 약 11% 함유한다.
소의 혈액 속에 함유되는 헤모글로빈의 염산 가수분해에 의하여 얻는다.
쥐 에서는 필수아미노산이지만, 성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이것이 부패 ·발효하여 탄산이탈이 일어나면 유독한 히스타민이 된다.
→ 페닐알라닌(Phenylalanine)
화학식 C9H11NO2. L-페닐알라닌은 여러 가지 단백질 속에 약 2∼5% 함유되어 있다.
콩과식물의 종자나 어린 눈 속에 유리 상태로 존재하는 데, 단백질로부터의 분리는 어렵다.
냉수나 알코올에 잘 녹지 않으며, 짙은 알칼리에 의하여 라세미화한다.
생체 내에서는 분해하여 비가역적 으로 히드록시화되어 티로신이 되고 그후에는 티로신의 대사
경로를 거 치는데, 이것은 L계뿐만 아니고 D계도 유효하다.
D-페닐알라닌은 그라 미시딘 S나 티로시딘 등 폴리펩티드성 항생물질의 구성 아미노산인데 단
백질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프롤린(Proline)
화학식 C5H9NO2. 피롤리딘-2-카르복실산 구조를 가진다.
1901년 E. 피셔가 카제인의 가수분해 도중에 처음 분리하여 프롤린이라고 명명했으며, DL-프
롤린은 1899년 R.빌슈테터가 합성에 성공하였다.
L-프롤린 은 프롤라민 ·프로타민 ·카제인 ·젤라틴 등 여러 단백질에 함유되어 있는데, 특히 콜라
겐 및 그 변성물인 젤라틴에 많으며 잔기수(殘基數)도 10∼12%에 이른다.
감미가 있는 무색 결정으로, 에탄올에 녹는 유일한 아미노산이다. 물에 대한 용해도는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 중에서 최대이다.
닌히드린과 반응하여 황색으로 발색한다. 아질산과 반응하여 니트로소 화합물을 만들며, 질소를
발생하지 않는다.
가결(可缺) 아미노산이며, 생체 내에서는 글루탐산으로부터 만들어진다. 프롤린옥시다아제에 의
해서 피롤린카르복시산이 되며, 이것이 글루탐산으로 돌아온다.
또, 식물 속에서는 피롤린을 거쳐 알칼로이드의 아트로핀이나 니코틴이 된다. 프롤린 자체에는
맛이 있는데 프롤린과 당을 가열하면 아미노카르보닐반 응이 일어나, 좋은 향기가 나며 갈색으
로 착색된다. 이 반응을 이용하여 빵 제조에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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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노산의 특성
1. 일반적으로 아미노산은 백색 결정으로 비교적 안정된 물질이며, 녹는점이 높으나 분해가 수반되
어 명확한 녹는점을 알기는 어렵다.
시스테인 · 티로신은 물에 잘 녹지 않으나, 프롤린 ·히드록시프롤린은 물에 아주 잘 녹지만 알코
올에는 잘 녹지 않는다.
그 이외의 것은 일반적으로 물에 잘 녹는다.
녹는점이 명확하지 않은점과 극성용매(極性溶媒)에 대해서 보이는 아미노산의 난용성은 아미노
산이 양쪽성 이온이라는 증거이다.
아미노산은 알칼리를 첨가하면 수소이온을 잃고, 산을 첨가하면 수소이온을 포착한다.
2. 아미노산의 수용액은 pH의 변화에 저항하는 완충작용을 가진다.
아미노산은 카르복시기와 아미노기에 특유한 모든 반응 외에, 각 분자 내에 있는 반응기에 특유
한 반응을 보인다.
닌히드린반응은 전자의 가장 중요한 발색반응이다.
후자의 특정한 아미노산의 발색반응으로는 분석수단으로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에 밀론
반응(티로신) ·사카구치반응(아르기닌) ·니트로프루시드시험(시스테인) ·에를리히반응(트립토
판) ·파울리반응(히스티딘 ·티로신)이 있다.
3. 아미노산의 일반적 반응으로는 아질산 ·닌히드린 ·과산화수소 ·글리세린 과 작용하여 각각 옥시
산 ·알데히드 ·케토산 ·아민을 생성한다. 또, 아미노산은 환원제의 작용을 잘 받지 않으나, 그 에
스테르는 나트륨아말감이나 수소로 쉽사리 환원되어 상응하는 알데히드나 알코올이 된다.
아미노산은 최근에는 비타민과 함께 영양제 ·조미료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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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노산의 영양
1. 단백질이 충분히 높은 영양가를 가지기 위해서는 필수아미노산 상호간의 비율이 일정한 범위 내
에 있어야 한다.
만일 단 하나라도 필요량보다 적으면 다른 필수아미노산이 충분해도 그 적은 아미노산 때문에
영양가가 억제되고 만다. 이와 같은 아미노산을 제한아미노산이라고 한다.
2. 달걀 ·고기 ·생선 등 동물의 단백질은 필수아미노산을 충분히 함유 하고 있으므로 질이 좋은 단백
질이라고 하지만, 곡류 등의 단백질은 식물성 단백질이며, 리신 ·트레오닌 ·트립토판 등 필수아미
노산이 부족하므로 영양가가 떨어진다.
3. 이 때 부족한 아미노산, 즉 제한아미노산을 보충해 주면 영양가가 높아지는데, 이러한 효과를 아
미노산의 보충효과라고 한다.
예를 들면, 쌀 ·밀에는 리신 ·트레오닌, 콩에는 메티오닌이 각 각 보충효과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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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노산의 식품가공
1. 아미노산은 각각 특징이 있는 맛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글루탐산이 가장 맛이 있어, 그
나트륨염은 화학조미료로 사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맛이 있는 것이나 단맛이 나는 것도 있으나, 제조원가가 비싸기 때문에 이용되지 못하
다가 합성법과 발효법의 발달에 따라 식품으로 이용될 소지가 많아졌다.
2. 예를 들면, 아스파르트산이나 글리신은 현재 합성주에 배합되고 있어 술맛을 돋우어 준다.
한편, 아미노산을 당과 가열하면 착색됨과 동시에 특이한 향기를 발생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식
품의 향기개량에 이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삼가루로 과자를 만들 때 발린이나 페닐알라닌을 첨가하면 향기로운 과자가 되고, 또
빵을 만들 때 프롤린을 첨가하면 향기로운 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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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4T07:11:01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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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쯤 있으면 아폴로 11호가 처음 달에 간 날이 된다. 그동안 달착륙이 조작이라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날을 기념해서 이에 대한 반박글을 쓸까 하다가, 그냥 이 글을 쓰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음....
대다수는 별로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지만, 몇몇은 정말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일부는 나사에서 조작한 데이터를 발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특히 이해하기 힘든 것 하나는 다른 날 찍은 같은 장소의 사진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료를 좀 찾아봐야 할 듯싶다.
정말 재미있게 봤다.
하지만 이 다큐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달에 간 우주선은 지구에서 쏜 빛을 그대로 지구쪽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삼각거울'이란 것을 달에 놓고 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삼각거울을 이용해서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1 inch (2.54 cm) 오차 이내에서 측정할 수 있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전역에서 계속해서 측정하고 있다. 그 결과 달이 매년 3.8cm 정도씩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또, 아폴로 우주선의 당시 동영상을 보면 우주인의 행동도 지구에서와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달의 중력이 지구 중력의 1/6밖에 안 돼서 물건들이 천천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영상을 빠르게/느리게 돌린다고 해서 비슷하게 만들 수 없다. 그들이 조작을 입증하기 위해 만든 영상도 살펴보면 당시 방송됐던 것과는 좀 다르다.
대기가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도 분명히 보인다. 우주인이 다닐 때 먼지가 나지 않는 현상은 이상한 현상이라기보다 오히려 대기가 없어서 작은 먼지도 단순한 포물선 운동을 하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사진에 대한 의혹은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다. "너희들, 사진 찍어봤냐?"
어떻게 그렇게 잘 나온 사진이 많냐는 주장에 나사가 승복해서 잘못 찍은 사진 수천 장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제는 달의 상공 50 km에서 선회하는 인공위성이 있어서 50 cm 분해능의 사진으로 전역을 촬영하고 있다. 그 사진을 보면 당시 착륙선이나 이동경로 같은 것도 그대로 드러나는 세상이 됐다. (예)
더이상 달음모론 갖고 돈벌이하려고 하지 마라.
그냥 재미는 재미일 뿐이다.
그냥 재미는 재미일 뿐이다.
글 쓴 날 : 2006.05.16
추가 : 삼각거울
삼각거울 (corner cube retroreflector arrays)
삼각거울은 온 빛을 정확히 반대로 되돌려보내는 거울이다. 빛이 거울 축과 완전히 평행하게 들어올 필요는 없다.
거울 사진 출처 : NASA
나사에 올라와 있는, 달에 설치된 삼각거울 사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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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과학[편집]
과학의 경우 어둠은 주위에 비해 빛의 양이 최소인 상태를 말한다. 어둠에서는 극히 빛을 조금밖에 반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어둡게 보인다. 이를테면 윤기가 없는 흑색 페인트는 검게 보이지만 흰색 페인트는 모든 가시광선을 반사하기 때문에 밝게 보인다. 자세한 것은 색을 참조하라.
그러나 가시광선과 같은 에너지는 끝없이 흡수되지는 않는다. 가시광선을 흡수하는 많은 물질은 적외선을 반사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눈에는 어둡게 느껴져도 실제로는 빛을 반사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열역학을 참조하라.
빛의 과학적인 정의에서는 가시광선 이외의 전자 스펙트럼도 포함하기 때문에 완전한 어둠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모든 물건은 적외선의 형태로 빛과 열을 방출하며, 감마선은 밀도가 높은 물체조차 통과해 버리기 때문이다.
미술[편집]
- 빨강: 0에서 255까지
- 초록: 0에서 255까지
- 파랑: 0에서 255까지
빛의 부재가 어둠을 만들어 내므로 어두운 색은 (0,0,0)에 가까워진다.
사상[편집]
저작[편집]
공상 작품이나 SF 등의 창작물의 경우에도, 어둠은 마녀나 악마, 흡혈귀와 같은 악역과 연결시키는 것이 많다. 그러나 최근의 애니메이션, 만화 작품의 경우 그 고정 개념을 깨서 어둠의 힘을 사용해 악한 자들과 싸우는 정의의 영웅(다크 히어로)도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히어로의 존재와 동시에, 성스러운 빛의 힘을 악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악역도 많아지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이 글은 물리학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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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족
|인구||900만 명|
|거점||중국|
|지역1||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2||아프가니스탄|
|지역3||키르키즈스탄|
|지역4||우즈베키스탄|
|언어||위구르어|
|현지어||ئۇيغۇر 维吾尔 Wéiwú'ěr|
|종교||수니파 이슬람
수피파 이슬람
|관련민족||터키족|
위구르족(위구르어: ئۇيغۇر, 중국어 간체: 维吾尔, 정체: 維吾爾, 병음: Wéiwú'ěr, 터키어: Uygurlar, 영어: Uyghur people)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으로 현재 중국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민족이다. 스스로는 동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744년, 위구르족은 바스밀(Basmil), 카를룩(Qarluq) 등의 부족과 함께 후돌궐 제국을 멸망시키고 외튀켄(Ötüken)산에서 위구르 제국을 세운다.
중국뿐 아니라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몽골, 우즈베키스탄, 독일, 터키, 러시아 등에도 흩어져 살고 있다. 중국에서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뿐만 아니라 후난성 창더 시의 타오위안 현(중국어: 桃源县)에도 살고 있으며,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주요 도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작기는 하지만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와 워싱턴 D.C.에도 위구르족 공동체가 있으며, 캐나다의 토론토와 밴쿠버에도 살고 있다.
외모는 다양해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들과 유사한 경우도 있지만, 유럽인처럼 피부가 흰 위구르인들도 있다.
목차
역사[편집]
오르혼 제국 이전[편집]
위구르족의 조상은 유목 가오처(高車, 고거)족이다. 타림분지에 살았던 토카라(Tocharians, 月氏)족 역시 위구르의 조상에 포함된다고 보기도 한다. 가오체의 이름은 천막을 옮기기 위한 소가 끄는 수레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들은 바이칼호 남쪽 협곡과 예니세이 강 일대에 사는 알타이계의 유목민족이었다. 이들은 약간의 농업과 예니세이강 유역의 풍부한 철광석을 바탕으로 금속문화를 발달시켰다. 이후 흉노에 복속되어 무기를 제공하였으며 이후 유연과 에프탈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450년 가오체는 유연에 반란을 계획하였으나 유연 지배하의 투르크족에 패배한다. 이 사건은 돌궐제국을 오래 괴롭힌 역사적인 투르크와 퇼레스(鐵勒, 철륵)간 원한의 시작이었다. 돌궐이 유연/에프탈을 패배시켰을때, 그들은 퇼레스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다.(이 시기에 고거족의 이름은 퇼레스로 바뀐다.) 이 시기에 위구르는 처음으로 중국의 사서에 바이칼 남쪽 지역의 10,000호의 작은 부족으로 기록된다.
퇼레스 부족연맹이 와해되자, 위구르는 중국의 수나라와 연합한 설연타(薛延陀) 연합에 참여하며, 타르두한을 꺾고 독립을 쟁취한다. 이 연합은 603년부터 당 태종이 돌궐제국에 결정적 타격을 준 630년까지 그 자치의 정도를 달리 하며 존재했다. 이 시기에 위구르는 연합 내에서 설연타 다음의 지위를 점유하였다. 전돌궐과 후돌궐의 사이 공백기인 630년에서 683년 사이 위구르는 설연타를 무너뜨리고 부고(僕固), 동라(同羅), 바이르쿠(拔野古) 등 다섯 부족들과 함께 위구르 연합을 구성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중국 측천무후의 재위기간에 후돌궐이 세워지고, 위구르는 다른 유목 터키계 부족들과 함께 후돌궐 제국에 참여한다. 후돌궐 제국은 734년 빌케가한(毗伽可汗)의 사망 이후 그 세가 기울게 된다. 위구르는 중국 동맹국들과 연합한 일련의 반란 뒤에 9개 부족이 연합한 토쿠즈-오구즈(Toqus-Oghuz)라는 부족연맹을 통합하여 새로운 동맹세력, 온 위구르(On-Uygur)의 지도세력이 된다. 십성회흘(十城回吃) 744년, 위구르는 바스밀(Basmil), 카를룩(Qarluq) 등의 부족과 함께 후돌궐 제국을 멸망시키고 외튀켄(Ötüken)산에서 위구르 제국을 세운다.
오르콘 위구르 제국[편집]
오르콘 위구르 제국은 744년 쿠틀룩 보일라(Qutluɣ Boyla, 骨力裵羅)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840년까지 카스피 해 유역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점유하였다. 오르콘 강 유역의 광활한 스텝지역을 지배하였으며 수도는 현재의 카라 발가순(Qara Balɣasun)에 위치한 오르두 발릭(Ordu Balïq)이었다. 중국의 당나라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757년 안사의 난으로 중국 당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수도 장안(長安)에 진군하여 구해주기도 한다. 759년부터 779년까지 최전성기를 누렸으나 762년 뵈귀(Bögü) 카간은 이란계 소그드인에게서 전파된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점차 유목적 성격을 잃고 정착 농경사회로 탈변한다. 결국 군사력이 약해진 위구르 제국은 840년 다른 터키계 민족인 키르기즈(Kyrgyz)에 의해 멸망한다.
제국의 몰락과 분열의 시기[편집]
유고르[편집]
세개의 위구르 지역중 동쪽에 있었던 나라는 현재 중국 간쑤 성의 장예에 도읍한 간수 왕국(870년~1036년)이며 유고르라고도 한다. 유고르는 마니교에서 라마교로 개종하였는데, 서쪽의 다른 투르크계 사람들과 다르게 이들은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았다. 이들의 후손은 현재 위구르족과 분리된 중국의 소수민족인 유구르족이다. 전성을 누리던 유고르는 1028년부터 9년간 이어진 탕구트 왕국과의 치열한 전쟁에서 패하여 1036년에 흡수합병된다.
카라코야[편집]
서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중가리아 분지와 타림 분지에 살던 다른 투르크계 부족과 함께 카라코야 왕국(高昌國, 856-866 CE 사이 건국)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인도유럽어족인 토착 토하라인들과 융합되었다. 지배자의 호칭을 따서 이디쿠트(신성한 부, 영광)라고도 불렸던 이 나라는, 겨울의 수도인 투르판과 여름의 수도인 베쉬발릭, 그리고 쿠물, 쿠차에 기반한 불교국가였다. 이들은 위구르 문화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카라코야는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에게 복속되는 1209년까지 독립적으로 국가를 다스렸다. 중국에서 981년 황옌더를 사절로 보내 정주시킬 만큼 이들은 확고한 국가를 완성하였으며 몽골 제국에 복속된 이후에도 영주국가로서 1335년까지 명맥을 유지한다.
카라코야 왕국에 토하라인이 참여한 것은, 현재의 위구르족이 투르크계뿐 아니라 인도유럽어족의 서역인들을 유전적/문화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역사적인 근거이기도 하다.
카라한 왕조[편집]
카라코야의 서쪽에는 카라카니드 왕국(840년~1212년)이 있었으며 카라한(위대한 칸), 일레크칸 이라고도 불렸다. 카라한은 840년, 추이 강 계곡에서 위구르족에 의해 발흥하여 1212년까지 투르키스탄과 트란스옥사니아 지역에 존속했다. 934년 술탄 사툭 부그라 칸(920년-956년)에 의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으며 940년 카를룩의 수도를 점령하여 무슬림 연방으로 거듭난다. 사마르칸트의 사만조와 함께 그들은 스스로를 불교 국가인 카라코야와 호탄왕국에 맞서는 이슬람의 수호자로 여겼다. 카라한의 첫 수도는 추이 강 계곡의 발라사군이었으며 이후 카슈가르로 옮겼다.
카라한의 군림은 투르크 문화와 예술의 역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기간 동안 모스크와 학교, 다리, 그리고 카라반의 숙사가 지어졌다. 카슈가르, 부하라, 사마르칸트는 배움의 중심이 되었고 투르크 문학이 발달했다. 이 시기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Yusuf Balasaghuni의 1060년대 작품인 《Kutadgu Bilig》 (한국어: 행복을 주는 지식)이 있다.
차가타이 한국[편집]
차가타이 한국은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인 차가타이 칸이 세운 몽골 제국의 4한국중 하나이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동부에 위치한 일리 강, 타림분지 서부의 카슈가르에서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트란스옥시아나에 이르는 지방을 다스렸다. 칭기즈 칸의 사후 중앙아시아와 이란 북부의 영토를 상속받아 1242년 사망때까지 다스렸다. 이후 이 지역은 차가타이 한국으로 알려졌다.
1346년 차가타이드 통치자 카잔 칸의 사후 차가타이 한국은 서쪽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서차가타이 한국과 동쪽의 모굴리스탄/위구르스탄으로 나뉜다. 서차가타이 한국은 각 부족의 지도자(아미르)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아미르들에 의해 임명된 칸은 실권을 잃은 허수아비였다. 동쪽에서는 투글리크 티무르(Tughlugh Timur, 1347-1363)가 실권을 장악하고 모굴리스탄을 세운다. 이슬람 국가인 모굴리스탄은 투글리크 티무르 재위 때에 1360년, 1361년 두 차례 서차가타이 한국을 침략하여 일시적으로 정복했었다. 전성기에 그는 시베리아의 이르티시 강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까지와 트란스옥시아나에서부터 타림 분지까지 장악했었다.
투글리크 티무르는 부족의 지도자들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1363년, 그의 죽음 뒤에 트란스옥시아나는 카라운의 수장인 아미르 후사윤에게 탈환되었다.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의 티무르는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아미르 후사윤에 맞섰다. 1366년 그는 사마르칸트를 장악하였고, 1370년 그는 공식적으로 차가타이 칸으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미르로 알려졌다. 30년간 티무르는 차가타이 지역을 기반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으며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 페르시아의 시라즈, 이라크의 바그다드, 인도의 델리,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등을 정복하였다. 앙고라의 오스만 투르크를 정복한 뒤에 티무르는 1405년 중국으로 진군하던 중 사망하였다. 티무르 제국은 그의 아들 샤 루흐에 의해 계승되었고 1447년 사망 때까지 재위하였다.
만주족의 지배[편집]
1644년, 유목민족이었던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중국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몽골, 동투르키스탄, 티베트 등의 주변 민족들을 모두 제압하기 시작했다. 만주족은 동투르키스탄을 1759년 침공하였으며 1864년까지 지배하였다. 청나라는 일단 위구르 지역의 통치를 확립한 뒤에, 이 지역을 신강(新疆)이라고 이름붙이고, 지역의 부족장을 벡(伯克, beg)으로 임명하여 이슬람 주민을 통제한다.
만주족에 의해 몽골 국가들이 무너지자 위구르인들은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 하지만 이어 쳐들어온 만주족에 단결하여 맞서 싸우지 못하고 분열된다. 아팍 호자의 증손자인 '호자 형제'라는 별명의 형제는 위구르군을 이끌고 청군에 맞서 싸우지만 패배하여 서쪽의 카슈가르와 옐켄까지 밀린다. 1759년 여름, 마지막 근거지인 카슈가르에서 도주한 호자 형제는 인도로 도망가기 위해 무리 4000명을 이끌고 파미르 산중으로 도망갔다가 청군에 잡혀 목숨을 잃는다.
청의 지배시기 동안 위구르인들은 42차례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1820년에는 형 호자의 손자인 자항기르가 파미르를 넘어 반청운동의 기치를 높인다. 1826년, 그를 따르는 백산당의 무리를 이끌고 카슈가르를 함락하고 옐켄, 호탄 등의 도시를 정복하지만, 1827년 청의 대규모 지원군에 패배하고 파미르 산중에서 붙잡혀 처형된다. 19세기 중반, 청조가 혼란에 빠지면서 위구르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저항했으며, 카슈가르로 넘어간 자항가르의 일족은 제어할 힘을 잃은 청조를 상대로 성전을 부르짖었다. 1864년 위구르 각지에서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통해 위구르는 동투르키스탄에서 청나라의 관료들을 몰아낸다. 청나라는 이 지역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각지의 반란은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여, 위구르에는 6개의 지역정권이 들어선다. 이들은 곧 내전에 돌입하였고, 위구르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이때, 서쪽의 코칸트 한국에서 넘어온 야쿱 벡(Yaqub Beg)은 아팍 호자의 후예를 왕으로 세우고 카슈가르를 근거지로 다른 세력들을 평정하여, 일곱 도시의 나라라는 뜻의 예티샤르(카슈가리아 왕국)를 세운다. 예티샤르는 카슈가르, 옐켄, 호탄, 아커쑤, 쿠차, 쿠얼러, 투르판 등을 아우르는 위구르의 통일국가였다. 1872년 제정 러시아에, 1873년 오스만 제국에, 1874년 대영제국에 의해 인정받았다.
야꿉 벡은 군대의 무장을 위해 주민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었으며, 자신과 같은 출신인 코칸트 인들을 중용하여 위구르인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불만을 아우르기 위해 스스로가 이슬람의 수호자임을 피력했고, 백성들에게는 이슬람 율법의 준수를 강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슈가르의 '아팍 호자의 묘'를 중수하기도 했다.
청나라는 좌종당에게 군사를 주어 예티샤르로 진격했다. 주변국들은 당시 야꿉 벡이 서양에서 지원받은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섬서성과 감숙성의 회족 반란을 진압하고 타림분지로 진격해온 좌종당에게, 야꿉 벡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협상을 하자는 좌종당의 작전에 말려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야꿉 벡은 급사하고, 예티샤르는 1876년 청군에 다시 정복당한다.
이후 청나라는 지배방식을 바꾸어 위구르를 직접 지배로 바꾼다.
동투르키스탄공화국[편집]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위구르와 독립운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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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편집]
바깥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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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분류한 중국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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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욕장이 어딘지 아시나요?ㅎㅎㅎ
송도해수욕장은 50년대~70년대 사이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던 해수욕장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끊어졌었습니다.
부산시티투어버스를 타고 내리시면 바로 보실수 있는 곳은 중앙광장에 마련된 분수입니다.
이 분수의 명칭은 바닥분수입니다.
제가 송도해수욕장을 찾은 때는 11월이었기 때문에 분수를 볼수는 없었습니다.ㅠ 내년 여름에 해수욕도 하고 분수도 보러 와야겠어요.
생각보다 엄청나게 넓은 백사장이었습니다.
지금 해운대가 모래가 많이 줄어서 엄청 작아졌다면, 송도해수욕장은 이름이 덜 알려진 것이 이상하리만큼,,,어떻게 보면 예전의 명성에 걸맞는 크기의 백사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송도해수욕장의 또 하나의 볼거리는 '고래조형등대'입니다.
송도해수욕장 앞에 있는 고래조형등대는 밤에 조명이 들어와서 더욱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송도해수욕장에는 또 하나의 분수가 있습니다. 바로 송도폭포라는 인공폭포와 함께 만들어져 있는 분수입니다.
이 역시 저는 가동하는 시기가 아닌때에 찾았기에 폭포와 분수 모두 볼 수 없었습니다.
송도폭포 가동시기 및 시간
부산 출신으로 우리나라의 1세대 대중가수라고 불리는 '현인'의 동상이 송도해수욕장에 세워져 있습니다.
특이하고 재미난 것은 현인의 노래를 들을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기계였습니다.
각 번호를 누르면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여기서 노래가 ♬
송도해수욕장에서 시작해서 송도해안산책로를 지나 암남공원까지 이어지는 길을 송도볼레길이라고 하던군요.
저도 처음알았는데 생각해면 참 멋진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송도해수욕장의 멋진 바다와 암남공원의 멋진 모습을 한번에 다 둘러보고 운동도 하고, 몸과 마음을 모두 건강하게 만들수 있는 최고의 운동코스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말 이곳 저곳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한번 방문하면 또 다른 새로운 곳을 알게되어서 가 볼 곳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볼레길을 알게되어 다음에 한번 송도해수욕장부터 암남공원까지 쭉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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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수목원, 2012년도 식물교실 운영
산림청 국립수목원(원장 신준환)은 식물의 가치와 중요성을 일반인에게 알리고자 수목원 전문가와 함께하는 「식물교실」을 2월부터 23일부터 10월 27일까지 운영한다고 밝혔다.
이론과 실습을 겸한 이번 교육프로그램은 ‘나무 겨울눈 관찰’, ‘식물세밀화’, ‘자생식물 사진교실’, ‘실내 원예식물’, ‘분재’ ‘학부모와 함께하는 채소정원 가꾸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국립수목원은 일반시민이 이론과 실습을 겸한 식물강좌를 통해 체계적으로 식물을 알고 관리하며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식물교실을 운영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 국립수목원은 2008년부터 진행해오던 식물교실 강좌를 확대하여 2월부터 23일부터 10월 27일까지 「나무 겨울눈 관찰」, 「식물세밀화」, 「실내 원예식물」, 「자생식물 사진교실」, 「분재」, 「학부모와 함께하는 채소정원 가꾸기」 등 6개 과정을 일반인과 어린이 대상으로 운영한다. 식물교실 강사는 국립수목원 전문가로 구성된다. * 프로그램 안내 참조
□ 2008년부터 시작한 식물교실은 일반인의 관심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2011년도 ‘식물교실’ 참가자 작품 120여점을 전시한 ‘2011년도 식물교실 작품전시회’를 개최하여 관람객에게 많은 호응을 받은바 있다.
□ 자세한 일정 및 프로그램은 국립수목원 홈페이지(http://www.kng.go.kr)에서 확인 가능하며 프로그램 참여 신청은 이메일을 통해 선착순 접수한다.
<참고자료 1>
□ ‘나무 겨울눈 관찰’ 교실은 2월 23일(목)일과 3월에 3회(3∽5째, 목요일) 진행하며 나무에 따라 다른 겨울눈의 다양성을 관찰하고 구별하여 나무의 특징과 근연종과의 관계를 알아가는 일반인 대상 프로그램이다.
□ ‘식물세밀화’ 교실은 식물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관심이 있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4월 12일부터 9월 27일까지 12주간(2,4째 목요일) 진행하는 연속과정으로 이론과 실습을 통해 식물의 구조와 기능을 이해하고 이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강좌로 재료비는 5만원이다.
□ ‘실내 원예식물’ 교실은 3월 13일 부터 9월12일까지 7회 동안 수요일(매달 둘째)에 운영하며 가정용 화분관리, 실내 원예식물의 종류와 관리법 등에 대한 이론과 다양한 식물을 이용한 ‘ 나만의 정원 만들기’를 통한 실습이 병행된다.
□ ‘자생식물 사진교실’은 3월 7일부터 6월 20일까지 8회 동안 운영된다. 본 프로그램은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하여 식물을 촬영하는 기술과 촬영과정을 통해 식물을 배우는 이론과 실습을 겸한 과정으로 디지털 카메라 보유한 분만 신청이 가능하다.
□ ‘분재교실’은 7회 연속과정으로 3월 28일부터 9월 19일까지 수요일에 운영하며 초보자를 위한 배식 디자인과 감상법, 관리할 때 주의할 점 등에 대한 이론 2회와 나무심기, 수형 만들기, 자르기 등을 통한 5회 실습을 겸한다. 실습 재료비는 회당 5만원이다.
□ ‘학부모와 함께하는 채소정원 가꾸기’는 초등학생을 둔 학부모와 학생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일상에서 이용하는 채소류를 어린이정원에 옮겨 심고 가꾸어 수확하는 과정을 통해 식물의 가치와 중요성을 배워나가는 과정이다. 이론과 실습을 겸한 과정으로 수업은 4주 과정으로 4월과 5월
그리고 9월과 10월 토요일(2,4주)에 걸쳐 국립수목원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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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턴 (뉴질랜드)
픽턴(Picton)은 뉴질랜드 남섬의 북동부에 위치한 타운이다. 북섬 웰링턴과 페리와 비행기 가 취항하고 있다. 인구는 2001년을 기준으로 3,990명이었으며, 2006년 조사에서는 2,928명을 기록하여 72명의 인구감소를 기록했다.[1] 타운의 이름은 토마스 픽턴 경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며, 워털루 전투에서 죽은 웰링턴 공작과 연합한 웨일즈의 군인이었다.
웰링턴을 왕복하는 페리의 기착점이며, 말보로 사운드와 코스 퀸 샬롯 사운드로 향하는 거점이 된다. 몇 분 거리의 가까운 곳에 와이카와 타운이 있고, 실제로는 동일한 타운으로 취급을 한다. 2001년을 기준으로 픽턴의 실업률은 4.3%이며, 뉴질랜드 전체 실업률인 7.5%와 비교된다.[2]
지리[편집]
주요 북선 철도와 1번 국도가 남쪽으로 블레넘과 크라이스트처치 등을 이어준다. 반면 풍광이 수려한 퀸 샤롯트 드라이브는 서쪽으로 해블록까지 연결된다. 픽턴은 남섬과 북섬을 연결하는 주요 연결지로 정기 페리편이 쿡 해협을 가로질러 운항하고 있다. 이 노선을 운항하는 2개의 주요 선적회사는 인터아일랜더와 스트레이트 쉽핑이며, 둘 모두 차량과 트럭, 때로는 열차까지 선적 가능한 배이다.
인근의 주거지로는 아나키와, 와이카와, 나쿠타 만이 있다.
에드윈 팍스 해양 센터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죄수들을 운반했던 유일한 배인 에드윈 폭스를 전시한다.
주석[편집]
바깥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Picton official online guide
- Detailed visitor guide
- Brogden's Navvies arrive in Picton, 1872 (eText)
- Picton School website
- Queen Charlotte College website
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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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MAIN-20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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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로프 팔메
어린시절[편집]
기숙학교[편집]
스톡홀름에서 네덜란드계 아버지와 라트비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팔메가 6살일때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귀족집안의 막내로 어려움 없이 자랐다. 어린 팔메는 건강한 편이 아니어서 가정교사에게 주로 교육받았다. 어린 나이에 이미 3개국어 정도를 할 수 있었던 팔메는 당시 스웨덴에 많지 않던 기숙학교(Sigtuna School of Liberal Arts)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된다.
스톨홀름대학교[편집]
17세에 대입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먼저 병역을 마친 뒤 스톡홀름 대학교에 들어갔다. 스톡홀름 대학교를 마친 뒤 미국에 유학가서 다시 학부과정을 밟았다. 팔메는 학생사회의 좌파 토론회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자인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1944)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팔메가 미국자동차노동조합(United Auto Workers)에 대해 쓴 논문은 4학년 우수 논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국[편집]
팔메는 대학시절이 끝나갈 무렵 미국과 멕시코 전역을 히치하이킹으로 다니며 미국 하층계급과 접하였다. 이 여행에서 팔메는 자신의 영웅이자 자동차노조의 리더였던 월터 루서(Walter Philip Reuther)를 만나 여러시간에 걸쳐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 기간에 팔메는 인종분리정책과 경제적 불평등이 가진 사회문제를 깊게 느꼈다. 팔메는 총리가 된 이후 미국에 수차례 방문하는 동안 미국이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만들었다고 언급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불평등한 상황이 자신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는 의미에 가깝다.
학생노조[편집]
이후 스톡홀름 대학으로 돌아온 팔메는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학내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으며 스웨덴 학생 노조를 위해 일했다. 이후 스톡홀름의 사회민주주의 성향을 가진 학생들과 어울리게 된다. 1952년에 스웨덴 학생 노조의 의장으로 당선되었고 학생 정치인으로 유럽을 다니며 국제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편집]
팔메는 자신이 사회주의자가 된 계기로 세가지를 들었다. 1) 사회민주당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와 보수당 야를 하를마르손, 자유당 엘론 안데르손 사이의 세금논쟁에 자신이 참여하게 된 것 2) 미국 남부 여행 3) 아시아 여행을 통해 제국주의와 식민지 문제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것.
정치 이력[편집]
1952년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입당할 때부터 총리 에를란데르의 개인비서에 가깝게 활동했으며 1955년부터는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청년연대의 핵심멤버로 활동하며 강의를 했다. 또한 노동자 교육위원회의 멤버이기도 했다.
1957년에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60년대 초부터는 국제원조기구 활동에도 개입했으며 1963년에 역대 최연소 장관(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하여 에를란데르를 보좌했다. 1965년에는 교통통신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라디오와 TV가 광고주의 압력으로부터 어떻게 독립을 유지할 것인지에 관심을 가졌다. 1967년에는 교육부 장관이 되었고 곧 대학개혁계획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좌익 학생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학생들이 학생조합건물을 점거했을때 팔메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무력을 버리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하라며 다독였다. 오랜시간 동안 총리였던 타게 엘란데르의 뒤를 이어 69년부터 86년까지 사회민주당 대표였으며 두번에 나누어 총리직을 맡았다.
총선 패배 기간인 76-79년 사이에는 야당 대표로서 국내문제에 개입하고, UN중재자 자격으로 이란·이라크 전쟁 종식을 위해 노력하였다. 당내의 중추였으며 대외적인 인기에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않는 토론태도를 가졌던 그는 미소 양강대국에 기대지 않고 다수의 제3세계 국가들과 연대하려고 노력했다. 기본적으로 탈식민주의적인 입장으로 핵확산 방지 캠페인을 전개하고 아프리카와 팔레스타인에도 정치적, 재정적 도움을 주며 제3세계의 평화대변자로까지 불렸으나 제3세계의 독재국가들에도 경제적 지원을 했다는 점에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가 혁명 이후의 쿠바에 방문한 첫번째 서방세계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며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스페인어로 연설까지 했다. 그는 종종 스웨덴의 중립정책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미소의 대외정책과 제국주의에도 종종 비판을 가했지만 그는 스페인의 프랑코나 체코의 후사크 등 여전히 유럽에 남아있는 군사 독재도 비판했다. 베트남 전쟁 중 미국의 하노이 폭격을 신랄하게 비난하여 미국이 스웨덴 대사를 철수시킬 정도로 강경책을 취하기도 했다. 남아공의 인종분리 정책에도 지속적인 비판을 가했다. 그 때문에 그의 암살 배후로 남아공 정보기관이 지목되기도 했다.
정책[편집]
올로프 팔메는 1969년과 1975년에 스웨덴 헌법을 개정할 때 양당제에서 다당제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배경에서 힘써왔다. 당시 스웨덴 헌법은 166년이나 된 것으로 미국 헌법을 제외하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새 헌법에서는 명목상으로 전제 군주국이었던 스웨덴을 공식적으로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했으며 스웨덴 추밀원을 무력화시키고 영국여왕이나 덴마크, 노르웨이 군주들도 가지고 있던 칼 구스타프 16세의 제의주도권을 박탈했다.
그는 법률적으로 고용보장을 강화하는 형태로 노동시장 또한 바꾸어놓았다. 1973년의 총선거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과 자유주의-보수주의 진영은 각각 175석을 얻었고 팔메는 정권이 연장되긴 했지만 의회의 반대로 여러번 그의 결정을 되돌려야 했다. [3]
팔메 정권은 아동 복지센터나 사회보장제도에도 신경을 썼고 노인문제, 사고방지, 가정문제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팔메는 공공의료 정책을 효율적으로 집행해 영아사망률을 천명당 12명 수준으로 유지했다.[4] 장애인, 이민자, 저임금 노동자, 한부모 가정, 노인들을 위한 야심찬 재분배 정책도 수행했다.[5] 스웨덴식 복지는 그의 재임기간에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수준으로 올라갔다.[6][7] 물론 세율도 유럽에서 비교적 낮은 상태였다가 서구진영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8]
1970년에는 법률을 제정하여 종합고등학교(gymnasium), 기술학교(fackskola), 직업학교(yrkesskola)로 나뉘어 있던 고등 교육체계를 하나의 고등학교 체계로 바꾸었으며 1975년에는 대학 등록금을 무료로 바꾸었다. 1971년에는 60세 이상의 노동자들에게까지 노동연금 수혜자격을 연장했다. 1974년에는 보편적 치과보험을 도입하고 의료보험의 수혜율을 연수익의 90%까지 보장하였다. 같은 해 출산장려금을 보육수당으로 교체하였고 가족단위를 위한 주택수당도 특히 저소득층이 혜택받을 수 있도록 확대하였다. [9]
스웨덴 경제가 안좋았던 시기에 재집권한 팔메는 재정적자와 지출의 큰 틀에서 균형을 맞추고 대외채무의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전통적인 케인즈 경제학을 거부하고 투자, 생산, 고용의 증가를 지향하는 '제3의 길'을 선택한다. 누진세를 강화하고 복지예산을 늘리는 대신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고통 분담'을 동반했다. 예를 들어 재산세과 상속세는 인상했고 주식투자자들의 세금감면 혜택은 삭감했다. 대신 팔메의 실권기에 삭감되었던 복지예산 감소는 철회되었다. 기존의 물가연동 연금과 여러 혜택등은 복원되었다. 지자체의 아동보육시설들을 재건할 수 있도록 무상자금지원계획도 수립되었다. 실업보험도 완전 복원되었고, 질병수당이 사라져서 속칭 '무임금시기(no benefit days)'라 불리던 것도 되돌려놓았다. 식량보조와 아동수당이 확대되었고 이익 재분배의 가장 진보적인 형태로 간주되던 노동투자펀드의 도입도 시도되었다. [5]
양성평등의 공공연한 지지자였던 팔메는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 여성 대회(World Women's Conference)에 참여해서 여성 권익을 옹호했다. 팔메는 영화 Dom kallar oss mods의 개봉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었는데, 사회적 추방자 두명을 다루는 이 논쟁적인 영화는 일부 검열되었으나 그 검열된 부분이 중요하다고 보았었다. [10]
녹색 정치의 선구자였던 팔메지만 원자력 에너지는 피할 수 없다고 강하게 믿고있었다. 적어도 화석연료에서 다른 에너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에너지로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11] 미래 에너지로서 원자력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1980년의 국민투표에 팔메가 개입했기 때문에 그의 반대자들은 이것으로 그를 공격했다. 2011년 현재 원자력 에너지는 아직 스웨덴의 주요 에너지원 중 하나로 남아있고 여기엔 팔메의 영향이 컸다.
국제정치에서 아래와 같은 이유로 팔메는 유명인사였다. 이러한 행동은 그에게 많은 적과 많은 친구를 만들어주었다.[12]
-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에 대해 거칠고 감정적인 비난을 함
- 소련이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 것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냄
- 후사크 체제라 불리던 유럽의 공산주의 체제를 '독재자떼'라 비난함
- 핵무기 확산 방지 노력
- 프랑코가 ETA와 FRAP의 민족주의자들을 사형시키자 그를 '악마같은 도살자'라 비난
- 남아공에 대해 경제제재를 진행하면서 인종분리정책을 '특히 섬뜩한 체제'로 비난
- 아프리카 민족회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폴리사리오 전선 등을 정치경제적으로 지원
- 1975년에 쿠바 방문하여 카스트로와 만나고 쿠바 혁명과 캄보디아 혁명 등을 찬양
- 칠레의 피노체트 체제를 비난
- 엘 살바도르의 FMLN과 니카라구아의 FSLN을 정치경제적으로 지원
- 이란 이라크 전쟁의 중재 리더
1968년 2월 21일 교육부 장관이었던 팔메는 주소북베트남 대사인 응우얜 토 짠(Nguyen Tho Chan)과 함께 스톡홀름에서 열린 반미집회에 참가했다. 이 집회는 '스웨덴의 베트남 위원회'가 주관한 것이었고 팔메와 응우얜은 연사로 초청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주스웨덴대사를 소환했고 팔메는 강하게 비난받았다.[13] 1972년 12월 23일 수상이던 팔메는 스웨덴 국영 라디오에서 미국의 하노이 폭격을 게르니카 폭격,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카틴 숲 대학살, 리디체 학살, 샤프빌 학살, 바비야르 학살, 트레블린카 학살 등에 비유하며 맹비난했다. 미국 정부는 이를 '총체적 모욕'으로 받아들였으며 다시 한번 스웨덴과 외교 단절을 선언했다. 이 단절은 1년 넘게 유지되었다.[13][14] 사회민주당의 이러한 찬반양론적인 상황과는 관계없이 스웨덴은 사실상 나토와 오랜 기간 동안 긴밀한 협력을 유지했다.
참고[편집]
- Dagens Nyheter 23 January 2007
- "Detta borde vara vårt arv" by Åsa Linderborg, Aftonbladet 28 February 2006
- http://karisable.com/palme.htm
- http://info.lanic.utexas.edu/la/cb/cuba/castro/1975/19750729
- Socialists in the Recession: The Search for Solidarity by Giles Radice and Lisanne Radice
- http://books.google.co.uk/books?id=bzfEo6E-YuUC&pg=PA206&lpg=PA206&dq=olaf+palme+expanded+welfare+state&source=bl&ots=5tx2-uzqQo&sig=epiioicodzfH_QeSXhk1wbVb4nM&hl=en&sa=X&ei=tY1gUIKlH8fB0gXaxID4Ag&ved=0CDgQ6AEwAQ#v=onepage&q=olaf%20palme%20expanded%20welfare%20state&f=false
- Taxation, Wage Bargaining and Unemployment by Isabela Mares
- http://web.comhem.se/dier/Swedish%20Prime%20Ministers.htm
- Growth to Limits: The Western European Welfare States Since World War II Volume 4 edited by Peter Flora
- Daniel Ekeroth: SWEDISH SENSATIONSFILMS: A Clandestine History of Sex, Thrillers, and Kicker Cinema, (Bazillion Points, 2011) ISBN 978-0-9796163-6-5.
- Olof Palme till Shirley Maclaine om vikten av kärnkraft - 유튜브
- Holst, Karen. “Palme's political legacy 'put Sweden on the map'”. 《The Local》. The Local Europe AB. 23 March 2011에 확인함.
- Andersson, Stellan. “Olof Palme och Vietnamfrågan 1965-1983” (Swedish). olofpalme.org. 27 February 2008에 확인함.
- The speech
|전 임
타예 에를란데르
|스웨덴의 총리
1969년 ~ 1976년
|후 임
토르비에른 펠딘
|전 임
토르비에른 펠딘
|스웨덴의 총리
1982년 ~ 1986년
|후 임
잉바르 칼손
|제26대 스웨덴의 총리|
|전 임
타게 엘란데르
토르비에른 펠딘
|1969년 10월 14일 ~ 1976년 10월 8일
1982년 10월 8일 ~ 1986년 2월 28일
|후 임
토르비에른 펠딘
잉바르 칼손
|루이스 헤르하르트 더 헤르 · 아르비드 포세 · 칼 요한 티셀리우스 · 로베르트 템프탄데르 · 길리스 빌트 · 구스타프 오케르힐름 · 에리크 구스타프 보스트룀 · 프레데릭 본 오테르 · 에리크 구스타프 보스트룀 · 람스테트 · 크리스티안 룬데베리 · 칼 스타프 · 아르비드 린드만 · 스타프 · 햘마르 함마르시욀드 · 칼 스바르츠 · 닐스 에덴 · 얄마르 브란팅 · 헤르하르트 루이스 더 헤르 · 오스카르 본 시도프 · 얄마르 브란팅 · 에른스트 트리게르 · 얄마르 브란팅 · 리카르드 산들레르 · 칼 구스타프 에크만 · 아르비드 린드만 · 칼 구스타프 에크만 · 펠릭스 함린 · 페르 알빈 한손 · 악셀 페르손브람스토르프 · 페르 알빈 한손 · 타게 엘란데르 · 올로프 팔메 · 토르비에른 펠딘 · 올라 울스텐 · 토르비에른 펠딘 · 올로프 팔메 · 잉바르 칼손 · 칼 빌트 · 잉바르 칼손 · 예란 페르손 · 프레드리크 레인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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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이라
유럽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페레이라는 금 수공예로 유명한 킴바야 족(Quimbaya)의 터전이었다. 스페인은 1540년 경에 카르타고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169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816년 호세 산프란시스코와 마누엘 페레이라 형제는 시몬 볼리바르에 패배한 후 이 곳으로 피해왔다. 이 후 1863년 사제인 레미지오 안토니오 카냐르테(Remigio Antonio Cañarte)가 현재의 볼리바르 광장에 페레이라 시를 세웠다.
벌거벗은 볼리바르 상이 있는 볼리바르 광장과 콜롬비아에서 가장 큰 마테카냐(Matecaña) 도시 동물원이 있다. 프로 축구 팀인 데포르티보 페레이라가 있다.
바깥 고리[편집]
- (스페인어/영어) 페레이라 시 공식 홈페이지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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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동물(社會的動物)은 다른 종 구성원들과 수많은 상호작용을 수행하여 구별되는 사회를 만드는 생물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모든 포유류와 조류는 어미와 자식이 유대적 관계를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는 것에서 사회적이다.
사회적 행동을 하는 일부 무척추동물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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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여행지
글 수 208
경북 문경의 선유동계곡은 이름 그대로 신선이 놀았을 만한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계곡이다.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의 경계를 이루는 대야산에서 흘러내린 계곡이 상류에서 용추계곡을 빚어내고 다시 문경 땅을 더 흘러 이 선유동계곡을 만들었다. 이 계곡은 922번 지방도로의 선유동계곡 주차장 아래 학천정이란 정자가 잇는 곳이 가장 아름답다. 계곡 양쪽으로는 봉우리들이 가파르게 솟아 있고 계곡에는 넓은 너럭바위들이 많아 피서 삼아 물놀이를 즐기기에 딱 좋은 계곡이라 할 수 있다.
이 계곡의 경관이 아름다워 소금강이란 별칭을 얻고 있으며, 신라의 최치원 선생이 이곳을 아껴 자주 이곳에 들렀다고 전해진다. 계곡 하류 쪽에는 칠우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는 1927년에 지은 것으로 이 고장에서 호에 우 자가 들어가는 일곱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칠우정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가는 길
선유동계곡이 있는 문경시 가은읍으로 가려면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여주를 지나면 중부내륙고속도로와 만나는 여주분기점이 나온다. 여기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문경나들목까지 간다. 문경나들목을 나와 3번 국도에서 우회전하여 달리다가 소야삼거리에서 가은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901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은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문경석탄박물관 이정표가 나온다. 이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해서 922번 지방도로를 달려 문경석탄박물관을 지나면 봉암사 입구를 지나 선유동계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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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일 매트릭스
역사[편집]
펜타일은 5와 타일을 합친 말이다. 처음에는 파란색을 감지하는 원추 세포가 적다는 사실을 가지고 오른쪽과 같이 구획했다. 하지만 동일한 해상도의 RGB 디스플레이 구현 장치보다 화질이 떨어진다.
펜타일 RGBG[편집]
펜타일RGBG는 인간이 초록색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해상도의 손실을 줄인다. 빨간색과 파란색은 이웃 픽셀과 합쳐서 하나의 서브픽셀로 만든다. 전통적인 픽셀 배치보다 1/3이 적은 서브픽셀을 사용하게 된다. 펜타일은 명목 해상도보다는 덜 선명하게 보이고 같은 서브픽셀수의 전통적인 RGB보다는 선명해보인다.
펜타일 RGBW[편집]
펜타일 RGBW는 RGB값을 이용 하얀 하부픽셀을 만든다. 하얀 빛을 내는 하부픽셀을 이용할때 같은 밝기를 내는데 드는 전력 소모를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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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훌륭한 가정교육
자기 자식을 잘 가르치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내 아이에게 엄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쩌다가 큰 잘못으로 호되게 꾸짖을 일이 생겨도.
자식이 반발심을 갖지 않도록 교육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가정교육은 자식의 인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전문교육은 남에게 맡기되.가정에서는 자식에게
제대로 된 습관과 인성을 길러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부모가 집에서 몸가짐을 바
르게 해야 한다.
독서를 자주 하고.많이 대화하며.바른 말을 써야 한다.
또한 삶의 지혜에 관한 많은 조언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자식은 본대로 배우는 법이다.
부모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 자식에게는
가장 훌륭한 가르침이 된다.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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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zday.co.kr/bbs/view_board.html?q_id_info=1208&q_sq_board=3952035&srh[category]=6&srh[scal]=20&srh[page]=1&srh[sort]=date&srh[date]=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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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30T12:42:46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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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디자인 수도
세계 디자인 수도(World Design Capital, WDC)는 디자인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문화를 풍요롭게 함으로써 시민 삶의 질을 개선하자는 취지로 페터 첵 회장이 창안한 제도이다. 디자인을 사회, 경제, 문화적 발전을 위해 적극 활용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국제디자인연맹(IDA)과 국제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ICSID)는 이를 세계디자인수도 제도로 만들었다.
연도별 세계 디자인 수도[편집]
- 2016년 - 중화민국 타이베이 시[1]
- 2014년 -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2]
- 2012년 - 핀란드 헬싱키[3]
- 2010년 - 대한민국 서울[4]
- 2008년 - 이탈리아 토리노[5]
서울특별시의 세계 디자인 수도 공식 선정[편집]
이탈리아의 토리노가 첫 시범 도시로 지정되었으며, 서울이 처음으로 세계디자인수도로 공식 선정되었다. 서울은 2010년부터 1년 동안 디자인수도의 모델이 되며 2010년을 준비하는 행사로 서울디자인위크 2008, 세계디자인올림픽 2008, 서울국제디자인마켓 2008, 서울디자인리포트, 서울디자인자산 발굴 등을 진행한다. 이중 2008년 10월에 열린 서울 디자인 올림픽은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디자인 박물관, 디자인 도서관, 디자인 체험관 등 세계인이 참여하는 디자인축제로 기획되었다.
또한 옛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를 조성해 서울의 랜드마크로 활용할 계획이다. 건물 용도는 전시컨벤션홀, 정보센터, 전시관, 체험관, 디자인샵, 지원시설 등을 갖춘 디자인 복합시설로 2010년 완공할 계획이다. 이로 인해 서울의 브랜드 가치와 고용창출효과도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모호한 표현][출처 필요]
세계 디자인 수도 서울 2010[편집]
세계 디자인 수도 서울 2010(WDC, World Design Capital Seoul 2010)은 서울특별시가 2007년 10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 산업 디자인 단체 협의회(ICSID) 총회에서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선정되었다. 세계디자인수도는 디자인 성과가 뛰어나거나, 디자인을 통해 도시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도시를 대상으로 선정하는 격년제 국제경쟁프로젝트다. 서울시는 디자인을 민선4기 신성장동력산업의 하나로 정하고 공공디자인의 전면혁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립 등 디자인을 통한 도시발전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마크 뉴슨(Marc Newson) 등 총5명의 심사위원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선정되었다. 서울시는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 사업을 통해 세계 디자인 허브도시로 거듭나고자 8대 제안사업을 기반으로 다양한 디자인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진행 상황[편집]
WDC서울2010 사업은 2010년 한 해 동안 펼쳐지지만, 선정된 해로부터 지정된 해까지 약 3년의 준비 및 홍보기간이 주어지므로, 서울시는 다음과 같이 단계적 추진체계를 갖추어 세계디자인수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준비단계(2008): 서울시와 Icsid간 협정체결, WDC추진체계 구축, WDC프로그램 기획, WDC로고개발, 국내외 홍보 및 디자인국제교류사업
- 확산단계(2009): WDC서울2010 로드맵 구축, 민간․공공부문디자인협력체제 구축, WDC예비행사추진 등 2010년 사업준비, 시민참여 디자인이벤트
- 본격화단계(2010): WDC서울전야제, 디자인선언, 디자인공로상시상 등 WDC서울 2010 개막식 개최 등 8대 제안사업 추진, 월별 다양한 디자인시민운동 개최
- WDC 8대제안사업: WDC서울2010개막행사,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건립, 월드디자인리포트, 서울디자인올림픽, 월드디자인마켓, WDC기념상징물국제공모, 서울디자인자산, 디자인시민운동 등
주석[편집]
- http://www.icsid.org/news/year/2013_news/articles1784.htm
- http://www.worlddesigncapital.com/media-and-resources/press-releases/
- http://www.worlddesigncapital.com/news/releases/main71.htm
- http://www.businessweek.com/globalbiz/content/feb2008/gb20080227_847340.htm
- http://www.torinoworlddesigncapital.it/port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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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드 파자
지아드 파자(Ziad Youssef Fazah 1954년 6월 10일 ~)는 라이베리아 몬로비아태생의 세계 최고의 다언어 구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20세이전에 58개에 달하는 언어의 대부분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는 사상 최고의 다언어 구사자가 된다. 그의 이 놀라운 언어능력은 전 세계의 TV쇼에서 한국어,몽골어,체코어,헝가리어를 말하는 출연자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입증되어 왔다. 레바논에서 성장한 그는 1970년대 이래로 브라질에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칠레의 한 TV쇼에서 그의 구사 능력을 시험해보았는데 5~7개의 언어만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고 나머지 언어들은 모두 어느 정도만 구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러시아어 구사자가 그에게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이라고 러시아어로 묻자 전혀 대답하지 못했다.[출처 필요] 그가 조금이라도 구사할 수 있는 언어([1] Ziad Youssef Fazah: Maior Poliglota do Mundo)는 다음과 같다.
- 알바니아어 독일어 암하라어 아랍어 아르메니아어 아제리어 벵갈어 미얀마어 불가리아어 캄보디아어
- 광동어 중국어 상해어 싱할리어 싱가포르영어(?) 한국어 덴마크어 종가어 에스파냐어 핀란드어
- 프랑스어 피지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힌디어 네덜란드어 헝가리어 인도네시아어 영어 아이슬란드어
- 이탈리아어 일본어 스와힐리어 라오어 말레이어 말라가시어 몽골어 네팔어 노르웨이어 파피아멘토
- 페르시아어 폴란드어 포르투갈어 파슈툰어 키르키스어 루마니아어 러시아어 세르비아어 스웨덴어
- 타지크어 타이어 체코어 티벳어 터키어 우르두어 우즈벡어 베트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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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타마 정
오쿠타마 정(일본어: 奥多摩町, おくたままち)는 도쿄 도 니시타마 군의 정이다. 넓이는 225.63㎢이고, 인구는 2009년 9월 1일 기준으로 6,156명이다. 도쿄 도에서 가장 넓은 자치체이며 도쿄 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2017m의 구모토리 산이 있다. 이웃한 사이타마 현, 야마나시 현과 함께 오쿠치치부 산지를 이룬다. 도쿄 도의 최북단이자 최서단으로 도쿄의 중요한 수자원인 오쿠타마 호가 있다.
역사[편집]
에도 시대[편집]
에도 시대에 현재의 오쿠타마 지역은 16개의 촌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의 촌에는 촌민들을 대표하는 촌장이 있었다. 또한 에도 시대에 다카노스 산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어있었다. 이것은 이곳이 상류층들을 위한 매사냥터였기 때문이다.
현대[편집]
행정 구역 체계의 변화와 현으로의 통합으로 오쿠타마 지역은 고타바 촌을 제외하고는 니라야마 현의 일부가 되었다. 고타바 촌은 1871년에 마에바시 현의 관할이 되었다가 군마 현의 일부가 된다. 1889년에 오쿠타마 지역은 새로운 시정촌 행정구역 체계에 따라 세 개의 촌으로 나뉘었다. 세 개의 촌은 고리카와 촌, 고리 촌, 오고우치 촌으로 불렸다. 1940년에 고리카와 촌은 고리카와 정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에 고리카와 정, 고리 촌, 오고우치 촌이 합쳐져 오쿠타마 정이 설치되었다.
지리[편집]
산[편집]
강[편집]
호수[편집]
교통[편집]
도로[편집]
철도[편집]
자매 도시[편집]
바깥 고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일본어) 공식 웹사이트
도쿄 도의 행정 구역
|도쿄 23구|
|다마 지역|
|니시타마 군|
|도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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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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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마(영어: plasma)는 물리학이나 화학 분야에서 디바이 차폐(Debye sheath)를 만족하는 이온화된 기체를 말한다. 자유 전하로 인해 플라스마는 높은 전기전도도를 가지며, 전자기장에 대한 매우 큰 반응성을 갖는다.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의 99%가 플라스마로 이루어져 있다. 물리적으로, 플라스마는 전기전도도를 가지는 전하를 띤 입자들의 집합체로, 외부 전자기장에 집합적으로 반응한다. 플라스마는 일반적으로 중성 기체와 같은 집합체 또는 이온 빔의 형태를 취하지만, 티끌을 포함하기도 하며, 이러한 플라스마를 티끌 플라스마(dusty plasma)라 한다.
목차
- 1 역사
- 2 정의 및 성질
- 3 이론
- 3.1 입자의 집합으로서의 플라스마
- 3.2 유체로서의 플라스마
- 4 응용 분야
- 5 같이 보기
역사[편집]
|“||극소수의 전자가 존재하는 차폐(sheath) 영역의 전극 근처를 제외하고, 전리된 기체는 대략 같은 수의 전자와 이온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공간 합성 전하(resultant space charge)는 매우 작다. 플라스마라는 이름은 이온과 전자의 전하량이 균형을 이룬 이러한 영역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정의 및 성질[편집]
모든 이온화된 기체를 플라스마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온화 된 기체 중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극성과 비극성 입자들로 이루어진 "준중성(Quasi neutrality)"의 기체이다. "준중성"이란 용어는 디바이 차폐와 연관
일반적으로 전기장은 역제곱 법칙을 따라 감소한다. 하지만 플라스마의 경우 감소 효과가 작아 비교적 먼 거리까지 전기장이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경우 국소적인 범위 내에서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먼 거리에서의 상호작용도 일어난다. 위에서 말한 "집단적인 움직임"이란, 플라스마의 운동이 국소적인 상태뿐만 아니라 먼 거리의 상태까지 영향을 받는 운동이다.
사하 이온화 방정식[편집]
우리 주변에서는 플라스마 상태의 물질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사하 이온화 방정식(saha ionization equati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하 이온화 방정식에 따르면, 온도 에서 열적 평형에 있는 기체에서,
여기에서 , 은 각각 이온화된 원자와 중성 원자의 밀도(단위 부피당 입자 수)를 뜻하고, 는 단위 부피당 전자 개수밀도이며, 는 볼츠만 상수, 그리고 는 기체의 이온화 에너지를 말한다. 지구의 조건을 대입해 이 값을 계산하면 에 가까운 비율이 나온다. 아주 높은 온도에서만 유의할 만한 비율이 나오기 때문에 플라스마를 물질의 기본적인 세가지 상태인 기체, 액체, 고체, 초임계 상태와 더불어 다섯번째 상태로 취급한다. 사하 이온화 방정식에 대한 자세한 이해는 필요는 없으나, 플라스마를 이해하기 위해 대략적인 물리적 의미는 알 필요가 있다. 이온화가 되기 위해선 에너지가 큰 원자가 충돌을 해 전자를 떼어내야 한다. 사하 이온화 방정식에서 지수 부분은 이런 에너지가 큰 원자가 빠르게 감소하는 것을 보여준다. 원자가 이온화되면 다시 안정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 전자와 결합해야한다. 결합률은 전자의 밀도에 비례해서 전자의 밀도가 클수록 원자는 빠르게 안정한 상태로 결합한다. 따라서 사하 이온화 방정식에서 항이 분모에 들어가게 된다.
플라스마의 온도[편집]
여기서 밀도 을 를 적분한 값으로 정의한다.
상수 값은 밀도 과 관계된 값이다.
속력 분포는 온도와 관련되어 있다. 온도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 입자의 평균 운동 에너지를 구해보자.
3차원에서 에너지 분포는 1차원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구해보면 라는 결과가 나온다. 일반화 시키면 차원의 자유도가 증가할 때 마다 만큼 평균 에너지가 증가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과들은 온도와 평균 에너지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플라스마 내부에는 다양한 온도가 존재한다. 이것은 이온 간의 충돌과 전자 간의 충돌이 일어날 확률이 이온과 전자가 충돌할 확률보다 높기 때문에 나타난다. 따라서 각각의 입자간의 충돌 횟수에 따라 이온과 전자는 다른 온도를 갖는다. 또한 같은 입자라고 하더라도 다른 속력 분포를 나타낼 수 있다. 자기장이 일정한 방향으로 걸린 경우 자기장의 나란한 방향과 수직한 방향의 속도가 달라서 각각의 방향에 따라 온도가 다르다.
디바이 차폐[편집]
플라스마는 외부에서 걸어준 전위를 차폐시킨다는 특징이 있다. 이를 디바이 차폐(Debye sheath)라고 한다. 플라스마 내부에 두 개의 대전된 구를 넣어 전기장을 만드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두 구는 외부 전지에 의해 전위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두 구는 반대 전하를 주변으로 끌어들여 전기장을 상쇄시킨다. 만약 플라스마의 온도가 낮은 경우라면 열에 의한 충돌이 없어, 전기장을 완벽히 상쇄시킨다. 따라서 외부에서 전기장은 0이 된다.
하지만 온도가 충분히 크다면 차폐가 완벽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 경우 구를 둘러싼 전하 구름의 가장자리에서 전하는 전자기 퍼텐셜을 벗어날 정도의 에너지를 갖는다. 결국 전하 구름의 가장자리는 열 에너지 와 전기적 위치 에너지가 같아지는 지점에 형성된다.
이를 바탕으로 전하 구름의 두께를 계산해보자. 퍼텐셜 가 인 평면에서 라는 일정한 값으로 고정되어 있을 때 를 계산한다. 계산상 편의를 위해 이온이 전자에 비해 질량이 매우 커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1차원에서의 푸아송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거리에서의 밀도를 라고 표현하면 로 대체할 수 있다.
즉, 전기적 퍼텐셜 에너지가 클 수록 적은 수의 전자가 분포한다.
이 함수를 인 경우에서 에 대해 적분한다. 임을 상기하면
1차원 푸아송 방정식에 이를 적용하면
인 곳에서 우변을 테일러 급수로 전개하면
이는 가 큰 영역에서는 간단한 형태로 전개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영역은 전하 구름의 두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전위가 급격히 떨어진다. 테일러 급수에서 1차 항만 남기면 를 얻을 수 있다.
라고 정의 하면 1차항만 남은 푸아송 방정식의 해는
앞서 정의한 를 디바이 길이(Debye length)라고 부르며, 차폐가 되는 길이를 말한다.
전자의 밀도가 증가하면 단위 면적 당 전자수가 증가하게 돼서 디바이 길이는 감소한다. 또한 열 에너지가 증가할수록 디바이 길이는 증가한다. 열 에너지가 작은 경우는 결합에 의해 전하 구름이 매우 얇아지기 때문에 디바이 길이는 열 에너지에 비례한다. 열 에너지에서 온도를 로 사용한 이유는 전자의 운동이 훨씬 더 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자에 의해 차폐가 일어나기 때문에 전자의 운동이 차폐를 결정한다.
준중성은 이를 통해 정의할 수 있다. 만약 플라스마의 크기가 보다 매우 크면 국소적인 전하의 밀집이나 외부 퍼텐셜에 의해 플라스마 내부에 생긴 전자기장이 완벽하게 차폐되지 않는다. 차폐가 되지 않는 나머지 부분에서 는 매우 작고 가 성립한다. 전하가 약간만 불균형을 이뤄도 에 비례하는 퍼텐셜이 생긴다. 플라스마가 준중성이란 뜻은 전자의 밀도와 이온의 밀도가 거의 비슷하지만 모든 전자기력이 상쇄되지 않을 정도로 중성을 띈다는 말이다. 즉, 이온화 된 기체를 플라스마라고 부를 수 있는 기준은 가 플라스마의 전체 크기보다 매우 짧을 때이다.
플라스마의 기준[편집]
디바이 차폐는 충분히 많은 입자가 있는 경우에 적용된다. 만약 한두 개의 입자만 존재하는 경우 디바이 차폐는 의미가 없어진다. 이 사실과 를 통해 이라는 조건을 얻을 수 있다. 는 디바이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구 안의 입자 수를 뜻한다.
이온화 된 기체가 플라스마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세 번째 기준은 충돌과 관련되어 있다. 제트 엔진에서 방출되는 이온화 된 기체는 중성 원자와 많이 충돌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유체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가 특정한 플라스마 진동의 주기이고 가 중성 입자끼리의 충돌 사이의 평균 시간 간격이라고 하면 인 경우에 플라스마라고 한다.
정리하자면, 이온화된 기체를 플라스마라고 부를 수 있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이론[편집]
플라스마는 밀도가 기체와 액체의 중간에 상태여서 수학적으로 분석하기 어렵다. 물 같이 밀도가 큰 액체는 유체 역학에서 적용되는 방정식을 통해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밀도가 아주 작은 기체는 단일 입자의 운동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플라스마는 밀도가 큰 유체의 성질을 가질 때도 있고, 단일 입자와 같은 성질을 가질 때도 있다.
입자의 집합으로서의 플라스마[편집]
플라스마에 대해 이해를 하기 위한 첫 단계는 단일 입자가 전자기장에 있을 때 어떻게 운동을 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플라스마를 입자 하나하나로서 분석함으로써 토카막에 플라스마를 가두는 방법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일정한 전기장과 자기장에서 운동[편집]
자기장은 항상 이동 방향과 수직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속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다만 속도의 방향에만 영향을 준다.
전기장이 없는 경우[편집]
자기장 에 의해 입자는 원 모양의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위 식에서 은 입자의 질량, 는 입자의 전하량을 뜻한다.
자기장 의 방향을 이라고 정하면( = ), 다음과 같은 방정식을 얻을 수 있다.
위 방정식들로부터 , , 에 대한 2차 미분 방정식을 얻는다.
사이클로트론 주파수(cyclotron frequency) 라는 물리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자.
- .
그렇다면 식 , 에 대한 해는 다음과 같다.
는 전하의 부호에 따라 정해지고, 는 자기장에 수직한 평면 상에서 움직이는 속력을 말한다.
, 의 상(phase) 를 다음 식이 성립하도록 정하고,
라모 반지름(Larmor radius) 을 로 정의하면 식 , 를 양변 적분했을 때 다음과 같은 식을 얻을 수 있다.
위의 결과는 - 평면에서 봤을 때 입자가 를 중심으로 원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 때 원운동의 중심을 길잡이 중심(guiding center)이라고 부른다.
전하를 띤 입자가 궤도를 따라 운동하면 자기장을 생성하는데 이 자기장의 방향이 맨 처음 입자들에게 걸어줬던 자기장 와는 정반대 방향이다. 플라스마 입자들이 자기장을 줄여주는 효과를 나타내며, 이 때문에 플라스마는 반자성을 띤다.
유한한 크기의 전기장이 동시에 존재할 경우[편집]
일정한 전기장과 자기장이 동시에 입자에 작용하면 입자의 운동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 .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기장 의 방향을 으로 정하고 전기장 이 - 평면 위에서만 움직인다고 설정한다.
위 식에서부터 , , 성분을 각각 구하면
위 방정식들로부터 다음 2차 미분 방정식을 이끌어낸다.
위 미분방정식의 해는 다음과 같다.
즉, 방향으로 길잡이 중심이 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기장이 없을 경우와 거의 같은 움직임을 나타낸다.
는 다음을 만족할 때의 속도를 말한다.
즉, 의 수직한 성분에 대해 정리하자면 이다.
일반적인 장이 함께 존재할 경우[편집]
일반적인 힘 에 의한 길잡이 중심의 이동 속도는 다음과 같다.
특히 가 중력에 해당하는 경우는 ( )
일정하지 않은 자기장에 대한 운동 ( E = 0 )[편집]
사실은 자기장이 일정하지 않을 때의 운동을 다루는 것은 정확한 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에 대해서는 변하지 않으나 공간에 대한 함수로 나타낼 수 있을 때, 즉 자기장이 공간에 대해 일정하지 않을 때는 입자의 움직임이 영향 받을 수 있는 요인을 와 자기장의 휘어짐, 두 가지로 나누어 고려한다.
자기장이 직선이고 자기력선 밀도만 변할 때[편집]
자기력선이 모든 공간에서 직선이고 방향으로 자기력선의 밀도만 증가하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자기장의 기울기에 의해서 입자에 힘이 가해진다. 그 자기력을 다음과 같이 에 대한 함수로 나타낼 수 있다.
한편 자기장을 원점에서 테일러 급수로 전개하면
위 테일러 전개가 타당하기 위해서는 이어야 한다. 여기서 은 자기장의 변화가 의미가 있을만한 크기의 단위 길이를 말한다.
자기력의 크기를 회전 1회 동안 평균을 내면, 의 값이 1/2 이므로
이 자기력에 의한 길잡이 중심의 속도는 다음과 같다.
자기장이 휘어져 있을 때[편집]
자기력선의 곡률 반지름 와 의 값이 일정하다고 가정하고 입자가 받는 힘을 계산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은 한 회전 동안 자기장 방향의 속도 성분을 제곱해서 평균낸 것이다.
위 힘에 의한 길잡이 중심의 이동 속도는
유체로서의 플라스마[편집]
플라스마에서 전기장과 자기장은 내부 전하들의 움직임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내부 전하들의 움직임에 따라 만들어지는 전기장과 자기장을 계산하고 다시 그로 인해 움직이는 경로를 구해야 플라스마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시간이 변함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도 고려를 해야 한다. 이는 일반적인 전하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플라스마를 구성하는 입자들이 복잡한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면 플라스마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대략 80%의 플라스마 현상은 비교적 쉬운 방법으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유체 역학처럼 각각의 입자는 무시하고 전체의 움직임만 고려하는 것이다. 물론 플라스마에서 유체는 대전되어 있고, 입자들의 충돌이 다른 유체와 다르게 주기성이 없다는 차이가 있다.
플라스마를 유체로서 근사하자면, 플라스마를 두 개 이상의 유체로 이루어진 유체로 간주한다. 간단한 예로, 한 종류의 이온만 있는 경우 이온화 된 기체와 전자라는 두 가지 유체로 이루어진 유체로 볼 수 있다. 이때 각각은 독립적으로 서로 관통하는 유체로 고려해서 방정식을 세워 움직임을 예측한다. 부분적으로 이온화 된 경우 이온화 되지 않은 중성 기체 분자도 한 종류의 유체로 간주한다. 이온과 전자로 이루어진 유체는 서로 충돌과 전자기력에 의해 상호작용을 하며 중성 원자는 충돌로 다른 유체들과 상호작용을 한다.
플라스마 유체 운동 방정식[편집]
전자기장에 놓인 단일 입자의 운동방정식은
우선 충돌과 열 운동이 없는 상태를 가정하자. 유체를 이루는 물질들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평균 속도 는 각각의 입자의 속도 와 같을 것이다. 이를 단일 입자의 운동 방정식에 적용시키면
여기서 은 플라스마의 밀도를 말한다. 지만 이 식은 풀기 쉬운 형태가 아니다. 우변에서 미분은 입자의 위치에 대한 미분이다. 이보다는 유체의 입자들은 공간에 고정된 상태의 방정식을 푸는 것이 편하다.
변수들을 고정된 좌표계에서의 값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함수 를 생각해보자. 는 1차원에 대한 유체의 임의의 성질이다. 이를 미분하면 축의 시간에 따른 변화를 얻게 되며, 축은 유체와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체의 시간에 따른 미분과 같은 결과를 내게 된다.
우변의 첫 항은 고정된 점에서 시간에 따른 의 변화율이다. 두 번째 항은 유체와 함께 이동하는 관찰자가 보는 의 시간에 따른 변화율이다. 3차원에서 이 식을 일반화하면
에 유체 속도 를 대입하면 유체의 운동방정식은 아래와 같이 변한다.
열 운동을 고려하면 압력에 의한 항이 위 식의 우변에 추가되어야 한다. 이 힘은 입자들의 무작위 운동에 의해 일어나며 단일 입자의 운동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유체가 등방성을 갖고, 각각의 축에서 운동량의 변화는 그 축에서만 일어난다고 가정을 하면 다음 식을 얻을 수 있다.
압력 는 로 정의한다.
하지만 실제로 압력은 한 축에만 작용하지 않는다. 에서 축의 속력이 0이며 그 주변에서는 속력이 존재하고 위쪽 방향이라고 하자. 그러면 A와 B 면으로 입자들이 이동을 하면서 축에서 위쪽을 향하는 운동량을 얻게 된다. 그로 인해 전체 유체의 축 운동량은 증가하게 된다. 이런 변형력은 스칼라인 로 나타낼 수 없어 텐서 를 사용해 기술을 해야한다. 의 성분 는 로 정의하며 위 식의 는 로 대체할 수 있다.
일반적인 유체와의 비교[편집]
일반적인 유체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을 따른다.
이 식은 전자기력과 서로 다른 종류의 입자간 충돌을 제외한 경우 플라스마의 운동 방정식과 같은 형태이다. 점성에 관한 항인 은 자기장이 없는 상태에서 항과 같아진다. 즉,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과 플라스마의 운동 방정식은 전자기력에 관한 항만 빼면 같다.
플라스마를 유체로 근사할 수 있는 다른 이유는 자기장 때문이다. 자기장이 존재할 경우 자기장이 입자 사이 충돌과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전기장이 존재한다면 입자들은 가속을 하게 된다. 만약 입자가 충돌을 하게 되면 전기장 크기에 비례하는 종단 속력을 갖게 될 것이다. 자기장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플라스마가 회전을 하게 만들어 일정한 흐름을 만들어 낸다. 이런 원인으로 실제로 충돌이 없는 플라스마도 충돌을 하는 유체와 비슷한 운동을 한다. 물론 자기장에 나란한 방향으로는 입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런 경우에는 유체로 근사가 힘들다. 따라서 자기장과 수직한 경우엔 유체 이론이 좋은 근사가 된다.
연속 방정식[편집]
물질은 보존되기 때문에 라는 공간에 있는 개의 입자는 이 공간을 둘러싼 면적 를 통과하는 플럭스가 있어야 내부 입자의 양이 변하게 된다. 입자의 플럭스 밀도는 이기 때문에 발산 정리를 이용하면,
이는 어떠한 공간 V에 대해서도 성립해야 하기 때문에
와 같은 방정식을 만족한다. 이를 연속 방정식이라고 한다. 플라스마의 구성 물질에 따라 각각 다른 연속 방정식을 갖는다.
상태 방정식[편집]
열역학 방정식을 이용하면 p와 n을 연관지을 수 있다.
등온 팽창에서 는
이며 는 1이다.
유체 방정식[편집]
더 이상 단일 입자의 운동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를 대신 유체의 속도 로 나타낼 수 있다. 충돌과 점성을 고려하지 않도록 하면 유체를 나타내는 방정식들은 아래와 같다.
응용 분야[편집]
플라스마는 과 라는 변수로 특징을 지을 수 있다. 플라스마의 응용 분야는 다양한 값의 과 를 사용한다.
기체 방전[편집]
제어 열 핵융합[편집]
가속된 중수소는 핵융합 반응을 거치기 전에 산란되며 에너지를 잃어 수소 폭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이 때문에 수소폭탄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 열 에너지가 근방이 되도록 플라스마를 유지시켜야 한다. 이런 플라스마를 가열하고 보관해야 하는 문제들은 1952년 이후 플라스마 물리가 빠르게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플라스마 물리 연구는 이 문제를 푸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물질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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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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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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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지오나 강이 마지오레 호수의 이태리 부분으로 흘러 내려가는 이태리 지역 베다스카(Veddasca) 계곡의 끝자락 우측, 해발 930미터에 스위스 마을, 인데미니(Indemini)가 자리한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과, 거대한 밤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놓인, 몬테 타마로(Monte Tamaro)의 남쪽 발치에 자리한 이 전통적인 마을은 비바람에 안전한, 양지바른 장소에서 누리고 있다.
이는 스위스 쪽의 아름답게 경관을 감싸고 있는 도로가 비라(Vira)에서 시작되어 네지아 패스(Neggia Pass; 1,395m)를 너머 국경 마을(포스트 버스로 갈 수 있음)까지 이어진 1차 세계 대전의 종료 이후부터 이다. 한 때 외딴 인데미니에 사는 주민들이 농사로부터 발생되는 빈약한 소득을 밀수를 통하여 보충하였다. 이 곳 인데미니의 지역 박물관에서는 사진의 상성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은 그 시대의 이 곳 주민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좀 더 최근에는, 그런 동정심이 관광업으로 발전하여 주민들이 마을 밖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멈추게 되었다. 뜨거운 여름날, 강과 접해 있는 장소는 방문객들을 수영으로 이끌고 있다. 치즈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장에서 만들어 진다. 오늘날, 인데미니는 수 많은 별장이 들어서 있으며, 이 별장들은 석조 가옥으로 재단장 되었고, 심지어 겨울철에도 평온함과 조용함을 추구하는 자연을 사랑하는 방문객들을 끌어 들이고 있다. 이 지역은 밤을 수확할 수 있는 가을철에 특히 인기 높다.
몬테 타마로 주변의 전원 지대는 도보 여행자와 바이커 들에게 인기 있다. 인근에 위치한 네지아 고갯길(Neggia Pass)의 최정상은 해발 1,961m 타마로 정상 혹은 감바로뇨까지 단거리 걷기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작점이다. 감바로뇨에서부터, 이 곳에는 마지오레 호수와 알프스의 웅장한 경관이 자리한다; 가장 유명한 곳은, 이 지역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볼 수 있는 환상적인 파노라마 경관을 떠나서, 산타 마리아 델리 앙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 교회로, 선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에 의해 설계되었다. 아름다운 산등성이-꼭대기 걷기는 몬테 타마로(Monte Tamaro)에서 몬테 레마(Monte Lema; 말칸토네(Malcantone)지역의 밀리엘리아(Miglieglia)에서 케이블카 탑승하여 이동)까지 이어진다.
하이라이트
- 그림 같은 마을 – 지역에서 나는 회색 편마암으로 지어진 석조 가옥들이 있으며, 인데미니의 외형은 지극히 훼손되지 않았다.
- 몬테 타마로(Monte Tamaro) – 알페 디 네지아(Alpe di Neggia; 혹은 제네리 패스에서부터 케이블-카를 탑승)로부터 시작하여 약 1.5시간 걷기. 마리오 보타에 의해 설계된 산타 마리아 델리 앙젤리 교회는 알페 포파(Alpe Foppa)인근에 위치.
- 몬테 타마로부터 몬테 레마까지 고산 지대 걷기 – 티치노 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알프스의 구릉지의 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최상의 산 길 중의 하나.
- 산타나 패스(Sant’Anna Pass)의 작은 교회당 – 마지오레 호수 너머 역사적 패스에서, 은둔자의 수도실이 여전히 도보 여행자에 의해 쉼터처럼 이용되는 작은 교회당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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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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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트(아랍어: زَكَاة)는 사다카트와 더불어 경건의 징표로 하는 희사이며 이슬람 교도의 기본적인 의무 중 하나로 되어 있다. 무함마드 시대에 이슬람교단에 가입하는 조건의 하나로, 《꾸란》에서는 메디나기(期)에 구빈세로서 신도의 재산이나 수입에 부과된제도로 되었다. 그러나 세금이라기보다는 신에 대한 채권이라고 여겨 언젠가는 신이 이를 몇 배로 갚아주리라고 생각하였다. 부(富)는 구제의 방해물이며 자카트는 공덕(功德)이라는 생각이 기본적인 것이었다.
|이 글은 종교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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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상흔 고스란히 간직한 천혜 비경.... 50여 년 사람 발길 닿지 않은 두타연 생태탐방로... 금강산 향하는 길목에서 '평화의 바람' 마무리
#금지된 땅 DMZ 비경 '두타연'을 만나다
누구 앞에나 길이 놓이지만, 그 길이 늘 매력적인 건 아니다. 심심하고 지루한 길이 이어지기도 하고, 예기치 않게 험로를 걸어야 하는 때도 있다.
2012 세계 평화의 바람 5일차 여정의 막을 올리는 '두타연(頭陀淵)' 길은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천혜 비경을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길이다.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건솔리 두타연을 관통하는 18㎞다.
길은 양구군 홍보대사인 배우 소지섭 갤러리로 꾸며진 백석산 전투기념관에서 시작된다. 기념관을 시작으로 이목정대대→이목교→위령비→두타연→취수장→비득고개→월운리까지다. 2003년 개방되기까지 반세기 동안 입산 제한조치로 사람 발길을 허용하지 않았던 길과 절경이 하나둘 펼쳐진다. 곳곳에 도사린 '지뢰'라는 붉은 푯말과 녹슨 철모ㆍ수통ㆍ포탄 파편ㆍ철조망 등이 동족상잔의 아픈 흔적을 상처로 드러낸다.
그러나 발길을 자연 속으로 계속 몰아넣으면, 그제야 밝고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자연의 길로 접어든다. 세속에선 볼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자연의 빛나는 속살이 생태탐방로라는 이름으로 빼꼼 드러난다. 눈이 닿는 곳마다 손때를 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하늘댄다.
|▲ 세계 평화의 바람 순례를 위한 답사단이 두타연 평화누리길 노선을 살펴보고 있다.|
두타연은 그 한복판에 있다. 금강산에서 흘러온 물은 두타연으로 스며들고, 물길을 따라 북한강으로 빠져나간다. 천연기념물인 열목어 국내 최대 서식지이기도 하다. 높이 12m계곡물이 떨어지는 폭포 아래에 형성된 두타연은 두 개의 큰 바위를 중심으로 연이은 바위들이 병풍을 두른 듯하다. 동쪽 바위 암벽엔 9.9㎡(3평) 남짓한 보덕굴이 있는데 바닥에는 머리빗과 말구박이 반석 위에 찍혀 있다는 수행처다.
1000년간 이 땅을 지킨 백석산 두타사는 일제강점기에 없어지고, 절 이름에서 따온 두타연만 남았다. 그 18㎞ 중에서 평화의 바람 순례단이 걷는 길은 초소에서 생태탐방로를 거쳐 두타연→하야교→비득고개→초소에 이르는 13.7㎞다.
답사단을 안내한 조효제(44) 문화해설사는 "50여 년간 입산제한으로 공개되지 않았던 두타연 생태탐방로는 비경도 비경이지만 단순한 유흥지가 아니라 전쟁의 상처와 안보를 먼저 생각하고 걸어야 하는 길이다"고 강조한다.
두타연 순례를 마치면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자연을 파괴하는 현장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인간 탐욕이 불러온 결과와 함께 환경파괴에 대한 자연의 대응을 성찰하는 기회를 갖는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통일'을 기원하다
6일차 마지막 순례는 DMZ박물관을 관람하고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여정이다.
동해안 최북단,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DMZ박물관에서 평화의 바람 순례단은 6박 7일 일정의 대미를 장식한다.
민통선 북쪽에 위치,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출입신고와 안보교육을 이수한 뒤 출입해야 하는 DMZ박물관에서 순례단은 지난 5일간 걸었던 DMZ여정과 분단의 아픔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는다.
|▲ 평화의 바람 순례 답사단이 DMZ박물관 경내에 재현된 휴전선 생태관광 야외전시장을 걷고 있다. |
DMZ박물관은 특히 한국전쟁 발발 전후 역사와 휴전협정으로 탄생한 DMZ가 갖는 의미, 60여 년간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 원형 그대로 보존된 생태환경을 영상물과 전시물로 확인하는 자리다. 박물관은 특히 8ㆍ15해방과 6ㆍ25전쟁으로 이어지는 당시 한반도 시대상과 DMZ의 탄생과정을 재현한다.
이어 정전협정 이후 계속되는 남북간 군사적 대치와 긴장상황, 지울 수 없는 전쟁의 아픈 상처와 유산들을 보여주고,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채 서서히 되살아난 생태의 보고 DMZ도 총체적으로 보고 느끼고 체험케 한다.
2010년 동부전선에서 철거된 비무장지대 철책과 DMZ 지형을 정원으로 만든 생태저류지, 휴전선 생태를 재현한 야생화동산 등도 함께 관람한다. 2012 평화의 바람 순례단은 DMZ박물관을 통해 순례자들이 순례를 최종 정리하는 시간도 마련한다.
순례는 금강산과 해금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일전망대에서 마무리된다. 1층 전시관을 거쳐 2층 실내외 전망대에서 분단상황을 지켜본 뒤 성모상 앞에서 통일 기도회도 가질 계획이다.
끝으로 순례단은 송지호 오토캠핑장에서 '평화를 즐기다'를 주제로 작은 평화 콘서트와 함께 평화의 꿈을 심는 '평화의 나무(Peace Tree)' 작품을 설치하는 퍼포먼스를 갖고 이튿날 출발지인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본부장 정세덕 신부는 "우리 청소년들이 해외 분쟁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분단의 상징 DMZ를 걸으며 평화를 위한 연대를 생각해보는 의미 있는 순례가 될 것"이라며 "DMZ에서 역설적으로 평화라는 가치를 나누고 평화를 위해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해보자"고 말했다.
오세택 기자 email@exam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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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찬란한‘가야’이젠‘四國시대’다
가야가 되살아났다. 한국의 고대사가 온전해졌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가 아니라 가야가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 ‘사국시대’로서 고대사가 우리에게 성큼 다가선다. 학술적 성과나 의미를 떠나 책을 본 소감은 한마디로 ‘가야가
보인다’는 것. 가야가 집대성되면서 가야사의 큰 줄기가 그려진다. “지금까지 없었던 것처럼 향후 몇년간은 이런 역작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출판기획자의 당당한 주장이 빈 말이 아닌 듯하다.
저자는 평생 가야연구에 매달려온 김태식 교수(홍익대). ‘김가야’라는 별명까지 붙은 저자가 그동안의 가야 관련자료,
학계의 연구성과를 모두 집대성해 내놓은 역작이다. 책의 성격상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가야를 일반대중에게도
알리겠다며 쉽게 풀어쓴 저자의 노력이 듬뿍 느껴진다.
#가려지고 소외받은 1,500년
가야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언뜻 금관가야·아라가야·대가야 등 특이한 이름이 떠오른다. 또 일제 식민사학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 가야금과 우륵, 수로왕 탄생신화와 왕비 허왕후의 설화가 생각난다. 좀더 나아가면 뛰어난 제철기술로
‘철(鐵)의 왕국’이었고, 김유신 장군이 가야 후손이라는 정도다. 같은 시대 고구려·백제·신라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다.
삼국과 달리 가야는 왜 우리와 멀어졌을까. 저자는 가야의 소외사를 곳곳에서 밝힌다. 우선 문헌사료의 부족. 역사라는
게 문헌사료와 고고학적 유물이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번듯한 중앙집권 국가를 완성치 못하고 멸망(562년)하다보니 남아있는
문헌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있는 ‘삼국사기’도 승자인 신라의 역사관으로 가야는 뒷전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고착된
‘삼국시대’ 논리가 가야를 죽였다”고 말한다. 일제 강점기에 강요된 식민사학도 ‘가야 죽이기’의 주범이다. 가야는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역사의 지평을 넓히면서 제 위치를 찾는 듯했다. 그러나 실학자들의 성과가 무르익기도 전에 일제가 등장,
식민사학이 우리를 지배한다.
369년부터 562년까지 200여년간 고대 왜(倭)가 가야지역을 정벌,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남한지역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곧 가야사의 삭제와 왜곡, 축소을 의미했다. 물론 지금도 백제, 신라 중심의 연구가 이어지는 게 현실.
저자는 이런 악조건들을 정면 돌파한다.
#이젠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다
세권의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흐름은 우리의 고대사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가 아니라 가야가 포함된
‘사국시대’라는 것. 한마디로 가야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독자적이고 수준높은 문화를 영위했으며,
가야를 빼고는 우리 고대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기존의 삼국이 한반도를 셋으로 나눠 유지된 기간은 가야가
망한 562년부터 660년 삼국통일 때까지 불과 98년간이다. “여전히 삼국시대를 고집한다면 시간적으로 그 전에 있었던
1,000년여의 우리 고대사는 어떻게 설명하느냐”. 저자는 따라서 가야사를 700년으로 잡는다. 고구려·백제가 정세를
주도하고, 신라와 가야연맹이 한 자리씩을 차지한 형태다.
가야의 최대 영토도 경상도 서쪽 절반과 전라도 동쪽 절반. 고구려보다는 작지만 백제·신라에 비하면 손색이 없다. 남한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가야의 후예인 셈. 가야가 과연 백제·신라에 치이고, 왜에 눌린 약하기만 했던 세력인가. 아니다.
비록 미완의 문명이었지만 소국들의 생산력 및 기술·문화수준은 높았다. 가야 사람들이 왜로 건너가 일본 고대문명 성립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일본 내에서도 일부 인정할 정도다. 임나일본부는 가야연맹이 백제·신라로부터의 위협에 처했을 때 지금의
함안지역에 위치한 안라국의 세력을 도와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저자는 이런 주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1970년대 이후 이뤄진 가야와 관련된 고고학적 유물사료들을 정리해 내놓았다.
토기 한 귀퉁이에 남은 흔적, 칼·돌에 새겨진 금석문 등 발품과 정성을 들인 유물자료들은 부족한 문헌사료를 극복한다.
신라·백제·왜 등 주변지역 유물까지 살펴 가야의 전체적인 발전추세를 그려낸다. 가야의 유물은 백제·신라지역 출토 유물들과
비교할 때 질·양적인 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다. 물론 고대 왜나 백제·신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도
없다. 가야는 오히려 최첨단의 제철기술, 수준높은 토기문화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뤘다.
#땀냄새 나는 책
이 책은 모두 3부작이다. 1권은 가야의 시대사로 고대사에서 가야가 차지하는 위치, 성립에서부터 멸망까지, 유민들의
일대기를 담았다. 2권은 정치·경제·사회구조 및 사상, 대외관계 등을 다룬 분류사, 3권은 30개 소국들의 역사를
설명한다. 저자는 독자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직접 그린 관련 지도만도 58장을 실었다. 가야가 여러 소국들로 이뤄진
연맹체이고, 소국들마다 겪는 복잡한 변화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지도가 제격이다. 또 100여권에 이르는 발굴보고서, 도록
등에서 발췌·편집한 유물·유적 실측도 111장, 직접 현장을 찾아 촬영한 사진 254장도 담았다. 시각자료를 정리하는 데만
1년반, 편집작업에 1년여가 걸린 것이 말해주듯 시각자료들만 쭉 훑어도 가야문화의 특징이 얼추 짐작된다.
어쩌면 이제야 가야라는 묘종이 심어진 게 아닌가 싶다. 앞으로 학계는 물론 보통사람들의 관심이 있다면 가야는 수많은
가지가 뻗어날 것이고, 그 가지가지마다에 많은 열매가 맺어지지 않을까. 모두의 보살핌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 고대사의
보다 온전한 부활을 위해.
▲‘김가야’별칭 김태식 교수…“잃어버린 고대사를 되찾고 싶었다”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를 낸 김태식 교수(46)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야의 참모습을 알려 우리가 잃어버린
고대사의 한 부분을 되찾고 싶었다”고 집필 이유를 들었다. 가야연구에 매달린 지 23년으로 ‘김가야’라 불리는 김교수는
e메일 ID도 ‘kayakim’이라 쓸 정도로 가야에 대한 애정이 깊다.
-책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나.
“1970년대 이후 고고학적 유물들이 많이 나오면서 가야연구의 성과가 조금씩 쌓였다. 그러나 그 성과들이 밖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아 몹시 안타까웠다. 그동안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가야의 참모습을 전하고 싶었다. 비전문가들도 고대사를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로서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좀 어렵지 않나.
“쉽게 쓰려고 애를 많이 썼다. 연구 업적도 중요하지만 타인에게 가야를 알리는 것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전문용어가 처음 나올 때는 해설을 붙였고, 어려운 용어의 한글화 작업도 했다. 학생들에게 먼저 원고를 읽혀 어려운 것들은
쉽게 풀어쓸 정도였다”
-학술적으로 상반된 의견이 나올 수도 있지 않나.
“당연히 있을 수 있다. 가야에 관한 자료가 부족하다보니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학계에서의 반론이나
이견은 결국 보다 올바른 역사서술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겠나”
-아쉬운 점은.
“가야와 관련된 일본 자료를 더 충분히 못본 것 같아 가장 아쉽다. 일본 자료들을 검토하는 것이 가야의 본 모습을
살피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 본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할 생각이다”
/도재기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최종 편집: 2002년 04월 12일
18: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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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
다시 말해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는 순수 텍스트 파일 형태로 데이터를 저장한 데이터베이스를 일컫는다.
목차
플랫 파일[편집]
일반적으로 플랫 파일은 내부 한 줄마다 레코드 하나씩을 기록한다.
플랫 파일 내에는 구조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플랫 파일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와 같이 복잡한 모델이 아니라 종이 한 장 같은 ‘정형화’된 데이터를 가질 뿐이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 적은 개수의 필드로 구성된 주소록 같은 것이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의 대표적인 예이다. 열과 행으로 이루어진 HTML 테이블도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의 좋은 예이다. 이처럼 명시적으로 ‘데이터베이스’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는 일상 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구현[편집]
역사상의 구현[편집]
컴퓨팅 기기는 처음에는 단순한 데이터베이스를 구현하기 위해 쓰였다. 당시 허먼 홀러리스는 이름, 나이 등의 (미국) 주민 정보 하나가 숫자 및 문자를 이루면서도 길이가 정확히 80인 문자열 하나로 표현되도록 설정해야 했다. 각 주민의 성명이 길이를 똑같이 맞추기 위하여 공백을 채워야 했다. 그러면 데이터베이스 필드의 줄이 제대로 정렬되었다. 허먼 홀러리스는 미국 통계청에 이 아이디어와 이에 대한 기기, 천공 카드 등을 팔았고 실제로 주민 정보가 미국 통계청에서 이러한 수단을 써서 기록/수집된 바 있다. 1890년의 인구 조사는 최초의 전산화된 데이터베이스였다. – 실질적으로는 수천 개의 천공 카드를 담은 상자들이기도 하였다.
제 2 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정부 기관이나 민간기업은 여러 해에 걸쳐 초창기 컴퓨터를 운용하였다. 이 컴퓨터들은 종종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를 구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급여 계산 등 회계 분야에 쓰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당시 엄청나게 비쌌던 컴퓨터를 효율적으로 쓰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고 이를 계기로 초창기 관계형 데이터베이스가 탄생하였다. 놀랍게도 초창기 응용들은 천공 카드의 원래의 디자인을 조금 바꾸고는 천공 카드를 계속 사용하였다. 홀러리스의 기업은 성장하여 컴퓨터 업계의 거인 IBM이 되었다. 이 회사는 당시 시장 전반을 지배하였다. 고정된 길이의 필드를 갖고 80-열 천공 카드로 운영되는 데이터베이스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는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매킨토시와 도스 상에서 ‘설정 가능한’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 응용 프로그램은 인기였다. 이 응용 프로그램은 개인 사용자가 각자가 사용할 데이터베이스를 디자인하는 것을 쉽게 해주었다. 이는 워드 프로세서나 스프레드시트의 인기에 버금갔다. 파일메이커의 초창기 버전, PC-파일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약간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기능을 제공했다. 파일 간 데이터 공유와 비슷한 기능이었다.
오늘날의 구현[편집]
최근에는 사용자가 일반적인 용도의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수 있게 해 주는 프로그램은 있기는 하지만 그 수가 적다. 마이크로소프트 웍스(초창기 윈도 버전에만 들어있다.) 애플웍스, 클라리스웍스(윈도 및 매킨토시 용) 등에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가 구현되어 있다. 볼랜드의 파라독스,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 같은 것들도 있는데 이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기능도 제공하면서 내장 프로그래밍 언어 기능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MySQL이나 오라클 DBMS 같은 데이터베이스 매니지먼트 시스템(DBMS)들은 프로그래머가 응용을 직접 개발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응용 프로그램이 설정 파일 같은 것을 저장하기 위해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를 널리 사용한다. 많은 응용 프로그램이 플랫 파일에서 사용자들 고유의 정보를 얻어올 수 있도록 미리 정의된 필드를 사용한 플랫 파일을 제공한다. 작은 크기의 도서 관리 프로그램이나 일정 관리 프로그램, 특히 주소록 프로그램 등은 플랫 파일을 빈번히 이용하기도 한다. XML은 일반 텍스트 파일에 데이터를 저장할 때 쓰이는 매우 인기 있는 포맷이다. 하지만 XML에는 복잡하고도 많이 포개어진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XML을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로 분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용어[편집]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라는 용어에는 크게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로 나뉘어 쓰인다. 사람들은 좁은 의미로쓰기도 하는데 좁은 의미로 쓰는 것이 데이터베이스 이론에 알맞은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넓은 의미로 많이 쓴다.
좁은 의미에서 “플랫 파일 데이터 베이스”는 데이터와 구분자만 갖고 있는 것을 일컫는다. 넓은 의미에서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는 열과 행의 형태를 가진 것으로서 테이블 구조 외에는 관계나 링크 같은 것들이 없는 단일 파일로 존재하는 데이터베이스를 일컫는다.
도구마다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지만 개념은 같다. 이를테면 파일메이커(FileMaker)는 "Find"(찾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MySQL은 "Query"(조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들의 개념은 동일하다. 파일메이커는 "files"(파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MySQL은 "tables"(테이블)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들의 개념도 동일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용어인 "레코드"와 "필드"는 거의 모든 데이터베이스 구현에서 쓰이고 있다.
예제 데이터베이스[편집]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의 예제이다. 데이터는 행과 열로 조직되어 표 형식으로 표시된다.
이 예제에는 한 개의 테이블이 있다.
열은 - 이름 (사람 이름, 두 번째 열); 등급 (위키백과 사용자 등급, 세 번째 열); 고유 아이디, (레코드를 고유하게 식별하는 수) - 세 개를 갖고 있다고 가정하자.
앞에서 말한 데이터의 텍스트 표현이다.
아이디 이름 등급 1 철수 관리자 2 영희 관리자 3 찬희 일반사용자 4 길동 일반사용자 5 홍련 일반사용자 6 민희 관리자 7 길수 일반사용자 8 형구 일반사용자
이런 식의 데이터 표현은 플랫 파일 데이터베이스 분야에서 자주 쓰인다. 약간의 추가적인 고려 사항이 있다.
- 데이터 형:(Data Types) 테이블의 각 열은 소정의 데이터 형으로 제한된다. 이러한 데이터 형의 제한은 보통 관례를 따른다. 또한 이러한 제한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으로 데이터를 변환하고자 하지 않는 이상 공식적으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 분리된 열: 위에서 언급한 예제에서는 각 열은 공백 문자로써 구분되었다. 이 방법은 들여쓰기(indentation) 또는 “고정 길이” 데이터 형식 지정이라고 한다. 다른 관례는 구분자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방식도 꽤 많이 있다. (이를테면 쉼표-분리 값, 구분자-분리 값, 마크업 언어, 프로그래밍 언어 같은 것들이다.)
- 관계 대수: 위에서 제시한 예제의 각 레코드(행)은 관계 대수 분야에서 정의하고 있는 튜플의 정의에 들어맞는다. (위에서 제시한 예제는 3-튜플 한 벌을 표현하고 있다. ). 게다가 첫 번째 행은 각 행의 값과 관계된 필드 이름을 규정하고 있다.
- 데이터베이스 매니지먼트 시스템: 일반적으로 텍스트 파일에 대한 조작은 많은 면에서 제한되어 있다. 위에 언급한 예제를 그대로 옮기기는 어려우므로 데이터는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으로 이동하기 전에 중간 형태의 표현으로 바뀌기도 한다.
플랫 파일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스토리지 모델[편집]
첫 번째 파일
파일-오프셋 아이디 성명 등급 0x00 8 형구 일반사용자 0x13 1 철수 관리자 0x27 3 찬희 일반사용자 0x3B 4 길동 일반사용자 0x4F 5 홍련 일반사용자 0x62 7 길수 일반사용자 0x76 6 민희 관리자 0x8A 2 영희 관리자
파일 오프셋은 실질적으로는 데이터베이스의 일부가 아니다.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두 번째 파일
등급 모임장소 관리자 광화문 앞 일반사용자 동대문운동장
위와 같은 예제를 보면 플랫 파일은 현대적인 관계형 데이터베이스의 데이터 저장소 역할을 할 수 있다.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인덱스(색인), 검색 제한(콘스트레인트), 트리거(trigger), 외부 키 관계, 단편화 계획, 중복화 계획 및 분산된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개념 등을 이러한 플랫 파일들에 담아두기만 해도 훌륭히 데이터베이스로서 동작할 수 있다.
첫 번째 파일에 대한 성명 필드의 인덱스의 예[편집]
인덱스의 예는 다음과 같다.
0x00000013 0x0000008A 0x00000027 0x0000003B 0x0000004F 0x00000076 0x00000062 0x00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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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상사화|
|생물 분류|
|학명|
|Lycoris squamigera
Maxim. 1855
상사화(相思花)는 수선화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학명은 Lycoris squamigera이다.
꽃줄기의 높이는 약 60cm, 땅속의 비늘줄기는 둥글고 껍질은 흑갈색에 수염뿌리가 있으며, 잎은 넓은 선형이다. 여름에 연붉은 자줏빛의 깔때기 모양으로 된 꽃이 산형꽃차례로 피는데, 꽃덮이(화피)는 여섯 조각이다. 꽃이 필 때에는 잎은 이미 말라서 꽃과 잎이 서로 보지 못한다고 하여 상사화라 이름 지었다. 산과 들에 나는데, 한국 각지와 일본, 중국에 분포한다. 관상용으로 정원에 가꾸기도 한다.
문학 속의 상사화[편집]
상사화 잎은 광분하듯 무성하게 솟구친다.
빈 손아귀, 어느날 또 흔적없이 사라져버린다.
봄날의 한복판을,
뒷덜미를 덮쳤다, 놓친다.
...
— 문인수.〈기린〉,《배꼽》(창비, 2008)
바깥 고리[편집]
|이 글은 아스파라거스목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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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 김태룡 국가태풍센터장은 “태풍이 한반도나 일본 어디를 향할 것인지는 하루 이틀 더 지켜봐야 한다”며 “9월에도 한반도에 태풍이 상륙한 사례가 많기 때문에 한반도로 접근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산바가 한반도로 향할 경우 17~18일께 한반도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최근 30년 동안 9월에 발생한 태풍은 연평균 4.9개이며 이 가운데 0.7개가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9월 태풍으로는 1959년 사라, 2003년 매미와 2007년 나리 등이 있다. 2010년 9월 2일에도 태풍 곤파스가 강화도에 상륙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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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리
|송사리|
|생물 분류|
|학명|
|Oryzias latipes
Temminck & Schlegel, 1846
송사리는 동갈치목 송사리과의 민물고기이다. 몸길이는 4~5 cm 가량이며, 민물과 바닷물 양 쪽에서 모두 살 수 있을만큼 강한 적응력을 갖고 있다. 송사리는 실지렁이, 장구벌레(모기의 유충), 물벼룩등을 잡아먹으며, 특히 모기의 유충인 장구벌레의 훌륭한 천적이다. 송사리는 짧은 수명과 뛰어난 번식력을 가지고 있으며 키우기가 쉬워 모델 생물로 주로 쓰인다. 노린재목의 수생곤충인 게아제비, 백로, 잠자리의 애벌레, 물방개 등 천적이 많기 때문에, 무리지어서 생활한다.
바깥고리[편집]
|이 글은 물고기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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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리-조세 페레크(프랑스어: Marie-José Perec, 1968년 5월 9일 ~ )는 프랑스의 단거리 육상 선수로, 200m와 400m를 전문적으로 활약하며 하계 올림픽 3관왕이다.
과들루프 섬의 바스테르에서 태어나 후에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1991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400m를 우승하고, 4년 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200m에도 들어가 마이클 존슨같이 200m/400m 2개의 금메달을 석권하였다. 거기서 400m 올림픽 기록 48.25초를 세웠다.
페레크는 또한 1994년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400m와 1600m 릴레이를 우승하기도 하였다.
애틀랜타 올림픽 타이틀이 그녀의 마지막 국제 타이틀이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위해 시드니에 도착한 이래 오스트레일리아의 보도진들에 의하여 괴롭힘을 당한 이유로 시합에 출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모나코에 기지를 둔 국제기구 평화와 스포츠에 의하여 창설된 "평화를 위한 우승자"의 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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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류
층류(laminar flow)란 유체가 평행한 층을 이루어 흐르며, 이 층 사이가 붕괴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유체 동역학(fluid dynamics)에서는, 유체가 모멘텀 확산(diffusion)이 높고, 모멘텀 대류(convection)가 낮으며, 압력 및 속도가 시간에 무관한 유동을 층류라고 한다. 이 용어는 난류(turbulent flow)와 반대되는 용어이다.
예를 들어, 항공기의 날개 주위를 흐르는 공기 유동을 생각해 보자. 날개의 표면에는 경계층(boundary layer)이라고 부르는 아주 얇은 공기의 층이 형성된다. 공기는 점성이 있기 때문에, 이 경계층은 날개에 부착되어 있게 된다. 날개가 공기 중에서 앞으로 전진할 때, 경계층은 최초에는 날개의 유선(stream line) 형상을 따라 흐르게 된다. 바로 이러한 유동을 층류라고 하며, 이러한 경우의 경계층을 층류 경계층(laminar layer)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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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섬
|발리|
|Bali|
|• 별명: 신들의 섬|
|좌표||좌표:|
|행정|
|나라||인도네시아|
|지역||덴파사 (주도)|
|행정구역||발리 주|
|지역어||발리어 89%
자바어 7%
|인구|
|인구||3,891,428 명 (2010년)|
|인구밀도||690.8 명/km2|
|지리|
|면적||5,632.86 km2|
|기타|
|시간대||GMT+8|
|웹사이트||http://www.baliprov.go.id|
목차
- 1 역사
- 2 지리
- 3 행정
- 4 사람
- 5 문화
- 6 관광
- 7 교통
- 8 치안
- 9 주석
- 10 바깥 고리
역사[편집]
선사 시대[편집]
4 세기에 들어서면서 힌두교에 속하는 자바 사람들이 건너와 살게되었고, 힌두 자바 시대를 맞아 그 초기부터 자바 왕의 지배 하에 발전을 계속했다. 그리고 913년 무렵에, 드디어 스리 케사리 와르마데와(Sri Kesari Warmadewa)를 통해 자신의 와르마데와 왕조가 세워졌다고 한다.
자바 왕조(11~ 16세기)[편집]
11 세기에 들어가면 발리의 왕조는 동 자바의 쿠디리 왕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게 된다. 스박크 등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는 전통적인 문화, 관습의 기원은 적어도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카얀간 티가 사원의 건립은 현재 자바에서 건너온 힌두 승려 쿠트란이 확장하였다. 1248년, 쿠디리 왕국을 멸망시킨 자바 신가사리 왕국의 쿠루타나가라 왕의 군대에 정복되어 복속을 당하였다. 8년 후, 바로 그 신가사리 왕조(Kerajaan Singhasari)는 새로운 마자파힛 왕조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에, 다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16세기에 마쟈파힛 왕국이 이슬람 세력의 침입에 의해 쇠망하면서, 왕국의 신하들, 승려, 공예사들이 발리에 피난을 오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에 의해서 고전 문학이나 그림자극, 음악이나 조각 등 힌두 자바의 영향을 받은 문화가 꽃 피었다. 또, 자바에서 건너온 힌두의 고승 ‘댄 할 니라르타’가 《타나 롯 사원》이나 《울루와뚜 사원》 등 수많은 사원을 건립하는 등, 종교 측면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군웅할거 시대(17~19세기)[편집]
그러나 젤젤 왕국의 황금 시대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1651년, 신하의 반란으로 인해 젤젤 왕이 클룽쿵(Klungkung, 현재 세마라프라)으로 천도하면서 실권은 각 지역에 거점을 둔 귀족가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리고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각지의 귀족은 자신이 마자파힛 정복기의 정통 귀족(특히 힌두교 고승 와오라오)임을 자칭하면서, 클룽쿵 왕국은 다른 7개의 작은 나라(타바난 왕국, 바둔 왕국, 기아나루 왕국, 카란가스무 왕국, 반리 왕국, 문위 왕국)로 나뉘게 되었고, 발리는 군웅할거의 시대를 맞게 된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비롯한 유럽 세력의 진출이 시작되었지만, 별다른 특산품 없었던 발리는 식민지 통치의 관심지역에서 벗어나 각 지역의 왕족 지배에 의한 자치가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참고로, 발리에 처음 도착한 유럽인은 1597년 네덜란드 상선 대원이었다).
네덜란드 식민 지배와 발리 르네상스[편집]
19세기 말이 되면서 당시의 불어닥친 제국주의 열풍의 유행 아래서 네덜란드가 발리의 식민지화를 추진하여, 각 지역의 왕가를 무력으로 정복하였다. 먼저 1846년 발리 쪽의 난파선을 끌어올린다는 요청을 빌미로, 발리 동북에 군대를 상륙시켜 부레렝(Buleleng)과 젬브라나(Jembrana)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침공을 진행하여, 1908년에는 마지막 남은 클룽쿵 왕국을 멸망시키고, 발리 전체를 식민지화 시켰다. 그러나 이때 발리 왕족, 귀족들이 보였주었던 ‘뿌뿌탄’(Puputan, 무저항 대량 자결)으로 네덜란드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고,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현지 전통 문화를 보전하는 정책을 내놓게 된다.
이 전통 문화 보호 정책에 큰 영향을 준 것이 1917년 발리섬 남부 지진 이후에 닥친 재앙이다. 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부상자는 1000명을 넘었고, 다음 해 1918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독감이 발리에도 퍼졌으며, 1919년 발리 남부에 생쥐가 대량으로 발생해 곡물 수확량이 격감 하였다. 이런 역경을 두고 당시 발리 사람들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신들에 대한 의례를 다하지 않았던 신들의 진노로 받아들였다. 이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바론의 행진’과 ‘상향 드다리’(Sanghyang Dedari, 빙의 무용)가 성행하게 되고, 주술적인 의례, 놀이 활동이 발리에서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현상을 네덜란드 사람들은 발리의 전통 문화로 이해하고, 재해 복구와 함께 보호를 진행한 것이다. 특히 부흥 계획의 중심 인물이었던 건축가 모엔은 발리의 진정한 전통 문화의 존재를 믿고, 지진 이전 발리가 중국 문화와 유럽 문화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문제 삼았고, 이러한 "실수"를 부흥의 과정에서 배제하려하였지만, 결국 그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위와 같은 네덜란드의 문화보호 정책을 배경으로 발리는 "마지막 낙원"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반신 누드 부녀" 그림과 함께 서양에 소개되었다. 특히 그레고르 클라우제의 발리 사진 컬렉션에 매료된 서양 예술가들이 섬으로 오게 되었다. (1924년 바타비아 - 싱아라자 간의 정기선 취항이 시작되었다). 1932년에 발리를 방문한 찰리 채플린은 "발리 행을 결정한 것은 형 시드니였다. 이 섬은 아직 문명의 손길이 미치고 있지 않고, 섬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는 이런 이야기가 나의 관심을 자아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이전의 관광객 수는 1920년대에는 연간 1,200 - 3,000명 정도였으나, 1930년대 중반에는 연간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통계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서양인의 영향을 받아 1930년대 발리는 "발리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 현재의 관광 중심이 된 음악 (가믈란 등), 무용 (레공, 께짝 등), 회화의 양식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중심에 있던 것은 우붓의 영주였던 ‘초코르다 스카와티’ 일족에 초대받은 독일인 화가이자, 음악가인 발터 스피스(Walter Spies)이다. 그의 집으로 멕시코의 화가 미겔 코바루비어스(Miguel Covarrubias)나 캐나다의 음악 연구가 콜린 맥피(Colin McPhee), 인류 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 오스트리아 작가 비키이 바움(Vicki Baum) 등이 모였다. 그들은 대체로 "진정한 발리"를 지향하여 "발리의 발리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또한 네덜란드는 계급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각 지역의 왕족을 통한 간접 지배를 하였다. 관개 도로 등 농업 시설을 정리하고, 아편이나 커피 등의 상업 작물의 재배를 장려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풍속을 개혁하여 나신을 금지시키는 등 유럽적인 근대화 정책도 실시했다. 또한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격차가 강조되는 반면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는 등 평민 사이의 신분 차이가 줄어들어 "평등한 촌락 사회"라는 특성이 자리 잡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독립[편집]
1942년 2월, 일본군이 발리를 침공하였다. 네덜란드 군이 주둔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에 거의 피해없이 발리 해전에서 승리했고 불과 20일만에 네덜란드 군은 항복했다. 처음에는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고 반겼지만,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와 다를 바가 없었고, 전쟁으로 인한 현지인들의 징발로 인해 불만이 증폭되었다. 그 당시 육군 장교였던 구스티 응우라 라이는 발리인들과 함께 자유군을 결성했다. 1944년 중반에 자바와 연계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고, 같은 해 9월, 인도네시아 독립을 용인하는 코이소 성명이 발표되었고, 1945년 4월 수카르노가 발리에 찾아와 인도네시아 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하였다. 민족 단합의 기운이 갑자기 높아지면서 7월에 "소순다 건국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하자, 네덜란드는 빠르게 발리로 돌아왔다. 1945년 8월 17일, 자카르타에서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소순다 국가"로 발리에서는 친공화국 파에 의한 통치 체제의 확립이 기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의 구체제의 붕괴가 진행되지 않고, 1946년 3월 다시 네덜란드가 상륙을 하자, 친공화국 파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네덜란드가 상륙하자 격렬한 게릴라전이 전개되었고, 절정에 달했던 1946년 11월 20일, 발리 서쪽 마루가에서, 구스티 응우라 라이 중령이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그가 이끌었던 게릴라 부대도 전멸했다(그러나 그 이름은 오늘날 발리 관문인 응우라라이 공항(덴파사 국제공항 현지 정식 명칭)에 남게 되었다. 또한 이때는 본국에 귀국하지 못하고, 잔류하였던 일본군도 가세하였다. 이들 중에는 학도병으로 징병된 조선인 "양칠성"도 있었으며, 그는 1975년 11월 인도네시아의 가릇 영웅묘지에 독립영웅으로 안장되었다.[1]
이 게릴라전을 진압한 네덜란드는 1946년 12월 발리를 네덜란드가 직접 다스리는 "동인도네시아 국가"에 귀속, 자치령으로 선언하고 구체제를 이용한 네덜란드 의한 간접 통치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공화국파와 친네덜란드파의 항쟁은 이어져 1949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주권 이양을 한 후 공화국파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고 1950년 독립을 성취하였다. 결국 발리는 공화국으로 통합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수카르노 시대의 발리 사회는 매우 혼란하였고,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의 정치적인 대립이 지역 사회에까지 이르렀다. 1965년의 9월 30일 사건을 발단으로 공산당 토벌하였고, 일설에 의하면 발리에서만 10만명이 학살되었다고 전한다.[2]
수하르토 정권[편집]
수하르토의 개발 독재 시대에 들어가면서 발리는 간신히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의 세심한 배려의 하에 외화 획득을 목표로 하는 관광 개발이 시작되었고, 1970년대 이후 세계적인 관광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누르와 꾸따는 비계획적인 개발이 진행되어 인프라 면에서도 큰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자카르타 중앙 정부는 새로운 누사두아 패키지 형식의 고급 리조트를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오일 쇼크 등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인해 개발이 진행되지 않았고, 1983년에 불과 450개의 객실로 누사두아 해변이 개장되었다. 그런데 누사두아는 세계 유수의 호텔이 즐비하게 늘어선 리조트로 발전해 간다.
이렇게 발리의 관광 개발은 오랫동안 중앙 정부 주도로 진행되었고, 관광 관련 세수의 대부분을 중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현지 사람들은 이 같은 중앙 정부 주도의 "만들어진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로 자신의 전통 가치에 대한 자각을 하면서, 획일적인 이미지와 관광 마인드와 마주하면서 자신의 문화를 교묘하게 단련해 간다.
1989년에 접어들어 발리 주정부는 독립적으로 관광 개발 마스터 플랜을 검토하였고, 가자마다 대학(Gadjah Mada University)에서 종합 관광 마을 형태의 개발이 제시되자 이것을 채용한다. 누사두아와 같은 대규모 개발과 정반대를 이룬 발리 마을의 일상적인 생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관광 마을"의 정비가 시작되어 현재의 뿐구리뿌란, 자티루이드 두 마을이 완성되었다.
지방자치[편집]
수하르토 정권 말기에는 중앙 주도의 대규모 개발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아닷트에 뿌리를 둔 환경 보호 운동이 전개되었다.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의 붕괴 이후, 1999년 지방분권을 통해 지역 자치 운동이 거세지고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가속시킨 것이 두 차례에 걸친 테러 사건이다. 발리는 유럽 선진국에서 부유한 백인 관광객이 모이는 동시에, 이교도인 힌두교 영역이었기 때문에 2001년 미국 동시 다발 테러 사건 이후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국제테러리즘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두 번의 대규모 무차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2002년 10월 12일 꾸따 지역에 있는 디스코 클럽을 겨냥한 자살 폭탄 테러로, 202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2005년 10월 1일에는 짐바란 지역과 꾸따 지역의 레스토랑을 겨냥한 동시 다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3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모두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두 번의 테러 사건으로 발리의 관광 산업은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지만, 2007년 사상 최고의 외국인 여행객수를 기록하는 등, 지금은 예전의 활기를 되찾고 있다. 그러나 한편 현지 사회에서는 자바에서 유입되는 무슬림 이민 노동자의 증가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높아지고 있다.
지리[편집]
지도[편집]
개요[편집]
발리섬은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에 속하는 소순다 열도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섬의 서쪽에는 발리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선다 열도에 속하는 자와 섬이, 동쪽에는 롬복 해협을 사이에 두어 롬복 섬을 포함한 누사 트가라 제도가 있어, 띠모양의 열도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발리 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3km 정도이며, 발리의 해안에서는 자와 섬의 자형을 파악할 수 있다.
지형[편집]
그리고 발리섬의 남부의 화산맥에 위치하는 브라탄 호수 등의 호수로부터의 아래로 흘러 내려간다. 스박크로 불리는 전통적인 수리 조직에 의해서 21 세기 초까지 그 자연 환경과 함께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이 수계에 의해서 섬의 남쪽 전체가 초록이 넘치는 토지가 되었다.
기후[편집]
발리섬 주변은 사바나 기후에 속하며, 계절은 북서 계절풍이 부는 우기(10월 - 3월)와 남동 계절풍이 부는 건기(4월 - 9월)로 명확하게 나뉜다. 이 계절풍에 의한 거센 파도는 해상 교통에 지장을 주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외침으로부터의 보호막이 되기도 하여 독립성을 유지한 역사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건기의 사이는 동부, 북부를 중심으로 물부족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우기에는 하루에 2 ~ 3시간 스콜이 내린다. 심할 때에는 30cm의 집중호우가 내릴 때도 있으며, 도로가 침수되기도 한다.
년중 기온의 변화는 거의 없고, 연간 최저평균기온은 약 24도, 최고평균기온은 약 31도, 또, 평균 습도는 약78%로 덥고 습도도 높지만, 체감 기온은 바다 바람에 의해 훨씬 부드럽다.
생태[편집]
발리의 동식물의 대부분은 아시아의 다른 제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발리 고유의 것은 드물다. 아시아에 특징적으로 보이는 동물상, 식물상이 일반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동쪽 롬복 섬과 생태-지리적 경계를 나타내는 월리스 선이 지나가고 있다.)
동물은 옛날부터 호랑이, 들소, 원숭이, 딱따구리, 비단뱀, 도마뱀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고, 300 가지 이상의 조류를 관찰할 수 있다. 1940년 경에는 발리 호랑이가 멸종되었고, 조류 유일의 발리 고유종인 발리 스타틀링도 멸종 위기에 놓여있다. 또한, 근대 농업의 진전과 리조트의 농약 살포 등으로 인해 생태계의 변화도 볼 수 있다. 발리에서 유일한 벌판이 남아 있는 서부 국립 공원은 회색 원숭이나 다람쥐, 이구아나 등 야생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발리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토케이게코라는 대형 도마뱀은 울음소리를 7번 연속으로 들으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전설이 있으며, 해충을 잡아먹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행정[편집]
- 발리 섬은 발리 주를 이루고 있으며 주도는 덴파사이다. 8개의 군(kabupaten)과 1개의 시(kota)로 구성된다.
- 시(kota)
- * 덴파사
- 군(kabupaten)
- 바둥(Badung) - 군도 망구푸라
- 반글리(Bangli) - 군도 반글리
- 부레렝(Buleleng) - 군도 싱가라자(Singaraja)
- 기안야르(Gianyar) - 군도 기안야르(Gianyar)
- 젬브라나(Jembrana) - 군도 네가라(Negara)
- 카랑가셈(Karangasem) - 군도 암라푸라(Amlapura)
- 클룽쿵(Klungkung) - 군도 세마라푸라(Semarapura)
- 타바난(Tabanan) - 군도 타바난(Tabanan)
사람[편집]
발리의 지역 사회는 발리 힌두교에 근거한 유일한 전통 양식 (아닷트)에 따라 생활이 영위되고 있으며, 네덜란드 식민지 이후에도 현대 행정 (디나스)과 병존하는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반자르와 데사라는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다양한 노동 작업 (고통 로용)이나 종교 의례가 공동으로 거행되었으며, 반자르에서 추방은 "죽음"와 사형선고와 마찬가지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발리 사람들은 특정 목적에 대해 "스카" 내지 "스카하"이라는 그룹을 형성하고 대응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가믈란 연주단, 청년 단체, 무용단, 자경단, 합창단 등 상황에 따라, 스카는 반자르 이상 형성되어, 많은 반자르와 달리 가입 탈퇴가 자유롭다. 이러한 공동체를 "다원적 집단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반자르 등 지역 조직에 속해서, 어릴 때부터 이웃과 품앗이를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도 있고, 주민의 성격은 매우 온화하다.
종교[편집]
"신들의 섬"이라고 일컬어지는 발리에서는 사람의 약 90%가 발리 토착 신앙과 인도 불교 및 힌두교의 융합에 의해 성립된 발리 힌두교를 신앙으로 받들고 있다. 발리 전통 마을 (데사, 아닷트)에서는 토지와 조상신에 대한 믿음을 신봉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데사 아닷트 위치를 깨끗이 하고 더러움을 방지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관습(아닷트)도 꽤 짙게 남아 있어 상점이나 집 앞에는 매일 아침 챠난이라는 제사의식을 진행하는 등 종교 활동에 많은 시간이 보내고 있다. 따라서 매일 발리 섬 어딘가에서 축제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발리 사람들은 축제에 대해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발리 사람들에게 축제(우파차라)는 어디까지나 이상과 같은 종교 의식 같은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발리 사람들은 매우 영적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발리 힌두교의 세계관은 방향에 따라 지행되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이 "카쟈"(산쪽)와 "쿠롯도"(바다쪽)의 조합이다. 카쟈과 쿠롯도 대비는 위와 아래, 우세와 열세, 깨끗함과 더러움과 같은 상징적인 가치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사원의 위치와 장례식 장소, 저택의 구조 등이 대비 따라 정해져 있다. 또한 질서관에서 사람의 머리를 만지거나, 머리에 손을 대는 것이나, 왼손으로 돈을 취급하거나, 식사를 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언어[편집]
전통적인 언어로 많은 사람들이 발리어를 사용해 왔지만, 공식적으로는 인도네시아의 공용어인 인도네시아어가 사용되고, 학교 교육과 주요 언론도 인도네시아어를 이용하고 있다. 도시 지역은 인도네시아 어를 주로 사용하는 계층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에서 지방분권화를 배경으로 발리 문화 부흥 운동 (아제구 발리)의 일환으로, 의무 교육으로 발리 문자를 배우는 것을 병행하고 있다. 그리고, 2006년부터는 발리 포스트에서 "오루티 발리"는 발리의 신문이 주간으로 복간되어 발리 문학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발리의 라디오 방송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발리어로 된 가요도 유행시키고 있다.
대부분의 발리 사람들은 언어를 두 개 이상 구사할 수 있다. 관광 사업 때문에 영어가 세 번째로 많이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
문화[편집]
섬 남부를 중심으로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발리 사람들은 여유로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아침, 저녁 각각 2,3 시간 일하면서 나머지 시간을 회화, 조각, 음악, 무용 등의 창작 활동에 종사하여, 미술, 예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발리 섬은 공연 예술, 그림, 조각 등 예술로 유명해졌다.
발리의 예술은 오래전부터 인도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세대를 거치면서, 발리 고유의 토착적인 성격이 강해졌다. 인도의 흔적이 짙게 남은 유물로 페즐에서 출토된 점토로 만든 봉납판(8세기)에는 인도 팔라 제국의 미술을 연상시키는 불교 삼존 상이 그려져 있다. 또한 인도 힌두교의 석조인 두르가 상(11 세기 무렵)도 걸작으로 꼽힌다.
다만, 오늘의 발리에서 볼 수 있는 예술은 관광객을 위한 예능과 미술로, 1920년대 이후의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이후의 역사 속에서 발리를 방문한 유럽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 예능은, 당시의 유럽인에 의해서, 또는 전후의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서, 그리고 관광객에 의해서, 발리의 '전통 문화'로 상징화 되어 관광 공연이 발리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수하르트 체제 붕괴 후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면서, 지역 자치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인도네시아 사회 전체로 확산되면서, 발리에서는 지역 문화 진흥을 목표로 삼고, 《발리 포스트》를 중심으로 ‘발리 TV’가 만들어지는 등 아제그 발리 운동이 일어났다.
음악과 춤[편집]
발리의 가멜란 음악은 매우 발전되어 있다. 라마야나 같이 힌두교의 서사시를 표현한 춤도 있다. 발리의 춤으로 유명한 것 가운데에는 펜뎃, 레공, 바리스, 토팽, 바롱, 께짝 등이 있다.
발리의 제례와 의례에는 항상 춤을 수반한다. 그러한 무도, 음악, 예술에는 께짝과 레공, 바롱 댄스, 빙의 무용인 상향 드다리, 그리고 이 춤들의 반주에 사용되는 가믈란과 쥬고구 (대나무 가믈란)가 잘 알려져 있다 . 이들은 확실히 원래는 공동체의 종교 의례로 행해 온 것이지만, 지금은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공동체의 제사에서 분리된 창작 예술이 되었다.
오늘 발리의 무용 예술은 종교적인 중요성에 따라 다음의 3 단계로 구분되어 있다.
- 타리 왈리(tari wali)
- 공동체의 종교 의식 그 자체, 또는 의식을 마치는 역할을 하는 무용을 말한다. "왈리"는 "공물" 내지 "제물"을 의미한다. 루잔, 뻰뎃트, 산간, 바리스 그데 등이 포함된다.
- 타리 베발리(tari bebali)
- 와리에 비해 의식성을 약하지만, 종교 의식에 대한 반주 또는 봉헌할 때 사용하며 토벤, 간푸 등이 있다.
- 타리 발리(tari balih - balihan)
- 바리는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며, 관상용, 오락용으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쿠비야르 스타일이 여기에 속한다.
오늘날 발리 예술의 문제점은 관광 사업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고유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자극[편집]
그림자극(와양)은 발리의 사람들에게 시공을 초월한 지식과 교양의 원천이다. 즉, 예능으로서 와양, 그것을 감상하는 인간의 의식의 바닥에 점점 쌓여가서 잠재적인 가치 체계가 된다. 와양 스토리는 주로 고대 인도의 서사시다.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이고, 인형을 조정하는 다랑은 산스크리트의 지식을 가진 특별한 승려인 프단다가 맡는다. 또한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와양 첸 브론으로 불리는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가민된 와양이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게 되어, 전통적인 와양은 쇠퇴 추세에 있다.
공예[편집]
발리 전통 공예의 기원은 화장 등의 종교 제례 때 바치는 제물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정교함이 엿볼 수 있는데, 목각은 장식 공예로 문이나 기둥 등의 건축물, 동상, 소품, 연극 가면 등으로 일상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동물의 사랑스러운 조상은 역시 "발리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난 것이다. 천 공예로는 이불과 수건 등 폭넓게 사용되는 민속 의상 사롱(sarong), 직물에서는 "자바 더"라고 불리는 바틱(Batik 및 이캇트 천)이 잘 알려져 있다. 그 밖에 추르크 마을의 은제품 역시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예품 제작자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독창성을 살린 예술 창작 활동에 힘쓴다기 보다는 그 작품을 판매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회화[편집]
발리의 회화는 색채가 풍부하고 치밀한 묘사가 특징이다. 발리 회화의 기원은 16세기후반 마자파힛 왕조 무렵으로, 왕궁을 장식하기 위한 회화로 발전하여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와 힌두교의 많은 신들이 소재가 되어 왔다. 당시부터 전해지는 발리 회화의 기법은 〈카마산 스타일〉이라 하고, 기본적으로 5색 (검정, 흰색, 노랑, 파랑, 갈색)을 사용하여 원근을 이용하지 않고 평면적으로 그려진 것들이 많다. 카마산 마을에서는 전통적인 기법의 계승과 함께 새로운 감성을 가미해 발전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 시대였던, 1920년대에 섬에 왔던 발터 슈피스와 네덜란드의 화가 루돌프 보네 등과, 구스티 뇨만 렌 패드로 대표되는 발리 작가와의 교류를 계기로 ‘예술가 협회’ (피타 마하 협회)가 탄생해, 원근법 등 새로운 기법을 추가 발전시켜, 발리 회화는 국제적인 수준으로 탈바꿈하였다. 1930년대 절정기에는 100명 이상의 예술가가 피타 마하 협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태어난 화법으로, 묵화와 같은 세밀화를 특징으로 하는 〈바투안 스타일〉과 보네의 지도로 탄생한 일상의 풍경을 소재로 하는 〈우붓 스타일〉 등이 있다.
또한 상거래에 의한 발리 회화 작품의 외부 유출을 막자는 움직임도 현지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 원조가 된 것이 우붓의 회화 판매상 와양 스테조 네카이며, 우붓에는 그의 설립한 《네카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그 밖에 한때 루돌프 보네 등이 1956년에 세웠던 〈우붓 회화 미술관〉 (프리 르키산), 《덴파사 발리 박물관》, 《발리 문화 센터》, 그리고 1932년부터 사누르 해안에 살았던 벨기에 화가 르 메이요르의 작품을 직접 전시한 《르 메이요르 회화 미술관》 등이 있다. 그러나 일부 미술품 상점에서 유명한 화가의 작품으로 젊은 화가에 위작을 만들게 관광객에게 파는 경우도 있다.
관광[편집]
남부 해변 리조트[편집]
발리섬의 관광 개발은 1969년 응우라라이 공항의 개항에 의해 단체 관광을 위한 대규모 개발이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판타이 사누르(Sanur)와 꾸따(Kuta)가 관광의 중심이 되었다.
곧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누사 두아에 고급 리조트를 건설하는 개발이 진행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발의 물결은 이들 지역을 너머 꾸따 남북으로 확산되었다. 세미냑, 레기안, 짐바란에서 탄중 베노아에 이르는 해안에 넓은 관광 지대가 형성되게 되었다. 세미냑의 북쪽에는 타나 롯 사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누르와 꾸따에서는 폭탄 테러 사건 전후에서 당국과 현지 사회의 치안 유지를 위해 단속이 진행되어, 포장 마차 등을 제거하도록 되어 있다.
발리는 이 섬의 남쪽 해안을 무대로 한 서핑의 메카이며, 건기, 우기를 불문하고 고품질의 파도를 찾아 세계 각국에서 서퍼들이 방문하고 있다. 서프 포인트도 많고, 파도의 성질도 다양한다. 최근에는 서핑으로도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도 많고, 서핑샵과 서핑 가이드 또는 서핑 관련 스폰서로 수익을 얻고 있는 프로 서퍼도 생겨났다.
주도 덴파사[편집]
주도인 덴파사는 현지 사회의 상업 중심지며, 현지 주민이 다니는 쇼핑몰(발리 쇼핑 센터, 마타하리 등), 시장(수공예품, 직물 시장, 파사르 쿤바사리와 중앙 식품 시장의 파사르 바둔 등 ), 레스토랑, 공원이 많이 있다. 기타, 발리 주 국립 박물관과 뿌뿌탄 광장 등의 관광지가 있다.
우붓 산악 지대[편집]
한편, 산의 측면으로 가면, 산중턱의 리조트 지역이 있는 발리의 모습을 볼 수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우붓이다. 이 "예술 마을"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부터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양질의 발리 댄스와 발리 예술, 바틱 등 염색 기술, 대나무 제품 등 전통 문화와 민예품 등 여러 가지를 볼거리를 제공한다. 우붓 남쪽에는 목조 마을 데사 마스도 번창하고 있다.
이러한 산간 지역에는 물질 문명과 현대 문명의 굴레에 지친 서양인과 외국인이 장기 체류를 하면서 발리의 문화를 배우고 가는 경우도 많고, 몇 개월에서 몇 년까지 발리에 머물면서 회화, 음악, 조각, 춤 등을 배우고, 또 자신의 예술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우붓은 다루무 아궁 사원에 위치한 우붓 원숭이 숲과 네카 미술관 등 미술관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바투르 산이 우뚝 솟아있는 발리 중부 산악 지대는 낀타마니 고원, 브라탄 호수, 탄버린간 호수와 쟈티르위의 계단식논 등 발리의 아름다운 자연이 잘 드러나는 지역이다.
섬 동부, 북부[편집]
또한 섬의 동부, 북부 해안 지역에서도 1970년대 이후 비치 리조트로 조용히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발리 동부 다사, 아메드(Amed), 발리 북부의 로비나(Lovina) 비치, 발리 북서쪽의 쁘무트란(Pemuteran) 등이다. 이 지역은 스쿠버 다이빙, 스노클링의 명소로 유명한 해변이 여러 개 있다. 그 중, 발리 동부 뚤람벤(Tulamben)에서는 미국의 수송선 리버티 호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해저에 침몰한 유물이 남아 있어 다이버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발리 동부는 아궁 및 [[브사키(Besakih) 사원]이 섬 북쪽에 위치하며, 오래된 도시 싱아라자(Singaraja) 항구도 위치하고 있다.
교통[편집]
외부[편집]
지역 교통[편집]
섬 내부에서는 철도가 운행되고 있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이동은 자동차를 이용하게 된다. 발리는 해안을 따라 주요 지역을 연결하면서 일주하는 도로가 있다. 내륙에서는 특히 섬의 방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남쪽 사면의 하천이 남북으로 깊은 골짜기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것 따라서 도로가 남북으로 나 있고, 동서로 달리는 도로는 별로 없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와 마을의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는 거의 포장이 되어 있어 자동차의 통행에 문제가 없다. 중산층 이하 현지 주민의 주요 교통 수단은 오토바이와 베모이다. 또한 오제라는 오토바이 택시와 돗카루라는 조랑말 마차도 일부 지역에서 볼 수 있다.
장거리 이동의 경우에는 주요 지역에만 버스가 운행하고 있으며, 요금은 베모보다 저렴하지만 에어컨은 없다. 또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덴파사르 터미널을 이용해야 한다. 이곳에서 섬의 주요 관광지를 잇는 에어컨 셔틀 버스가 매일 여러 대씩 운행되고 있다. 또한 남부의 주요 관광지, 즉, 덴파사르, 꾸따, 사누르 주변에서는 미터기가 달린 택시가 운행하고 있다.
치안[편집]
최근 몇 년간 폭탄 테러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서양이나 호주에 비해서도 발리의 치안 상태는 양호하다. 관광지에서는 관광객을 노린 범죄가 많이 발생하고 주로 꾸따 비치, 르기안 비치, 바 등에서 일반 관광객의 돈을 노리는 도둑질이나 사기가 자주 일어난다. 흉기를 이용한 강력범죄는 드물지만 관광객을 상대로 한 오토바이 날치기 등이 가끔씩 보고되고 있다.
- 2002년 10월 12일, 꾸따 해변에서 관광객을 목표로 한 차량 폭탄 테러로 202명이 죽고 209명이 부상을 당했다.
- 2005년 10월 2일, 꾸따와 짐바란 해변에서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 26명이 죽고 127명이 부상을 당했다.
- 2009년 9월 19일, 규모 6.4의 강진이 일어났다.
주석[편집]
- http://www.hani.co.kr/arti/SERIES/198/328455.html
- Hanna (1976 : 116)
- 각 수치는 1961년 - 1990년까지 30년간 평균。세계기상기관 (WMO)의 데이터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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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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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스(Constance) 호수 전역의 낚시와 항해의 역사 및 특별 전시로 콘스탄스 호수 및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전경을 그린 그림들이 전시회고 있다. 이 박물관은 원해 크로이츠링엔(Kreuzlingen)의 아우구스틴 수도원의 와인 압착과 와인 저장고 및 곡물 저장고 용도로 1717년 지어졌다. 1894년에 농가로 개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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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70.8%를 차지하고 있다. 해양의 면적은 3억 6,105만㎢에 이르고, 해수의 부피는 13억 7,030만 km³에 이른다. 해양의 깊이를 평균하면 4,117m가 되며, 최대 깊이는 11,034m이다.
바다는 지구상에 최초로 생명이 탄생한 곳이며, 플랑크톤, 해조류, 어류, 포유류, 파충류, 갑각류 등의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다. 해양은 옛날부터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풍부한 수산 자원을 가진 한국의 경우도 기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향을 받아 왔다. 바다가 없는 나라는 내륙국이라고 부르고 바다가 없는 지역은 내륙 지역(일명 내륙주)이라고 부른다.
목차
기원[편집]
해양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 바닷물은 화산 활동 등에 수반하여 온천이나 화산 증기와 같은 형태로 지표에 도달한, 지구 내부에서 나온 물이 지구 표면의 움푹한 곳에 괸 것이다.
- 해분(海盆)은 원래 지구 표면에는 하나의 대륙과 하나의 대양분(大洋盆)이 있었는데, 대륙이 여러 개로 갈라져 지구 표면을 떠돌아다닌 결과 오늘날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해분의 배열이 결정되었다[1].
생태 환경[편집]
해양은 많은 동물의 개체군에게 한결같은 환경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해양을 이루고 있는 환경 요소는 매우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이와 같은 복잡한 환경 속에서 현존하고 있는 각 동물종은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에 적응하면서 진화해 온 것이다. 또 환경은 물리·화학·지리·역사적인 비생물적인 환경뿐만 아니라 생물 상호 간의 관계도 그 자체가 중요한 해양 환경이 되는데, 이와 같이 생물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비생물적인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반도 부근의 바다[편집]
가장 최근의 빙하기 이후 한반도가 '반도'가 된 것은 해수면 상승으로 황해와 동해가 생성된 약 2만 ~ 1만 년 전 이후이다.
지형 구분[편집]
바다의 혜택[편집]
인류가 바다에서 얻는 혜택은 다음과 같다.
환경 조절의 기능[편집]
- 대류 순환을 위한 수증기 제공
- 막대한 열에너지 저장, 순환
- 이산화탄소의 흡수
식량 자원[편집]
다른 천체의 바다[편집]
지구 외에 바다를 갖고 있다고 추정되는 태양계 내의 다른 행성이나 달이 있다. 단, 바다를 구성하는 것은 액화된 메탄이 등으로 지구와 같은 물이 아닌 경우도 있다.
주석[편집]
- 이와 같은 생각을 대륙표이설(大陸漂移說)이라 하여, 반대설도 많지만 지금으로서는 주류적인 가설이 되어 있다.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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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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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물)
정수(淨水, 영어: water purification)는 물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나 깨끗하게 한 물을 가리킨다. 특정한 목적을 맞게 물을 생산하는 것이 목적이다. 대부분의 물은 인간이 소비(음료)하기 위하여 정화하지만, 이 밖에도 정수 과정은 의학, 약리학, 화학, 산업 목적과 같은 다양한 목적으로 시행한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 거름종이나 여과기로 말미암아 액체 속에 남아있는 침전물을 걸러내는 여과가 있다.
마실 수 있는 물의 품질에 대한 표준은 국제 표준이나 정부가 정립해 놓는다. 이러한 표준은 일반적으로 물을 이용할 수 있는 최소 제한과 최대 제한을 정해 놓고 있다. 물을 정화하는 과정을 실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예로 가정과 사무에서 쓰이는 정수기가 있다.
같이 보기[편집]
- 물 처리(수 처리)
- 역삼투(RO)
- 역삼투압 정수기 - 정수과정에서 기존의 물속에 있는 좋은 미네랄 성분도 모조리 제거해버리기 때문에, 과한 육체노동 혹은 운동시 다른 보충없이 이 물만 마실 경우 전해질 쇼크(미네랄 결핍 쇼크)가 올 수 있다
- 미네랄 정수기 - 개선된 방식
더 읽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 Masters, Gilbert M. Introduction to Environmental Engineering. 2nd ed. Upper Saddle River, NJ: Prentice Hall, 1998.
- United States EPA Ground and Drinking Water Homepage. EPA Ground and Drinking Water Homepage Visited 12/13/05
|이 글은 화학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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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농
신농은 중국에 있어서 초기 부락 연맹의 이름이기도 하여, 70세(世)에 걸쳐 고대중국을 통치했다 한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본초서(本草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전설에 의하면, 신농의 몸은 머리와 사지를 제외하고는 투명하여, 내장이 밖에서 확실히 보였다고 한다.
관련 문화[편집]
신농에 대한 제사[편집]
한국에서는 신라 시대 이후로 농신(農神)으로서의 신농씨과 후직씨(后稷氏)에 대한 제사를 지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선농단을 세워 매년 임금이 직접 밭을 간 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관련 문헌[편집]
- 사마정, 《사기》〈삼황본기〉
주석[편집]
삼황오제
|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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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대성당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프랑스어: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카테드랄 노트르담 드 파리[*])은 프랑스 파리의 시테 섬의 동쪽 반쪽에 있는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 건물로서 파리 대주교좌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흔히 프랑스 고딕 건축의 정수로 이야기된다. 이 대성당은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비올레르뒤크에 의해 파괴된 상태에서 보호되어 복구되었다. “노트르담”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성모 마리아를 의미함).
노트르담 대성당은 세계에서 최초로 벽날개를 사용한 건물이기도 하다. 이 대성당은 원래 성가대석과 중랑(中廊) 주변에는 벽날개가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공사가 시작되고 (고딕 양식에서 유행한) 꽤 얇은 벽들이 점점 높아지면서 커다란 균열이 벽이 밖으로 밀릴 때 생겼다. 그래서 성당의 건축가들은 바깥벽 주변에 지지벽을 만들었고, 그 뒤에 비슷한 방법으로 추가되었다.
건설[편집]
1160년 파리의 성당이 ‘유럽 임금들의 본당’이 되자 성당의 규모가 제 역할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 모리스 드 쉴리는 파리 교구장에 착좌하자마자 원래의 성당을 무너뜨렸다. 전해지는 바로는 파리의 새로운 영광스러운 대성당의 모습을 상상한 드 쉴리가 그것을 원래 성당의 바깥 흙에 스케치하였다고 한다. 건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교구장은 몇 채의 집들을 무너뜨렸고, 성당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운송하기 위해 새 도로를 만들었다.
독특한 탑 두 개와 서쪽 정면을 건설하는 일은 약 1200년에 시작되었는데, 일반적인 건설 과정과는 달리 중랑(中廊)이 완성되기 전이었다. 건설 과정에서 많은 건축가가 일했으며, 이는 서쪽 정면과 두 탑의 각각 다른 높이와 다른 양식에서 발견된다. 1210년에서 1220년 사이, 4등 건축가는 장미창이 있는 층과 탑 뒤의 거대한 현관의 건설 과정을 감독하였다. 두 탑은 1245년경에 완성되었으며, 대성당은 1345년경에 완성되었다.
건설 연대[편집]
- 1160년 모리스 드 쉴리(파리 교구장)가 원래의 대성당을 부수도록 명령하다.
- 1163년 노트르담 드 파리 대성당의 초석이 얹혀지다 - 공사가 시작되다.
- 1182년 후진(後陣)과 성가대석을 완공하다.
- 1196년 중랑(中廊)을 완공하다. 드 쉴리 교구장이 선종하다.
- 1200년 서쪽 정면의 작업이 시작되다.
- 1225년 서쪽 정면을 완공하다.
- 1250년 서쪽의 두 탑과 북쪽의 장미창을 완공하다.
- 1250년 - 1345년 나머지 부분을 완공하다.
오르간[편집]
오랜 시간에 걸쳐 대성당 안에 여러 개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지만, 처음에 설치된 오르간은 건물에 적합하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최초의 오르간은 당시 유명한 오르간 설치 전문가였던 프랑수아앙리 클리코에 의해 1700년대에 완성되었다. 클리코가 만든 페달 구획 안의 파이프 기구는 오늘날까지 오르간에서 소리를 낸다. 오르간은 19세기에 아리스티드 카베이에콜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다시 만들어지고, 크기도 커졌다.
노트르담의 오르간 연주자는 카바이에콜이 만든 가장 큰 오르간이 있는 생쉴피스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명성있는 오르간 연주자의 위치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00년부터 1937년까지 오르간 연주자였던 루이 비에른이다. 카바이에콜 오르간은 그의 연주의 음색에 따라, 1902년과 1932년에 조정되었다. 여기에 피에르 코슈로는 변경사항을 더 추가했는데(그 중 많은 것은 루이 비에른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오르간의 기계장치를 전기 작동방식으로 바꾸었다(원래의 카바이에콜의 오르간의 연주대는 영미식의 새로운 연주대로 교체되었으며, 원래 연주대는 남쪽 탑의 연단으로의 입구로 옮겨졌음). 또한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오르간 스톱들을 발건반 부분에 추가하고, 믹스처 스톱들을 다시 배열하고, 마지막으로 3개의 수평 리드 스톱(en chamade)을 추가하였다. 코슈로가 1984년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 장피에르 레구아이, 올리비에 라트리, 이브 데베르네이(1990년 사망), 그리고 필리프 르페브르 이렇게 4명의 오르간 연주자가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18세기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4명의 오르간 연주자를 두었던 관습의 부활로, 각각의 연주자는 1년에 3개월을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 1989년에 악기의 복구가 진행되어, 1992년에 완료되었다.
개축, 파괴, 그리고 복원[편집]
1793년 프랑스 혁명 때에 노트르담은 이성숭배에 봉헌된 뒤, 최고존재숭배에 봉헌되었다. 이 시기 동안 대성당의 많은 보물들은 파괴되거나 강탈당했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유다 왕들의 조각상들이 (봉건질서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왕들로 오인되어) 머리가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많은 머리들이 1977년에 인근을 발굴하면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클뤼니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시대에 제대에 위치해 있던 성모 마리아상은 자유의 여신상으로 교체되었다. 중요한 종들은 간신히 용해되는 것에서 피할 수 있었다. 성당의 내부는 말 먹이나 음식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사용되었다.
복원 계획은 건축가인 장바티스트앙투안 라쉬와 외젠 비올레르뒤크의 감독으로 1845년에 시작되었다. 플레슈(flèche, 첨탑의 일종)를 건립하고 시메르 갤러리(alerie des Chimères)의 키메라들을 추가하는 것을 포함하여 25년간 계속되었다. 비올레르뒤크는 자신의 작품에 언제나 서명을 했는데, 고딕 볼트(궁륭)를 닮은 날개 구조를 가진 박쥐를 같이 그려 넣었다.
1991년 유지 및 복원 계획이 시작되었는데, 애초에는 10년간 지속될 예정이었으나 2008년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데, 낡은 조각상들을 청소하고 복원하는 것이 대단히 섬세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종[편집]
노트르담에는 5개의 종이 있다. 가장 큰 종인 엠마뉘엘(Emmanuel)은 남쪽 탑에 있는데, 무게가 13톤이 넘으며 하루의 시각을 알리기 위해서나, 여러 행사나 전례를 알리기 위해 울린다. 북쪽 탑에는 바퀴 위에 부가적으로 4개의 종이 붙어 있는데, 이 종들은 흔들리면서 종이 울린다. 이 종들은 전례나 축제 때에 울린다. 이 종들은 이전에는 수동으로 작동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전기 모터로 작동한다. 이 종들에는 작은 건반악기의 연주와 조음하기 위한 외부 해머들이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의 주요 사건[편집]
- 1185년 — 카에사리아의 헤라클리우스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대성당에 제3차 십자군을 요청함.
- 1239년 — 생트샤펠이 건립될 동안 루이 9세에 의해 가시 면류관이 노트르담 대성당에 놓여짐.
- 1302년 —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처음으로 삼부회를 염.
- 1431년 12월 16일 —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프랑스의 왕위에 오름.
- 1450년 — 파리에서 사람들을 잡아먹던 늑대들이 붙잡혀 대성당의 계단에서 죽임을 당함.
- 1455년 11월 7일 — 잔 다르크의 어머니인 이자벨 로메가 교황청 대표단에게 자기 딸의 이단 판결을 번복해 달라고 탄원함.
- 1558년 4월 24일 —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가 프랑스의 앙리 2세의 아들인 도팽(훗날의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과 결혼함.
- 1572년 8월 18일 — 나바르의 앙리(이후 프랑스의 앙리 4세가 됨)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함.
- 1573년 9월 10일 — 앙리 드 발루아가 노트르담에서 전통적 자유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공위 기간에 제정된 종교적 자유에 대한 법을 존중하기로 맹세함.[1]
- 1804년 12월 2일 — 나폴레옹 1세와 그의 아내 조제핀의 대관식이 교황 비오 7세의 사회로 행해짐.
- 1909년 — 잔 다르크를 시복함.
- 1920년 5월 16일 — 잔 다르크를 시성함.
- 1937년 6월 2일 — 500명의 당시의 재능있는 오르간 연주자들이 참석한 치열한 콩쿠르(심사위원 중에 샤를마리 비도르도 있었음) 끝에 루이 비에른이 노트르담 드 파리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됨. 비에른은 노트르담에서 열린 그의 마지막 연주회가 거의 끝나갈 때에 (그의 평생의 소원대로) 대성당의 오르간 앞에서 사망함.
- 1944년 8월 26일 — 파리 해방을 축하하는 테 데움 미사가 대성당에서 열림.(내부 회랑과 내부 회랑 양쪽에서 저격총 사격으로 인해 미사가 중단되었다는 설명도 있음.)
- 1970년 11월 12일 — 샤를 드골의 위령미사가 행해짐.
- 1980년 5월 31일 — 그 날의 마니피캇이 끝난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대성당의 앞뜰에서 미사를 집전함.
- 1996년 1월 - 프랑수아 미테랑의 위령미사가 행해짐.
- 2007년 8월 10일 — 파리의 명예 대교구장이었던 장마리 뤼스티제 추기경의 위령미사가 거행됨.
노트르담에 얽힌 이야기[편집]
- 1905년에 프랑스에서 제정된 정교분리법에 따라 프랑스 왕국이 세운 다른 성당들과 같이 노트르담도 정부에 귀속되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성당으로 사용하는 것은 승인되었다.
- 파리에서 시작하는 고속도로에서 거리를 나타내는 참고점인 프랑스의 도로원표(Point zéro)가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있는 광장에 있다.
- 19세기 초에 대성당은 황폐한 상태였으며, 도시계획가들은 노트르담의 철거까지 고려했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는 이 대성당의 찬미자로 대성당의 전통을 일깨우기 위해 파리의 노트르담(노트르담의 꼽추)를 썼는데, 이 소설은 대성당의 운명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호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는 운동이 이어졌고, 결국 1845년에 복원이 되었다.
- 대성당의 맨 위에는 13개의 변색된 조각상들이 있다. 그들 중 12개는 열두 사도를 나타낸 것으로 바깥을 향하고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건축가 자신의 조각상으로 안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의 팔을 뻗고 있다.
각주[편집]
-
- 문서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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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 Jacobs, Jay, ed. The Horizon Book of Great Cathedrals. New York, New York: American Heritage Publishing, 1968.
- Janson, H.W. History of Art. 3rd Edition. New York, New York: Harry N. Abrams, Inc., 1986.
- Myers, Bernard S. Art and Civilization. New York, New York: McGraw-Hill, 1957.
- Michelin Travel Publications. The Green Guide Paris. Hertfordshire, UK: Michelin Travel Publications, 2003.
- Tonazzi, Pascal. Florilège de Notre-Dame de Paris (anthologie), Editions Arléa, Paris, 2007, ISBN 2-86959-795-9
바깥 고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와 분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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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Binn) 계곡은 알프스에서 가장 훼손이 덜 된 계곡 중의 하나이다. 슈미디게히쉐레(Schmidigehischere) 중심마을의 잘 보존된 시내는 요즈음에는 보통 "빈"이라고 불리는데, 고대에 만들어진 목조 주택들이 햇빛에 의해 검게 그을린 채 있으며, 1564년에 지어진 낙타 등 모양의 다리와 역사적인 벨르 에포끄 호텔 "오펜호른(Ofenhorn)"은 국가적인 중요성을 띤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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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쭉나무
|들쭉나무|
|생물 분류|
|학명|
|Vaccinium uliginosum
Linnaeus, 1758
들쭉나무는 한국 및 북반구 한대 지방에 분포하는 낙엽 소관목으로 높은 산에서 자란다. 높이는 1m 정도의 가지는 갈색이다. 잎은 어긋나고 난상 원형·도란형·타원형이다. 길이 15~25㎜, 나비 10~20㎜이다. 잎 앞면은 녹색이고 뒷면은 녹백색이며 털과 톱니는 없다. 5~6월에 녹백색의 항아리 모양 꽃이 지난해 가지 끝에 1~4개씩 달린다. 꽃받침은 5개로 갈라지고 갈라진 조각은 삼각형이다. 화관은 끝이 얕게 5개로 갈라지고 수술은 10개이다. 열매는 장과로 구형이거나 타원형이고 8-9월에 검은 자줏빛으로 익는다. 가을에 열매를 채취하여 생식하고 과즙이나 잼을 만든다. 북조선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 개들쭉(Lonicera caerulea)
|이 글은 진달래목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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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는 미국의 역사가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Brestead:1865∼1935)에 의해서 발굴된 서아시아의 고대 문명 발생지에 대한 아칭(雅稱)이다.
이 지대의 동쪽 끝은 페르시아 만(灣)의 충적(沖積) 평야인데, 이란 고원, 자그로스 산맥의 서쪽을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북상하여, 아르메니아로부터 타우루스 산맥의 동쪽을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연결된다. 브레스테드가 명명할 때에는 이 지역을 지칭하였으나, 나중에는 바다를 건너서 그 서쪽 끝은 나일 강 유역의 충적 평야까지 포함하여 말하게 되었다.
세계 최고(最古)의 농경 문화가 이 지대에서 일어난 것은 명백하며, 아마도 시리아, 팔레스티나가 그 발상지이고, 이 문화의 영향하에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및 나일 강 유역(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에 고도의 문명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지대에 정착한 농경 민족과 주변의 유목 민족과의 평화적·전투적 교섭 속에서 고대 오리엔트사(史)의 전개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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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차이나
본차이나(Bone china)는 도자기 종류의 하나로, 뼛가루와 장석, 카오리나이트(고령토, 또는 고령석)라는 광물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도자기를 말한다. 표준 본차이나 제조법에는 적어도 인산 칼슘, 장석과 유리로 반투명한 몸체를 구성하며 삼인산 칼슘 (Ca3 (PO4 )2)의 함유율이 30% 이상 포함된 것이라는 정의가 내려져 있다.[1]대한민국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에서 제시한 기준도 동일하다.[2]
개요[편집]
영국에서는 카오리나이트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대용품으로 소뼈를 사용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본차이나라고 알려진 것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토마스 프라이(Thomas Frye)로 1748년 런던 동쪽의 보우(Bow)에 있는 보우 도자기 공장에서 였다. 그의 공장은 가축 시장과 에섹스 도살장과 매운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그리하여 동물의 뼈를 구하기 쉬운 곳이었다. 프라이는 그가 '좋은 도자기'(fine porcelain)로 불렀던 자기를 만들기 위해 45%의 골회를 사용하여 품질 면에서는 유럽이나 중국에서 수입한 자기와 경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3][4]
이후 1789년에서 1793년 사이에 조지아 스포드가 스토크에서 그 개념을 더 발달시켜서, 그의 공정을 마무리했다. 그의 개발품 중에는 프라이이가 적용했던 뼈를 다른 부위와 같이 구워 원재료에 섞는 과정을 포기하고, 단지 뼈만 구워서 사용했다. 본차이나는 빠르게 인기를 끌었고, 그것은 다른 영국의 자기 제조업자들에게 퍼져 나갔다. 스포드의 제조공정과 사업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그는 뼈가루를 6으로, 차이나 스톤(장석과 약간의 화강암이 섞인 것)을 4로, 그리고 고령토를 3.5 비율로 하여 모든 본차이나의 특징이 되는 기본을 유지시켰다. 그리고 2009년이 되어서야 그의 회사인 스포드 사가 결국 포트메리온에 의해 인수되기 전에 수령인이 되게 되었다.[3][5]
처음 개발부터 20세기 후반까지 본차이나는 주로 스토크 온 토렌토에서와 같이 전문화된 지역 등 영국에서만 독점적으로 생산되었다.[3]
생산[편집]
원료로 골회(인산 칼슘)가 첨가되었지만, 최근에는 골회를 사용하지 않고 뼈의 인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굽기 전에는 회색을 하고 있으며, 구운 후에는 유백색으로 변화한다. 한번 구웠더라도 분쇄 과정을 통해 여러 번 다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구운 후 생긴 발리라는 불필요한 돌출 등을 제거한 후에 다시 구워서 부드럽게 만드는 것도 특징 중 하나이다.
일반 도자기에 비해 얇음에도 불구하고, 칩핑 강도가 강하다. 투광성이 있어서 본차이나로 만든 램프를 제조하는 업체도 있다. 도기와 달리 흡수성이 아니다. 차가운 일반 도자기에 비해 유백색 따뜻한 그릇체가 특징이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 By The British Pottery Manfacturers Federation, and quoted in Dictionary Of Ceramics. Arthur Dodd & David Murfin. 3rd edition. The Institute Of Minerals. 1994.
- http://standard.ats.go.kr/code02/user/0B/03/SerKS_View.asp?ks_no=KSL1002#
- 'Trading Places.' R.Ware. Asian Ceramics. November,2009, p.35,37-39.
- ‘Science Of Early English Porcelain.’ I.C. Freestone. Sixth Conference and Exhibition of the European Ceramic Society. Vol.1 Brighton, 20-24 June 1999, p.11-17
- “Stoke kilns fired up for Spode again”. 《Staffordshire Sentinel》 (Nortchliffe). 2009년 4월 24일. 2009년 4월 25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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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
커리(영어: curry) 또는 카레(일본어: カレー)는 강황 등 여러 향신료를 사용해 야채나 고기 등으로 맛을 낸 아시아 요리의 하나이다. 원래 인도 및 주변 아시아 국가에서 기원한 요리이지만, 현재는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는 요리 중 하나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에 영국을 거쳐 전해져 현재 카레라이스로 불리면서 국민식으로 불릴 정도의 인기를 가지게 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 한국으로 전파되었다. 중국, 대한민국, 일본 등에서 카레는 주로 카레라이스를 의미한다.
명칭의 유래[편집]
영어인 curry는 타밀어 kari(கறி)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국물" 또는 "소스"를 뜻하는 말이다. 힌디어에서는 karī(करी)라고 부른다. 한국어의 카레는 curry가 일본식으로 변형된 カレー에서 유래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 인도 정통 커리의 유행으로 커리라는 명칭도 보편화하고 있다. 단, 국립국어원에서는 아직까지 '카레'만을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다.[1]
세계의 커리[편집]
인도 및 남아시아[편집]
인도에서는 거의 모든 요리에 다양한 향신료를 사용하며, 이 향신료의 종류만 해도 다양하며 각 집마다 고유의 배합법을 사용함으로써 인도의 가구 수만큼의 고유한 맛을 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온갖 향신료를 사전에 미리 혼합해둔 페이스트를 "마살라"라고 부른다. 한국의 대형 매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순카레도 이러한 향신료를 모아둔 일종의 마살라이다. 일본, 한국 등에서 사용되는 카레가루는 향신료가 3,4가지의 적은 수인 반면, 인도에서는 대략 10가지 이상의 다양한 향신료를 사용한다.
인도에서는 힌두교의 영향으로 소를 신성시하기 때문에 쇠고기를 넣은 비프 카레는 인도 내의 영국, 또는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인도내에서도 쇠고기를 먹는 인도인이 상당수 존재하며 인도내에서 비프 카레를 판매하는 식당도 존재한다. 인도 내에서 비힌두교계, 특히 이슬람계에서 쇠고기를 먹기도 하며, 심지어 힌두교인이라고 해도 쇠고기를 먹는 경우도 있다. 인도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세속 국가이기 때문에 쇠고기 섭취에 관해 어떠한 국가적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주로 먹는 카레와 다른 점은 국물의 점도가 매우 낮으며, 곁들이는 재료도 특정한 한 가지의 재료만을 제외하고는 약간의 야채만 한 두가지 정도로 곁들는 것이 특징이다. 곁들이는 야채는 크기를 작게하여 썰거나 혹은 다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특정한 한 가지의 재료를 바탕으로 커리의 이름이 부여된다.
한국의 인도음식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리의 종류는 아래와 같다. 보통 커리라는 이름이 없는 경우에도, 향신료를 친 소스의 이름을 모두 커리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으므로 주의한다. 그리고 커리라고 불리는 음식 중에서도 국물 형태가 아닌 마른 형태의 음식인 경우도 있다.
- 알루 (Aloo, 힌디어: आलू) : 감자가 들어가는 노란색의 커리로, 인도 북부지방에서 많이 먹는 커리이다. 알루는 힌디어로 감자를 뜻한다. 부가되는 종류에 따라 콜리플라워가 들어간 알루 고비(Aloo gobi, 힌디어: आलू), 고기가 들어간 알루 고쉬트(Aloo gosht, 우르두어: آلو گوشت), 완두가 들어간 알루 마따르(Aloo mutter 또는 aloo mattar)가 있다.
- 빈달루(vindaloo) : 고아 주 지방의 커리로, 빈달루라는 이름은 포르투갈어의 vinho(포도주 또는 식초), alhos(마늘)에서 따왔다. 원래 포르투갈 요리였으나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고아 주에 의해 변형되었다. 보통 고추, 후추, 마늘, 식초 등을 사용하며 인도에서도 아주 매운 맛으로 알려져있다.
- 팔락 파니르(Palak paneer, 힌디어: पालक पनीर) : 펀자브 지방 등 북부 지방에서 먹는 시금치와 치즈가 들어간 녹색 커리이다.
- 도피아자(Dopiaza, 페르시아어: دوپیازه) : 서아시아에서 유래된 커리로 크림과 양파와 고기(주로 닭고기,양고기,왕새우 등을 사용한다.)향신료를 조합하여 만든 커리이다. 도피아자는 페르시아어로 '두개의 양파'를 뜻한다.
- 마크니(makhani, 힌디어: मखनी, 펀자브어: ਮੱਖਣੀ) : 마카니(Makhni)라고도 불리며, "버터가 들어갔다"는 뜻이다. 크림과 버터, 생강, 마늘, 양파, 토마토 및 향신료를 넣어 만들며 주황색을 띈다. 크림과 버터가 들어갔기 때문에 기름지고 부드러운 맛이 난다.
- 달 마크니(Dal makhani, 힌디어: दाल मखनी, 펀자브어: ਦਾਲ ਮੱਖਣੀ) : 콩을 넣은 마크니로 주로 사용되는 콩은 우라드(urad, 검은 렌즈콩), 라즈마(Rajma, 붉은 콩)이다.
- 버터 치킨(Butter chicken) 또는 murgh makhani : 치킨을 넣은 마크니로, 치킨 마크니라고 불리기도 한다.
- 치킨 띠까 마살라(Chicken tikka masala) : 향신료에 재워둔 닭고기 조각을 탄두리 오븐에 구운 치킨 띠까(우르두어: مرغ تکہ , 힌디어: मुर्ग़ टिक्का)에 요구르트, 마살라, 토마토, 양파, 크림, 코리안더, 코코넛 크림 등을 섞어 만든 요리. 조리법은 음식점에 따라 매우 다양하여 일부 음식점은 애호박, 당근, 버섯을 넣기도 하나, 닭고기를 사용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2][3] 영국의 인도 음식점에서 처음 나왔다는 설이 있다.
타이[편집]
가장 알려진 종류로 붉은 고추를 사용한 레드 커리(타이어: แกงเผ็ด), 녹색 고추를 사용한 그린 커리(타이어: แกงเขียวหวาน), 강황과 커민등을 사용한 옐로 커리(타이어: แกงกะหรี่, RTGS: kaeng kari, [kɛːŋ karìː]), 그리고 가장 유명한 종류로 파낭 커리 또는 파냉 커리(타이어: พะแนง, IPA: [pʰā.nɛ̄ːŋ])가 있다.
영국[편집]
일본[편집]
한국[편집]
한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오뚜기 카레는 다른 카레에 비해 강황의 비중이 크고, 여기에 치자나무 열매에서 뽑아낸 식용 색소와 조합하여 전체적으로 노란색에 가까운 색을 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한국의 카레에는 다른 나라의 카레에 비해 향신료 수가 너무 부족하고 풍미가 전혀 없다는 비판이 있으며, 실제로 다른 나라에서도 일반적인 카레와는 매우 별개의 요리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노란색을 띄게 된 시기는 1990년대 즈음이며 그 이전에는 일본과 비슷하게 갈색에 가까운 색을 띄고 있다.
문화[편집]
- 영국인들 중에서는 카레가 영국 요리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다른 영국 요리들이 세계 최악으로 평가 받는 중에서 카레가 들어오면서 카레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인데, 실제로 영국 내에서는 음식점을 추천할 때 인도 음식점 등 다른 나라의 음식점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 노라조의 환골탈태에 〈카레〉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다.
- 일본의 애니메이션 및 만화등의 매체에서는 산과 계곡 등으로 야외활동 시에 항상 카레라이스를 내놓는 장면이 보편적이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커리의 지구사』(2013, 휴머니스트, 6쪽)
- Jackson, Peter (2010). 《A Cultural Politics of Curry in "Hybrid Cultures, Nervous States: Britain and Germany in a (post)colonial World"》. Amsterdam: Rodopi BV. 172쪽. ISBN 9789042032286. 3 June 2014에 확인함.
- Webb, Andrew (2011). 《Food Britannia》. Random House. 177쪽. ISBN 978-1847946232. 3 June 2014에 확인함.
- “Thai cooking,food thai,Thai menu, pad thai recipe”. Thaicooking.nationmultimedia.com. 22 October 2013에 확인함.
바깥 고리[편집]
- 건강식품 카레의 비밀 : 라이프 매거진, 네이버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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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풀
집단유전학에서 유전자풀(영어: gene pool)은 어떠한 생물 종이나 개체 속에 있는 고유의 대립형질의 총량을 말한다. 커다란 유전자풀은 상당한 유전적 다양성이 있음을 말해 주며 이는 치열한 선택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튼튼한 개체 수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낮은 유전적 다양성 (근친 교배, 개체 병목효과 참조)은 적응도를 떨어트리고 멸종 가능성을 높여 준다.
이 유전자풀은 1951년에 T.도브잔스키가 제창한 것으로, 유전자풀의 변화에 따라 생물이 진화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
- (영어) Gap Analysis Portal reliable information source on where and what to conserve ex-situ, for crop genepools of global importance
|이 글은 생물학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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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지는 교목 또는 관목으로서, 대부분 단순한 모양의 잎이 어긋나게 붙어 있는데, 드물게는 마주나 있는 경우도 있으며, 턱잎이 존재한다. 암수딴그루로서 꽃은 빽빽하게 모여서 곧게 자라거나 또는 늘어진 꼬리 모양의 꽃차례를 이루며, 이른봄에 잎이 나기 전이나 또는 잎이 나면서 함께 핀다. 수꽃·암꽃이 모두 털에 덮인 포엽 겨드랑이에 달리며, 꽃덮이는 없고 아랫부분에 퇴화된 꽃받침만이 있다. 수술은 2개 이상을 가지며, 수술대는 길고 종류에 따라서는 아랫부분에 합쳐져 있는 것도 있다. 씨방은 상위로, 씨방은 2∼4개의 심피가 합쳐져 측막 태자리를 이루고 있다. 보통 1개의 밑씨를 가지는데, 사시나무속의 몇 종은 2개의 밑씨를 가지는 것도 있다. 열매는 삭과이며, 2∼4갈래로 벌어져 많은 씨를 퍼뜨린다. 씨는 긴 털에 둘러싸여 있다. 사시나무속은 풍매화, 버드나무속은 충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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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아일랜드 조약
|영국의 형성|
|러들랜 법 (1284년)|
|웨일스 법 (1535–42년)|
|동군 연합 (1603년)|
|합병령 (1707년)|
|합병령 (1800년)|
|아일랜드 정부법 (1920년)|
|영국-아일랜드 조약 (1921년)|
|왕실 및 의회 칭호법 (1927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영어: Anglo-Irish Treaty, 아일랜드어: An Conradh Angla-Éireannach)은 공식적으로는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조약 체결을 위한 문서(Articles of Agreement for a Treaty Between Great Britain and Ireland)라고 불린다. 이 조약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임시의회의 대표들이 영국-아일랜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맺은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아일랜드는 대영 제국하의 자치를 확립했다.
영국 정부의 대표들과 아일랜드 공화국의 사절단이 1921년 12월 6일 런던에서 체결했다. 아일랜드 의회에 의한 조약의 비준을 위해서는 남아일랜드 의회와 영국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조약 사실이 누설됐기에(이 조약은 온건파 세력이 일방적으로 체결한 조약이었다.) 아일랜드 의회에서 겨우 비준될 수 있었다. 정식으로 법제화하긴 했으나 조약사실의 누설은 아일랜드 내전을 야기시켰다.
조약의 내용[편집]
|아일랜드 독립사|
|REPUBLICANISM|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다:
- 영국군은 아일랜드에서 대부분 철수한다.
- 아일랜드의 대부분은 캐나다, 뉴펀들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남아프리카 연방과 같이 대영 제국의 자치령으로서 인정받는다.
- 아일랜드 자유국의 주요한 주는 대영 제국의 다른 영토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 아일랜드 자유국은 영국의 군주가 상징적 지배자로 군림한다.
- 새로운 자유국 의회의 의원들은 자유국에 충성의 맹세를 해야한다. 둘째로 국왕 조지 5세와 그의 왕위 계승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한다.
- 북아일랜드는 조약이 유효화되는 한 달 이내에 선택에 의해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분리된다.
- 만약 북아일랜드가 제의를 거절한다면 아일랜드 국방 위원회가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 사이의 경계를 만들것이다.
- 영국은 조약의 담보로 개방 항구(일명 조약 항구)의 수를 영국 해군을 위해 조절한다.
- 아일랜드 자유국은 대영 제국의 은혜를 감사히 받고 충성해야한다.
- 조약의 내용은 아일랜드의 모든 법보다 우선권을 가진다.
조약 협상자[편집]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의회의원 (영국의 수상)
- 버컨헤드 공
- 윈스턴 처칠
- 오스턴 체임벌린
- 고든 헤월트경
- 아서 그리피스 (아일랜드 대표단의 지도자)
- 마이클 콜린스, TD (아일랜드 공화국의 재무부 장관,아일랜드 공화주의자 협회의 의장이자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창설지도자).
- 로버트 바턴
- 이먼 더건
- 조지 게번 더피
상세한 내용과 배경[편집]
이몬 데 발레라는 아일랜드 사절단을 몇가지의 비밀 지령과 조약의 초안을 가지고 1921년 런던으로 협상을 위해 파견했다. 협상은 공식적으로 2주간 진행되었다. 아서 그리피스과 마이클 콜린스의 보고에 따르면 두 대표단은 각 대표단 중 오직 두명씩만 참가하는 비공식적인 협상을 시작했다고 했다. 아일랜드측에서는 이 사람들은 항상 아서 그리피스와 마이클 콜린스였고 영국 측에서는 네빌 체임벌린이 항상 참가했다. 영국 측의 두 번째 참가자는 자주 바뀌었다. 12월 말에 아일랜드 대표단은 더블린으로 돌아와 그들의 지령에 따라 내각과 논의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콜린스와 그리피스는 서약에서의 영국의 이권과 방위 및 무역협정, 그리고 국방 위원회에 관련된 조약의 마지막 세부사항을 조율했다. 콜린스와 그리피스는 다른 사절단이 조약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조약이 체결된 사실을 이몬 데 발레라가 들었을 때 그는 내각회의에서 조약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성명서를 제출했다. 내각회의 끝에 데 발레라는 조약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조약의 내용들은 아일랜드 공화국의 지도부를 갈라놓았다. 공화국의 대통령인 이몬 데 발레라는 소수의 조약반대세력을 이끌었다. 주 논점은 공화국의 독립보다 지배권(충성과 성실을 맹세로 대표된다.)의 상태였다. 분할이 비록 분명한 사실이긴 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양 측은 국방위원회가 민족주의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자유국에 편입하고 북아일랜드의 크기는 정치적으로 최소한 성장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분할할 것이라고 믿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아일랜드 제2대 의회(Second Dáil)는 공식적으로 1921년 12월에 조약을 비준했다. (아일랜드 의회만큼이나 많은 수의 의원이 있고 영국 헌법상 합법으로 인정되어 조약을 비준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남아일랜드 의회는 1922년 1월에 비준했다.) 데 발레라는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아서 그리피스가 새 대통령에 취임했다. 마이클 콜린스는 남아일랜드 의회의 후임격이라 할 수 있는 아일랜드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1922년 12월,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 아일랜드 헌법이 아일랜드 제3대 의회(Third Dáil)에 의해 통과되었다.
조약 반대세력은 무력 행동을 개시함으로써 아일랜드 내전 (1922년 - 23년)을 발발시켰다. 1922년 주요한 서명자인 그리피스 대통령과 마이클 콜린스가 모두 사망했다. 그리피스는 노환으로 사망했고 콜린스는 그리피스가 죽은 지 약 일주일 뒤에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조약반대 성향의 공화주의자에게 1922년 8월 Béal na mBláth에서 암살당했다. 두 사람의 직위는 모두 윌리엄 T. 코즈그레이브가 계승했다.
법에서 영국 국왕과 총독 그리고 조약 그 자체의 우월성에 대한 내용(아일랜드에 불평등한 내용들)은 1932년 아일랜드 자유국의 헌법에서 완전히 삭제되었고 영국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법을 이어서 제정했다.
이 법은 잔존하거나 최근에 만들어진 모든 지배권(dominions)을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영국 의회의 어떠한 법에도 간섭(subject)을 받지 않았다.(이 법의 예외적인 경우는 오직 캐나다뿐이었다. 그들은 영국의회의 지배를 받길 자청했고 1982년이 돼서야 간섭이 끝났다. 그들이 자청했던 이유는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캐나다 헌법의 공식적인 내용을 개정하는 것에 서로 동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영국 의회가 그 전에 통과시킨 어떤 법도 그들의 입맛에 맞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클 콜린스는 조약은 "자유를 얻기 위한 자유(the freedom to achieve freedom)"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데 발레라는 스스로 1930년대의 자신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가 그의 반대자들과 1920년대동안의 독립의 안정성에 대해 말하던 것들에 대해 고백했다. 그는 1932년, 그의 아들에게 그가 정부에 들어간 뒤 코즈그레이브의 피네 게일당의 행정심의회에 대한 문서를 읽은 후 "그들은 굉장했다(They were magnificent)."고 말해주었다(데 발레라는 자신이 조약에 반대한 사실을 후회했다.)
오늘날 데 발레라의 당인 피아나 페일당의 당원들을 포함한 아일랜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약에 반대한 것이 큰 실수였다는 것과 그것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하는 점에 동의한다. 비록 1914년부터 영국 정부는 전 아일랜드의 완전한 자치를 원했지만 영국 의회는 중무장한 개신교 연합론자들의 손에 의한 얼스터 가톨릭신자들의 대량 학살없이는 1921년 그 당시에는 아일랜드가 완벽한 독립을 부여받을 순 없다고 믿었다. 그때 비록 전 국토에 연합론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연합론자들이 자치에 반대하여 일으키는 폭동은 아일랜드에서의 내전뿐만 아니라 "모국(mother country)""에 대한 반란이 되어왔다. (얼스터 의용군을 참고) 연합론자들이 그들이 편안하게 지배할 수 있다고 느끼는 6개주에 대한 분할과 함께 26개주의 아일랜드에게로의 주권이양은 그 당시에 가능한 최선의 타협이었다.
더 나아가서, 비록 그것이(주권양도) 그때 바로 현실화되지 않았으나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분쟁을 일으켰다. 소량의 탄약과 무기가 남아있었다. 콜린스가 처음으로 영국인들이 1921년 중반에 정전을 요청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국왕 조지 5세의 북아일랜드 의회 개회에서 화해를 호소했을 때, 콜린스는 말했다. "우리는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비록 영국인들이 그것을 절대 실현시키지 않았으나 어쩌면 그 기간 동안 IRA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을지도 모른다.
더 읽기[편집]
- Lord Longford, Peace By Ordeal (오래전 절판됨)
- Tim Pat Coogan, Michael Collins (ISBN 0-09-174106-8)
- Tim Pat Coogan, DeValera (ISBN 0-09-175030-X)
같이 보기[편집]
영국과 아일랜드간의 다른 조약들:
사소한 사실[편집]
바깥 고리[편집]
|아일랜드 형성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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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단술은 감주(甘酒) 라고도 하며 쌀로 밥을 되직하게 지어 누룩을 부어 삭힌 음식이다. 전통 한국 술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발효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술 성분은 매우 낮다. 여러 시간 동안 60도 정도의 온도에서 발효시켜 먹는다.
단 맛이 나며, 얼음을 넣어서 시원하게 먹기도 한다. 단술은 식혜라고도 하지만, 단술과는 달리 식혜는 술로 분류하지 않는다.
함께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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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사(라틴어: Missi Dominici)은 거대한 영토에 이질적인 문화와 복합체로 구성된 프랑크 왕국을 다스리기 위해 샤를 마르탱과 피핀 3세는 거대한 나라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왕의 권한을 대행하고 영지를 감시하기 위해 속인 1인, 성직자 1인 으로 구성된 순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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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대사량을 높이는 생활 습관
체온이 1도만 상승해도 지방이 분해되기 시작하며 따라서 열감기를 오래 앓거나 소모성 열이 나는 병을 오래 앓은 사람은 몸이 마른다. 평소 우리 몸에 열을 올리거나 소비시켜 신진대사 기능을 높임으로써 살을 빼는 방법을 알아두자.
1. 근육량을 키운다.
기초 대사량과 근육량은 비례한다. 그러므로 평소 적절한 근육을 유지하거나 근육량을 키우는 것은 기초 대사량을 높이는 데 좋은 방법이다. 만약 전혀 운동을 하지 않게 되면 흡수된 열량의 20% 정도가 몸에 남게 되고 그대로 지방으로 저장된다.
2. 체온을 높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따뜻한 물에 오래 앉아 있으면 신진대사 기능을 높여주므로 자동적으로 기초 대사량이 높아진다. 이왕이면 욕조 안에서 근육을 긴장시키고 이완시키는 방법을 반복하거나 스트레칭을 계속 해준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3. 기분 좋은 생각은 기초 대사량을 높여준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암시가 필요하다. 기지개를 쭉 펴며 오늘 하루도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갖는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습관이 실은 다이어트에 매우 중요하다.
4. 가능한 한 육류 섭취를 하지 않는다.
음식이 몸 속에 들어와서 축적되고 소비되는 과정에서도 자체적으로 열량 소비가 일어난다. 또 음식이 지방으로 전환되는 비율이 음식마다 각각 다르다. 이는 단지 열량으로만 계산할 수 없다. 지방을 섭취하면 거의 대부분이 지방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탄수화물의 경우에는 같은 칼로리를 섭취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이 글리코겐 형태로서 열 에너지로 방출되고 실제로 우리 몸에 저장되는 것은 겨우 1% 정도라고 한다. 단백질의 경우에는 섭취하는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 소비가 필요하다. 단백질은 육류를 섭취하지 않더라도 야채나 콩류에 이미 충분히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곡물류로 음식을 전환하는 것이 기초 대사량을 높이는 방법이다.
5. 자신에게 맞는 한방차를 마신다.
인삼, 녹차 등 한방차는 각기 그 성질이나 효과가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신진 대사율을 높일 목적으로 사용되므로 항상 복용하는 것이 좋다. 그 밖에 식전 30분에서 식후 1시간까지는 가능한 한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그 외의 시간에는 무조건 물을 마신다.
6. 에너지 대사를 돕는 식품을 먹는다.
몸에 흡수되어 인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방출시키는 식품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예를 들면 고추도 그 중 하나이다. 대체로 매운 음식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고추와 매운 음식을 먹을 때는 위장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인체에 들어와 에너지를 방출시켜서 효과적인 다이어트를 할 수 있는 음식은 다음과 같다.
*** 갓, 계피, 고추, 달래, 마늘, 멸치, 부추, 산초, 생강, 식초, 쑥, 쑥갓, 양파, 겨자, 당근, 김치, 들깨, 두충, 무, 복숭아, 취나물, 호두 등
by http://cafe.daum.net/s8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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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선량(吸收線量)은 방사선이 피폭하는 물질에 흡수되는 단위 질량당 에너지 양을 말한다.
방사선의 수를 표시하는 양은 플루엔스(fluence, 특정시간에 단위면적을 통과하는 입자수), 방사선이 운반하는 에너지 양은 커마(Kerma)로 부르며, 커마와 흡수선량은 피폭받은 물질의 단위질량당 흡수된 평균 에너지 양으로 기본단위는 Joule/kg이고 SI 단위로는 그레이(Gy)다.[1][2]
흡수선량의 국제표준단위인 1Gy는 물질 1kg당 1 Joule(J)의 에너지가 흡수된 양을 뜻하므로
구 단위는 rad 이며, 1 rad 는 100 erg/g 으로 정의되므로,
방사성 동위 원소가 안정화되는 과정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은 물질을 만나면 구성원자에 자신이 갖고 있던 에너지를 전달하며 이온화(ionization) 또는 여기화(excitation) 과정과 같은 전리현상을 일으킨다. 이러한 전리현상 과정에서 방사선이 물질에 전달한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기 위해 방사선이 물질과 상호작용하여 물질의 단위질량당 흡수된 에너지의 양을 방사선 흡수선량으로 정의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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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문화잔재 논란에 휩싸였던 수원8경과 관련, 1912년 매일신보에 소개된 이원규의 수원8경가(水原八景歌)를 최종 수원8경으로 잠정 선정했다고 2일 밝혔다.
시는 수원8경에 대한 저작권 문제와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에 따라 고증에 의한 사실관계 확인작업을 거쳤다.
수원8경에 대한 새로운 입증자료인 이원규의 수원팔경가(水原八景歌)’를 발견했다. 1912년 4월 7일『매일신보』에 ‘수원팔경가(水原八景歌)’라는 이름으로 수원지역에서 회자되던 수원8경을 풀어서 부르는 형식의 속요(俗謠)가 실렸다.
당시 수원군 남부면 남창리 17통 4호에 거주하는 이원규(李元圭, 당시 수원공립보통학교(신풍초교 전신) 교사)가 ‘수원8경가’를 응모해 각지의 기문(奇聞) 현상공모에서 2등으로 당선된 것이다.
이원규가 채록한 수원8경은 다음과 같다. ① 화산두견(花山杜鵑, 화산 숲속에 슬피우는 두견새 소리) ② 나각망월(螺角望月, 방화수류정에서 본 동북각루의 달) ③ 화홍관창(華虹觀漲, 화홍문 7간 수문에 쏟아지는 물보라) ④ 남제장류(南堤長柳, 수원천 긴 제방에 늘어진 수양버들) ⑤ 북지상련(北池賞蓮, 만석거에 핀 아름다운 연꽃) ⑥ 광교적설(光敎積雪, 광교산 정상에서 산록까지 쌓여있는 흰 눈) ⑦ 서호낙조(西湖落照, 서호와 여기산에 비치는 저녁노을) ⑧ 팔달제경(八達霽境, 팔달산 솔숲사이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
이원규의 수원8경가는 1914년에 출간된 사카이 마사노스케(酒井政之助)의 『발전하는 수원(發展せる水原)(1914)』에 각각 수록된 후지노 군잔(藤野君山.1913)과 사카이(酒井政之助)의 수원8경과 나이또오(內藤倫政)의『고적과 풍속(古蹟と風俗)』(1927)보다 앞서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이원규의 수원8경가를 비롯해 수원지역에서 회자되던 수원8경을 일본인들이 변용, 채록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원규의 수원8경과 일본인들이 채록한 수원8경을 비교해 보면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일본인들은 이원규의 수원8경에서 ‘화산두견(花山杜鵑)’ 대신 ‘화산척촉(花山??)’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철쭉이라는 의미의 ‘두견’이라는 용어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사용하는 경우로 중국과 일본은 척촉이라는 용어만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달제경’ 대신 ‘팔달제미’ 및 ‘팔달청람’으로 바꾸었고 ‘나각망월’을 ‘나각대월’ 또는 ‘용지대월’로 바꾸어 사용했다.
오성석 문화관광과장은 “기존의 수원8경이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것이 아니라 이미 수원지역에서 널리 회자되었던 ‘수원8경’을 일본인들이 채록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1912년 매일신보에 소개된 이원규의 수원8경가를 대상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향후 역사적인 자료로 정조시대 춘추8경에 대해서도 고증을 통해 복원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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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이름 스위스(Switzerland)와 문장은 루체른호수와 작은 호수인 라우에르츠(Lauerz) 호수 사이에 위치한 마을 슈비츠에서 기인되었다. 1291년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세 주는 동맹을 맺고 1315년 모어가르텐과 전투를 하여 승리를 얻고 오스트리아 세력을 스위스에서 몰아내었다. 스위스 헌장 박물관에는 동맹 서약서를 포함하여 초기 스위스 연방과 관련된 중요한 서류들이 보관되어 있다.
슈비츠의 사람들이 언제나 부유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부터 슈비츠의 많은 남자들은 어쩔 수 없이 외국 군대의 용병으로 가게 되었다. 그들은 매우 용맹한 전사로 인정을 받았으며, 대다수가 지위와 부를 축적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자랑스럽게 집을 지었고 오늘날 이 건물들은 슈비츠 마을의 상징이 되었다. 슈비츠의 몇몇 개인 주택들은 1609년부터 내려오는 호프슈타트 아이탈 레딩(건물이름; Hofstatt Ital Redding)같은 저택은 스위스에서 가장 웅장한 개인 주택이다.
슈비츠는 하루에 25000개 이상 전세계로 판매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위스 펜나이프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이렇듯, 슈비츠에 대해 알고 있다면 슈비츠 주변의 여행지가 "스위스 나이프 밸리(Swiss Knife Valley)"라는 이름 아래 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름
유명한 ‘산들의 여왕’이라 불리는 길게 이어지는 산등성이 리기와 인접한 산인 프론알프슈톡(Fronalpstock)이 있는 휴가지, 슈투스(Stoos)등 전설적인 두 개의 봉우리가 인상적인 정상 지역이 슈비츠 바로 위에 자리하며, 많은 산중에서 이 지역에서 체험할 수 있는 산이 바로 이 두 곳이다. 슈비츠는 카르스트 지형의 산악 계곡인, 무오타 계곡으로 향하는 관문이 되고 있다.
‘체리 거리('Cherry Street)’ 혹은 키르쉬슈트라세(Kirschstrasse)는 알프스 산자락의 언덕 지역을 통해 이어지며, 대단위의 체리 나무 과수원은 루체른을 시작으로 추크(Zug)를 지나 슈비츠까지 또한 루체른 호수에 위치한 브룬넨으로 향하는 모든 길까지 이어지며 이 곳에서는 증류주에 관해 배울 수 있는 투어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중심에 위치한 덕에 슈비츠는 역사적인 스위스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여행할 수 있는 좋은 기점이 되고 있다.
겨울
슈비츠는 15~20분 거리의 아늑한 스키 지역 세 곳으로 향하는 베이스캠프다. 미텐(Mythen), 슈토스(Stoos), 자텔-호흐슈툭클리(Sattel-Hochstuckli)가 바로 그곳. 스키어, 스노보더, 가족여행자 모두가 다양한 슬로프를 즐길 수 있다. 슬로프 옆으로 조용한 겨울 하이킹 패스도 나 있다. 겨울 여행자들에게 손짓하는 소박한 산장 펍이 마련되어 있다.
하이라이트
- 슈비츠 마을 전경 – 교구교회, 시청과 귀족의 집에 둘러싸여 있는 환상적인 마을 광장은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 중에 한 곳이다.
- 스위스 헌장 박물관(The Museum of the Swiss Charters) – 첫번째로 동맹을 맺은 세 주의 동맹서약서와 다른 서류들이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다.
- 키르쉬슈트라세(Kirschstrasse)- 만발한 체리 꽃에서부터 '키르쉬 거리'를 따라 증류전문가의 실연과 키르쉬(체리로 만든 증류주) 증류 과정을 볼 수 있다.
- 무오타(Muota) 계곡에 자리한 횔로흐(Hölloch) 카르스트 동굴계 – 약 190km에 달하며 유럽에서 가장 긴 동굴이며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동굴계이다. 동굴 답사는 그 일부분만 가능하며 필수적으로 가이드와 함께 동행하여야 한다.
- 스위스 역사 포럼 – 특별전이 열리는 스위스 국립박물관
- 대저택(Stately mansions) – 16, 17세기의 특징이 묻어나는 중부 스위스 문화의 핵심적인 부분
주요 이벤트
카니발 – 이 지역의 전통적인 카니발로, 하이라이트는 가면을 쓰고 하는 행렬이다. (2/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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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卵生) 동물은 어미 안에서 배의 발달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알을 낳는 동물을 말한다. 반의어는 태생(胎生)이다. 젖먹이 짐승이나 원생동물 밖의 동물은 대개가 여기에 속한다. 난생은 대부분의 물고기, 양서류, 파충류, 새, 단공류, 대부분의 곤충, 일부 연체동물과 거미강의 생식 방식이다.
난생 포유동물의 경우 오직 5종만이 알려져 있다: 가시두더지 네 종과 오리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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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 보호
바다가 없다면 우리 인간은 생존할 수 없있습니다. 바다는 우리가 먹는 다양한 수산물의 공급원이자, 산소를 만들어내고, 지구 기후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지구 상의 80%가 넘는 생물이 바닷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바다 없이 살 수 없으면서도, 파괴적 어업으로 바닷속 생태계에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남획과 혼획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전 세계 바다의 40%를 해양보존구역(Marine Reserves)으로 지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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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꽃
|깨꽃|
|생물 분류|
|학명|
|Salvia splendens
KerGawl. 1822
생태[편집]
브라질 원산의 여러해살이풀이나 한국에서는 한해살이풀로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높이 60~90 센티미터 정도이고 곧게 서며 가지가 갈라진다. 잎은 마주나고 긴달걀꼴로 끝이 뾰족하고 밑부분은 넓다. 길이는 5~9 센티미터이고 톱니가 있으며 잎자루는 길다. 꽃은 5~10월에 줄기와 가지끝에 총상꽃차례로 달리고 포엽·꽃받침·꽃부리는 밝은 분홍색이다. 꽃받침은 종모양으로 위쪽 입술끝은 뾰족하고, 아랫입술끝이 2개로 갈라지며 능선이 있다. 수술은 2개이고 분과는 꽃받침 속에 들어 있다. 꽃부리는 길이 5~6 센티미터이며 통부가 길고 윗입술이 아랫입술보다 더 길며, 아랫입술이 3개로 갈라지고 털이 있다.
사진[편집]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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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타이로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시대에 명여우 코미사르제프스카야의 극단에 참가한 것이 그의 연극생활의 제1보이며, 배우 및 연출가로서 각지의 극단에서 일을 한 후, 1914년 모스크바에 카메르느이 극장(Kamerny Theatre)을 창립했다. 카메르느이는 실내를 뜻하는 것인데, 사실 이 극장은 1931년 개축할 때까지는 좌석 750여개의 작은 극장이었다. 문학과 회화로부터 해방된 극장, 율동적인 배우의 동작과 연기, 무대의 입체적 구성과 새로운 의상의 고안, 극과 음악과 무용의 유기적 결합, 이것이 카메르느이 극장이 내건 슬로건이었다.
초기의 카메르느이 극장은 오페레타, 비극, 소극(笑劇) 등 여러 장르의 각본을 취급했으나 그 레퍼토리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그 하나는 타이로프의 아내이며 수석여우(首席女優)인 아리사 코넨을 주역으로 하는 <안티고네> <살로메> 등의 비극이나 드라마, 다른 하나는 <싸구려 오페라> <낮과 밤>으로 대표되는 오페레타이다. 그리고 이 양자에 공통되는 것은 새로운 형식과 기교의 끊임없는 탐구에 있었다. 그러나 30년대의 러시아 예술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의 풍조는 이 극장을 형식주의로부터 탈피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1933년의 비시네프스키의 <낙천적 비극>의 상연은 새로운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이 극장의 하나의 도표가 되었다. 무대의 요소를 모두 작품의 이념 해명과 표현에 종속시키고, 올바른 현대인의 형상(形象)을 창조하려는 타이로프의 노력은 전후의 여러 작품에서 열매를 맺었다고 하는데, 그는 최후까지 모더니즘과 유미주의의 무거운 짐을 버리지 못한 듯하다. 이른바 지다노프 비판 후, 1950년 카메르느이 극장은 36년간의 역사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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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
|프랑스의 군주|
|재위||1715년 ~ 1774년|
|별명||친애왕|
|왕비||마리 레슈친스카|
|이전 왕||루이 14세|
|다음 왕||루이 16세|
|왕가||부르봉|
루이 15세(프랑스어: Louis XV, 1710년 2월 15일 - 1774년 5월 10일)는 1715년 9월 1일부터 그가 죽은 1774년까지 59년 동안 프랑스와 나바라를 통치한 왕이다. 다섯 살에 왕위에 오른 루이는 자신의 열세 번째 생일 날짜인 1723년 2월 15일까지 그의 재종조부이자 이복 왕고모부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섭정과 함께 통치하였다. 그 뒤로는 자신이 직접 정식으로 국가를 다스렸다. 이때 플뢰리(André-Hercule de Fleury)를 재상으로 등용, 평화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3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48년)에 휩쓸렸으며 이어서 7년 전쟁(1756~63년)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7년 전쟁에서는 해상과 인도(印度) 및 미국 식민지에서 패배하여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으며, 많은 비용의 지출은 재정난을 초래하였다. 로렌의 병합(倂合)(1766년)과 코르시카의 구입(1768년)은 그의 치세(治世)때이다. 정치상에서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 뒤바리 백작 부인 등의 충동으로 인하여 실패가 많았고, 계몽사상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부르봉 왕조의 절대주의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이다. [1]
갑작스럽게 죽은 대부분의 왕족보다 오래 살아남은 그는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인자한 행동으로 명성을 얻어 “친애왕” (le Bien-Aimé)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백성이 그의 결핍된 도덕성과 프랑스와 군주 정치를 효과적으로 개선하지 못한 점 그리고 외교 정책의 실패를 지각하면서 그에 대한 애정이 식자, 결국 그는 프랑스의 인기 없는 왕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역사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루이 15세를 무자비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그가 실제로는 매우 지적이며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통치하는 과업에 일신을 바쳤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가 통치기간 내내 나쁜 결과만 가져온 이유는 전제군주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뿌리 깊은 소심함과 문제를 앞당겨 혼란만 가중시키는 인식 때문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린 나이에 일찍 어머니를 여의어 위안을 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를 갈망했던 그는 자신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한 여자를 찾고자 1745년 이후 많은 여인을 가까이하여 나라 살림을 소홀히 하고 나라 재정에 큰 손실을 냈으며, 이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어린 시절[편집]
탄생[편집]
루이의 어머니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는 사보이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오를레앙의 안나 마리아의 장녀이다. 루이와 마리 아델라이드는 1697년 토리노 조약에 의해 약혼하였으며, 1697년 12월 7일에 결혼하였다. 당시 왕실 간 결혼에서는 드물게 두 사람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였으며, 귀족들 뿐만 아니라 왕족들 사이에서조차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하였다. 루이 14세는 활발하고 젊은 여자였던 마리 아델라이드를 처음부터 몹시 귀여워하였다. 그녀의 젊음과 활기는 늙은 왕의 궁정에 활력을 불어 넣어 다시 젊어지게 하였다. 그 결과, 그녀는 베르사유의 인기거리가 되었다.
유년기와 비극적인 죽음들[편집]
회춘한 부르봉 왕조에는 당시 왕위 계승자가 3대에 걸쳐 여섯 명이나 있었기 때문에(아들 하나, 손자 셋, 증손자 둘) 혈통의 장래가 안전한 것처럼 보였다. 1710년에 부르고뉴 공작의 첫 아들이 탄생하자 루이 14세는 자신이 프랑스 역사상 아직 건강하고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있을 때에 증손자가 생긴 최초의 왕이라고 외치며 기뻐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왕실의 외양과 미래를 극적으로 바꾸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1700년, 루이의 숙부인 앙주 공 필리프가 스페인의 공주이자 루이 14세의 아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테레즈의 요구에 따라 왕관을 물려받아 스페인의 펠리페 5세가 된 것이다. 펠리페 5세가 즉위하자 루이 14세는 프랑스 왕좌에 대한 그의 권리를 비준하였는데, 이것은 상속에 대한 프랑스의 구체제 헌법에 준거한 법률의 문제로서 바꾸거나 삭제할 수 없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이 일부 확정되면서, 프랑스-스페인에 대해 온 유럽이 두려워하거나 지나칠 정도로 우호적인 견지를 취한 결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의 방향은 프랑스 쪽이 불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으며, 펠리페 5세가 스페인의 왕좌에 앉아있는 한 평화는 멀어보였다. 1711년-1712년 사건 때문에 형세는 더욱 나빠졌다.
1711년 4월, 도팽 루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부르고뉴 공작이 새 도팽이 되었다. 루이 14세와 펠리페 5세는 불안하긴 했지만, 부르고뉴 공작의 두 아들, 즉 2남(男)인 브르타뉴 공작 루이와 3남(男)으로 훗날의 루이 15세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상황이 급변하는데, 마리 아델라이드가 천연두(또는 홍역)에 걸려 1712년 2월 12일에 세상을 떠나자 늙은 왕은 망연자실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병을 앓는 동안 줄곧 그녀의 옆을 지켰으며, 아내가 죽자 비탄에 잠겼다. 그리고 주간이 끝나기 전에 그 역시 아내와 같은 병에 걸렸다. 부르고뉴 공이 죽은 지 일주일 만에 두 아들 또한 감염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맏이인 브르타뉴 공작 루이는 계속적으로 사혈 치료를 하며 애를 썼지만 결국 1712년 3월 8일에 죽었다. 그의 동생 앙주 공작은 형제의 가정교사 마담 드 방타두르가 어떠한 사혈 치료도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며, 병에 시달리는 그를 직접 간호하였다. 슬픈 사망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1714년에는 그랑 도팽의 막내아들 베리 공작이 사냥하던 도중에 사고를 당해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리하여 루이 14세는 겨우 3년 만에 연달아 네 명의 후계자를 잃어버렸다. 이제 왕조의 운명과 유럽의 평화는 네 살밖에 안된 어린아이의 생존 여부에 달렸었다. 루이 15세는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감시와 보호를 받았으며, 그 때문에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매우 잘 인식하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그에게는 형제·자매도, 적출인 숙부(마드리드에 있었으며 그와 결코 만난 적이 없었든 펠리페 5세는 제외)나 고모, 친사촌(마찬가지로 마드리드에 있었던 사촌들은 제외)도 없는 고아였기 때문에 평생 의리나 의무를 나눌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루이 15세의 인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를레앙 공의 섭정 정치[편집]
루이 15세가 나랏일을 하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사위이며, 루이15세의 재종조부이자 왕고모부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가 1723년까지 섭정을 맡아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루이 14세는 섭정의 전횡을 우려해 그의 서자인 멘 공과 툴루즈 백작에게 권력을 분산시키는 유언을 남겼지만, 오를레앙 공은 고등법원(Parlement)의 도움으로 그 유언을 무효화시켰다. 오를레앙 공은 그 대가로 고등법원의 간주권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의 이러한 처사는 루이 14세 하에서 억압받았던 고등법원의 권리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게다가 그는 국왕참사회의 의견을 각별히 존중함으로써 귀족들의 권력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루이 14세가 탄압한 얀센주의자들을 해방시켰으며, 외교적으로 프랑스와 적대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도 화해하였다. 한마디로 그의 정치는 루이 14세에 대한 반동의 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
오를레앙 공과 자유롭게 강력해진 귀족들은 그 시대를 방탕과 스캔들로 물들였다. 16세기 이래 확립된 귀족들의 우아하고 세련된 양식은 그 시대에 향락과 방탕에 젖어 도덕적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 환락을 즐기는 오를레앙 공은 100여 명의 애첩을 두었고 궁정에는 추잡한 정사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러는 동안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전쟁과 외교 정책[편집]
플뢰리는 즉각 오를레앙 공을 제거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해 프랑스의 경제를 부흥시켰다. 플뢰리는 영토 확장에도 주력해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의 분쟁에 개입하여 로렌 지방을 확보하였다(1766년). 1733년 폴란드의 왕,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하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작센 선제후를, 프랑스는 왕비의 아버지인 스타니슬라스 레친스키를 새 왕의 후보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분쟁(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3~38년)은 빈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1738년). 그 조약에 의해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렌 공 프랑수아의 결혼이 성립되었고 로렌 지방이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플뢰리는 이후 또다른 대외 전쟁에 휘말려들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국민들의 신임도 상실하였다. 그것은 바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48년)이었다. 1740년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6세가 사망하면서 제위 계승 문제가 부각되었다. 황제는 자신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제위와 영토를 상속하고 싶어 생전에 이미 국사칙령을 선포하고 제후들의 동의를 얻어둔 터였다. 국사칙령은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전통적인 게르만 법에 반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의 제위 상속을 규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카를 6세가 서거하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 뒤를 계승하자 제후들은 그 칙령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프로이센은 칙령을 무시하고 실레지아를 점령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프로이센에 저항하였고 이에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프로이센을 지지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1748년 엑스 라 샤펠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제위가 인정되었고 프로이센은 패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레지아 지방을 그대로 보유하였다. 정작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패전으로 인해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정부가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손실을 ‘5퍼센트세’를 신설해 해결하려고 하자 국민들의 불만이 더욱 증가하였다. 결국 5퍼센트세는 고등법원의 반대에 부딪혀 실시되지 못하였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유럽만이 아니라 해외 식민지에까지 확대되어 프랑스의 식민 정책에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경쟁은 17세기 이래 계속되어온 것이었다. 서인도 제도에서는 영국령의 자메이카와 프랑스령의 산토도밍고, 북아메리카에서는 대서양 연안에 자리 잡은 영국과 루이지애나에 자리 잡은 프랑스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인도에서는 프랑스의 동인도회사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각각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이후 7년 전쟁을 계기로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경쟁에서 영국에 대한 우위권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서 실레지아를 획득한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2세하에서 점차 강력해졌다. 프로이센의 세력 확대는 프랑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프랑스는 200년간 외교적 숙적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화해하여 프로이센을 견제하려 하였다. 오스트리아 역시 실레지아 지방을 회복하기 위해 프로이센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터라 화해는 쉽게 이루어졌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외에도 러시아를 끌어들여 프로이센에 대항하였고 이에 프로이센은 영국의 지지를 얻어 맞섰다. 전쟁은 7년 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흔히 7년 전쟁으로 불린다. 이 전쟁은 실레지아 영유권 때문에 일어났지만 전 유럽 국가들이 개입하였고, 지역적으로도 해외에까지 확대되어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쟁탈전의 양상까지 띠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도 프랑스는 패배하였다. 프랑스는 1763년 파리 조약에 의해 캐나다의 왼쪽은 영국에게, 오른쪽은 에스파냐에게 양도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장악하였다. 프랑스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설탕산지인 서인도 제도를 계속 보유한 점인데 국내의 여론이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튼 7년 전쟁에 의해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국으로 급격히 부상했고 영국은 세계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반면 프랑스는 루이 14세 시대의 영광을 상실하였다.
루이 15세의 전적인 신임을 받았던 플뢰리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중인 1743년에 사망하자 루이 15세가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745년부터 그의 애첩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그녀가 사망한 1764년까지 실제로 궁정의 대소사를 좌우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20여 년 동안 프랑스 정치를 좌우했다. 그녀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후원하였고 정부 고관의 임명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쇼아죌이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것도 그녀의 덕분이었다. 쇼아죌은 외교적으로는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국내적으로는 예수회를 억압하고 얀센주의자와 국교회주의자, 계몽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등법원이 일으키는 각종 정치적 혼란과 왕권에 대한 도전을 해결하지 못하고 1770년 해임되었다.
사법 개혁[편집]
루이 15세는 쇼아죌을 해임시킨 후 대법관 모푸를 중심으로 고등법원에 대한 대대적인 사법 개혁에 착수하였다. 모푸는 1771년 2월 칙령을 발표하여 파리 고등법원의 재판 관할 구역을 6개의 신설 법원으로 분할시켰으며, 고등법원의 법관들도 국왕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재정 문제가 점점 약화되면서 모푸의 인기가 하락하였고, 그 결과 그의 사법 개혁도 실패하였다. 그 와중에 퐁파두르 후작 부인 외에 루이 15세의 또다른 애첩인 뒤바리 백작 부인이 나타나면서 국민들의 원성은 날로 커졌다. 궁정의 사치와 계속되는 전쟁 때문에 재정이 더욱 악화되었고 새로운 과세안이나 증세는 고등법원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하였다.
말년[편집]
가족 관계[편집]
- 마리 레슈친스카
- 마이 부인
- 뱅티미유 부인
- 샤토루 공작 부인
- 퐁파두르 후작 부인
- 뒤바리 백작 부인
각주[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 〈루이 15세〉.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초기에는 오를레앙공(公)이 섭정(攝政)을 담당하였으나, 1726년부터는 친정(親政)하여 플뢰리를 재상으로 등용, 평화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폴란드 계승전쟁(繼承戰爭),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 휩쓸렸으며 이어서 7년전쟁(七年戰爭)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7년전쟁에서는 해상과 인도(印度) 및 미국 식민지에서 패배하여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으며, 많은 비용의 지출은 재정난을 초래하였다. 로렌의 병합(倂合)과 코르시카의 구입은 그의 치세(治世)때이다. 정치상에서는 퐁파두르 부인과 뒤바리 부인 등의 충동으로 인하여 실패가 많았고, 계몽사상(啓蒙思想)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부르봉 왕조의 절대주의(絶對主義)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이다.
|전 임
루이 14세
(재위 1643 - 1715)
|프랑스의 군주
1715년 9월 1일~1774년 5월 10일
|후 임
루이 16세
(재위 1774 - 17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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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몬토사우루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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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몬토사우루스
화석 범위: 백악기 후기
에드몬토사우루스의 두개골
|생물 분류|
|학명|
|Edmontosaurus
Lambe, 1917
에드몬토사우루스(Edmontosaurus|Edmontosaurus)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약 7,300만년~6,600만년 전) 오늘날의 북아메리카 대륙 서부에 서식했던 조각아목의 초식공룡이다. 에드몬토사우루스 학명의 유래는 최초 화석이 발견된 캐나다 앨버타 주의 에드몬토에서 유래한다. 에드몬토사우루스의 몸 전체 크기는 약 9~13m정도이고, 체중은 3~4t이나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빨은 최대 2000개가 있고, 이것으로 판단해 볼 때 입속에서 앞뒤로 음식물을 움직이면서 먹는 것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글은 공룡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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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바로스는 40여년간 몰디브 환경을 위해 앞장서 왔습니다. 기존에 산호 둘러 쌓여 있는 해변과 코코넛 야자수 그리고 사람이 살지 않던 자연적인 섬의 환경은 바로스 리조트의 에코 시스템을 통해 훼손되지 않게 보전하고 있습니다.
바로스 몰디브는 이젠 환경을 생각하는 력셔리 리조트로의 역할을 표방하고 있으며, 이는 몰디브의 실용적이고 지속적인 목표입니다.
리조트의 역할
바로스 몰디브는 이젠 환경을 생각하는 력셔리 리조트로의 역할을 표방하고 있으며, 이는 몰디브의 실용적이고 지속적인 목표입니다.
물은 정화된 뒤에 정원 관개수로 재사용됩니다
- 수명이 긴 붉은 조명시스템과 낮은 전기 소비량을 기준으로합니다
- 모든 에어컨은 프레온가스를 쓰지 않습니다.
- 게스트 빌라는 열교환 시스템이 장착되어있어 온수를 데우는데 사용됩니다.
- 스탭들의 숙소와 back-of-house 공간은 섬의 발전기에 설치된 열교환 시스템에서 온수가 제공됩니다
- 모든 청소-부엌, 레스토랑, 공공장소, 스탭숙소, 게스트빌라, 보트, 세탁에 쓰이는 화학제품은 환경친화적입니다.
- 생태 문제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마을과 섬 탐방, 다이빙, 낚시 체험 같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다에서의 역할
몰디브의 산호초들은 매년 수천명의 방문객들을 스노클링과 다이빙으로 이끄는 가장 멋진 장관입니다. 문자그대로의 의미뿐 아니라 몰디브 사람들이 의존하고 있는 관광 산업을 유지하는 면에서도 그것들은 단지 관광명소가 아니라 몰디브의 기틀입니다
산호초가 파괴된다면 관광과 어업 모두 중단될 것입니다. 몰디브의 존재를 위해 필수적인 산호의 가치와 취약성을 이해하고 고려해야 합니다.
- 방문객들은 산호초를 소중히 다루며 산호가 부숴지거나 깨지지 않게 유지해야합니다.
- 몰디브에서는 해변에서 산호나, 조개 또는 다른 기념이 될만한 것들을 수집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인지해야합니다
- Turtle shell(별갑)으로 만들어진 어떤 기념품도 구입하는 것은 불법이며, 공항 통과시 압수되며 벌금이 부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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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터
퓨터(pewter) 또는 백랍(白鑞)은 그릇이나 펜던트를 만드는 금속의 일종이며, 주석과 납의 합금이다. 전통적으로 주석의 함량은 80~90% 정도이며, 안티모니, 구리, 비스무트, 납을 더하기도 한다. 땜납도 비슷하긴 하지만, 땜납은 주석 함량이 약 60%이기 때문에 훨씬 불에 잘 녹는다. 잘 녹고 모양이 잘 만들어져, 식기나 펜던트로 자주 만들어졌었다.
역사[편집]
퓨터가 처음 쓰였던 때는 아시아의 동기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발견된 가장 오래된 퓨터 조각은 기원전 1450년경에 썼던 것으로 추측되는 이집트의 무덤에서 발견된 퓨터 조각이다. 그로 인하여 약 기원전 1500년부터 퓨터를 썼을 것이라고 짐작하고있다.
모양 만들어내기[편집]
펜덴트를 만드는 방법은, 퓨터는 가스를 이용한 불을 이용한다. 퓨터에 불을 가까이 대서 열을 가하면 퓨터가 액체 상태가 된다. 액체 상태의 퓨터를 플라스터 틀이나 나무틀에다가 붓고 퓨터가 색이 변할때까지 기다린다. 색이 변하면 물안에 넣고 꺼내는 작업을 반복한다. 그러면 퓨터의 모양새가 완성이 된다. 모양을 파일, 사포, 버퍼 등으로 다듬으면 모양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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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s a language called Guugu Yimithirr (spoken in North Queensland,
Australia) that doesn't have words like left and right or
front and back. Its speakers always describe locations and
directions using the Guugu Yimithirr words for north, south, east, and west. So,
they would never say that a boy is standing in front of a house; instead, they'd
say he is standing (for example) east of the house. They would also, no doubt,
think of the boy as standing east of the house, while a speaker of
English would think of him as standing in front of the house. Has our language
affected our way of thinking? Or has a difference in cultural habits affected
both our thoughts and our language? Most likely, the culture, the thought
habits, and the language have all grown up together.
호주의
북 퀸즈랜드 지방에서 사용되는 '구우구 이미티르'라는 언어가 있다.
그 말에는 왼쪽, 오른쪽 또는 앞, 뒤와 같은 낱말이 없다. 그 지역 사람들이
위치와 방향을 표현할 때는 언제나 구우구 이미티르어의 동, 서, 남,
북 따위의 어휘를 사용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아이가 집 앞에 서
있다'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 그 보다는 가령, '그 애는 집의 동쪽에
서 있다'라고 서술한다. 그네들은 진실로 소년이 집 동쪽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영어를 쓰는 사람은 그 아이가 집 앞에 서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 아니면,
문화관습의 차이가 우리의 생각과 언어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아마도,
문화, 사고방식 그리고 언어는 모두 함께 자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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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오늘날에는 많은 국가들에서 헌법이나 법률로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언어를 국어로 규정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동시에 공용어와 일치하나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다. 주로 사용하는 언어 이외의 다른 언어들이 소수언어로서 공식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국어와 공용어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가령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은 불어나 영어를 공용어로 규정하지만, 국어로는 여러 다른 언어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민족의 언어관습으로부터 역사적으로 발생되고 사용되어 온 국어나 소수어를 설명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자연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한국에서의 국어[편집]
의미[편집]
어원[편집]
이후 국민이 자연스럽게 형성한 말이면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라는 의미로서의 국어는 근대국가의 개념이 형성된 19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말이라는 설이 있으며, 그 시점은 갑오개혁 이후에 한국어의 말와 글이 국어와 국문으로 불리기 시작한 이후, 1898년에 나온 책 《국어문법》이나 국어 연구단체인 〈국어연구학회〉(1908년)등의 도서명, 단체명 등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한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는 주시경 선생이 "국어"라는 용어의 사용을 강조하면서 이들 도서의 출판, 단체 등에 가담하면서 확산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2]
한편 이 무렵 "국어"라는 용어가 확산된 것은 일제강점기와 무관하지 않다고도 하며, 이는 먼저 "국어"의 용어를 확산시킨 일본에서는 근대 국가의 확립뿐만 아니라 당시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언어를 종속어로 규정하기 위해 국어라는 용어를 확산시켰다고 하며, 여기서 국어는 민족 - 국가 - 국어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논리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관점이 당시 식민지 조선에 들어오면서 국어를 정의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국가가 없는 식민지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족 - 국어 정도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도 주장한다.[3]
한자문화권에서의 국어[편집]
국어(國語)라는 용어는 한자 문화권의 국가에서 자국의 언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자국의 언어만을 뜻하거나, 다른 나라의 말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중국어 사용자들이 말레이어를 '궈위'(중국어: 國語)라고 부른다.
- 중화민국에서 중국어를 '궈위'(중국어: 國語)라고 부른다.
- 일본에서 일본어를 '고쿠고'(일본어: 国語)라고 부른다.
다른 나라의 경우[편집]
핀란드[편집]
아일랜드[편집]
룩셈부르크[편집]
싱가포르[편집]
각주[편집]
|위키낱말사전에 이 문서와 관련된 글이 있습니다.|
- 강신항 1987/1990
- 고영근 1983/1994, 백두현 2004
- (최현배 1930/1987: 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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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네그로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거점|| 몬테네그로 26만명
세르비아 6만명
크로아티아 4천명
미국 3만명
|언어||몬테네그로어|
|종교||몬테네그로 정교회|
|관련민족||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역사[편집]
|이 문단은 위키백과의 편집 지침에 맞춰 다듬어야 합니다. 더 좋은 문단이 되도록 .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초기에는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왔다. 1852년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몬테네그로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한 몬테네그로는 사실상, 몬테네그로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1918년에 세르비아에 합병되어서 몬테네그로의 역사는 세르비아의 역사하고 유사한 방식으로 몬테네그로인은 세르비아와 비슷해지도록 살게 한 것이다. 2006년 6월 5일 완전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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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은 곧 제주도이며 제주도가 곧 한라산이다. 제주도 해안지역을 보면 광대한 평원 같다. 그러나 완벽히 수평인 평야지대는 없으며, 해수면에서부터 1, 2, 3, 4, 5m…로 조금씩 고도가 높아져가다가 이윽고 해발 1950m의 한라산정에서 모든 평원이 만난다. 그러므로 한라산을 싹뚝 깎아내면 제주도는 곧 바다가 되어버리고 만다.
한라산을 멀리서 보면 동그란 산정에서부터 해안지방까지 납작한 접시 아니면 방패를 엎어놓은 것 같으니, 곧 방패 순(楯)자를 쓴 순상화산(楯狀火山)이다. 이렇듯 순하게 솟아 오른 한라산이지만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지리산 1915m보다 35m가 더 높은 1950m다.
한라산은 120만~30만년 전 화산활동으로 제주도가 바다 위로 떠오른 뒤, 30만~10만년 전에 걸친 3단계 화산활동시 분출한 용암류에 의해 솟아났다고 한다. 그 다음 10만~2만5천년 사이에 보글보글 팥죽 끓듯 수백 개의 오름(기생화산)들이 분출했다고 한다. 한반도 내륙은 적어도 5억년쯤 전에 육지화했다고 하니, 이에 비하면 한라산은 참으로 젊은 산이다.
한반도 내륙의 산들은 이미 수억년간 침식을 받은 데 비해 한라산은 고작 10만년이라, 한라산릉과 계곡의 형상은 매우 독특하다. 능선은 아직 두루뭉술한데, 계곡은 삼각 조각칼로 파낸 듯 깊고 좁다. 한편, 제주도는 연평균 기온이 15.5도, 강수량은 1800㎜로서, 강원도 지방이 연평균 10도에 1200㎜인 데 비하면 매우 고온다습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지역 한가운데 해발 1950m까지로 솟은 한라산이기에 고도에 따른 식생의 분포가 유달리 다양하다. 한라산의 식물종은 총 1600여종에 희귀종만도 150종이 넘는다고 한다. 이렇게 독특한 경관, 동식물상을 가진 한라산은 이미 1966년 천연보호구역으로, 1970년 149㎢가 제7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한라산은 남다른 높이와 지형적 특징, 식생 등의 덕분에 계절마다 모습도 크게 달라진다. 한겨울에는 찬란한 은령(銀嶺)으로 일어서는가 하면, 봄이면 붉디붉은 진달래밭, 철쭉밭을 이룬다. 한여름에는 멀리 심해에서 얻어왔음직한 톤의 짙은 초록빛 향연을 펼치며, 가을이면 그 숲은 느닷없이 페르시아 융단으로 화하는 마술을 부린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로 가도 좋은 한라산이다. (안중국 월간산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기타 정보
□ 입산·하산 시각 : 한라산국립공원은 탐방객의 안전을 위해 기점별로 입산 시각과 하산시각을 정해 놓았다.
◆동절기(11~2월) ◇입산 △어리목·영실=12:00 △관음사=09:00 △진달래=12:00 △어승생악=16:00 ◇하산 △윗세오름=15:00 △동릉 정상(정상통제소)=13:30
◆춘추절기(3, 4, 9, 10월) ◇입산 △어리목·영실=14:00 △관음사=09:30 △진달래대피소=12:30 △어승생악=16:30 ◇하산 △윗세오름=15:00 △동릉 정상=14:00
◆하절기(5~8월) ◇입산 △어리목·영실=15:00 △관음사=10:00 △진달래대피소=13:00 △어승생악=17:00 ◇하산 △윗세오름=17:00 △동릉 정상=14:30.
* 야간산행 금지를 위해 일몰 2시간 전부터 일출 2시간 전까지 입산을 금지시키고 있다.
□ 자연휴식년제 구간(03년 3월~05년 2월)
등산로 출입제한구역 거리(km)
어리목~윗세오름 - 서북벽 1.3
영실~윗세오름 → 남벽 2.8
돈내코~윗세오름 → 정 상 9.4
백록담 순환로 1.3
□ 공원 입장료(개인/단체) : 어른 1600/1400원, 청소년 600/500원, 어린이 300/250원
□ 주차료 : 이륜차 500원, 경승용차(800cc 이하) 1000원, 승용차 1800원, 소형버스 3000원, 소형버스 3000원, 대형버스 3700원
□ 관음사 야영장 사용료(1박) : 소형(3인 이하) 3000원, 중형(4~9인용) 4500원, 대형(10인용 이상) 6000원. 샤워장사용료 어른 600원, 청소년 400원, 어린이 300원.
□ 본소 및 매표소 전화(지역번호 064)
어리목본소 713-9950(~3)
영실지소 747-9950
성판악매표소 725-9950
윗세오름대피소 743-1950
관음사매표소 756-9950
[한라산] 지금 한라산에 가면… TOP
▲ 숲길로 이어지는 한라산 성판악 코스. 상고대가 찬란하게 피어 있다. 제주=허재성기자
3월의 한라산은 종종 엄동설한의 2월보다도 더 겨울 같다. 산 기슭은 노란 유채꽃과 나른한 아지랑이로 완연한 봄일 때도 한라산중은 1m가 넘는 적설과 찬란한 설화, 상고대로 백색의 천국을 이루곤 한다. 2월 말 현재 한라산은 상고대 천지라는 것이 제주도 사진작가들의 말이다. 그 추운 3월의 한라산을 찾아 봄속의 한겨울을 만나보자. 온 산이 얼어붙었다가 화창하게 하늘이 개면서 따스한 햇살에 상고대와 설화가 뚝뚝 목련 떨어지듯 하는 모습도 3월 한라산행에서나 가능한 색다른 멋이다.
어떤 이는 지리산이 어머니산이고 설악산이 절세미인이라면 한라산은 부성(父性)이 강한 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별달리 멋을 부리지 않고 불룩 솟아 올랐으며 슬하에 수백의 자녀로 오름들을 거느린 한편 내리뻗은 산릉들이 잔 멋을 부리지 않고 굵게 뻗고 있다. 한라산의 이러한 면면이, 휴화산인 백두산이 그렇듯 남성적 산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라산행의 또 다른 멋은 이러한 굵고 듬직한 능선을 따라 오르며 무수한 새끼 화산-오름들의 올망졸망한 모습과 그 뒤의 푸른 바닷물이 어울린 광대한 풍광을 보는 데 있다. (안중국기자 email@example.com)
[한라산] 군침도는 특산물 수두룩
▲ 풍미진 흑돼지 오겹살.
한라산 높이 1950m는 "한번(1) 구경(9) 오십(50)시오"로 풀이된다. 그렇지만 산행길에는 먹을 곳이 없다. 멀리 한라산을 바라다보는 곳에서 찾아야만 한다. 인구 55만4000명의 제주도의 식당 숫자는 5500개. 연간 제주도를 찾는 외지 손님들은 490만명이다. 제주도는 자리물회, 성게국, 오분자기뚝배기, 흑돼지고기, 꿩감자국수, 옥돔, 전복죽, 말고기뷔페 등 전통적인 향토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 별미천국이다. (지역번호 064)
●풍미진(784-9292)
유기농청정흑돼지오겹살 전문점. 현지 명사들이 각종 모임을 즐겨 갖는 명소. 남조로(1118번 지방도) 검문소 사거리에서 조천 방향 150m 지점,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다. 제주시 중심가에서 차편으로 15분 거리. 텃밭에서 눈을 맞고 자란 쌈배추 시금치 갓 등의 채소들이 식탁에 오른다. 흑돼지 오겹살 1인분 9000원. 돼지양념갈비(1대 3000원)도 대단한 인기다. 벽면 전체를 덮은 서예작품(목인 김영준)과 서각작품(우현 강영자)이 볼거리다.
●할머니집(784-5650)
작은 식당규모에 크게 소문난 멸칫국(3000원)집. 순대국밥(3500원)도 차려낸다. 풍미진에서 조천방향 200m 거리. 조천읍 와흘리.
●괸당네식당(787-1055)
성읍민속마을에 있는 꿩지슬국시(6000원)집. 향토민속방언연구가임을 자임하는 집주인 김동익씨의 제주사투리가 명품. '괸당'은 '친척', '꿩지슬국시'는 '꿩감자국수'의 제주사투리다.
●바스메(787-3930)
말목장을 갖고 있는 말고기요리 전문점. 말고기 햄버거스테이크, 육회, 로스구이, 내장, 갈비찜, 사골탕으로 상차림을 한 '말 한 마리 뷔페' 1인분이 1만5000원. 각종 성인병 예방에 특효라는 소문으로 부모님께 권하는 효도음식이 되고 있다. 97번 동부관광도로 조랑말타운 건너편에 위치. 바스메는 식당인근에 있는 작은 오름 이름이다.
●성복식당(757-2481)
구시가지 건입동 서부두 어시장 입구에 있는 고등어와 갈치요리 전문점. 회와 조림으로 차려낸다. 서울 강남점(역삼동)을 열 만큼 유명한 집인데 업주 이성춘씨는 선친과 함께 갈치잡이 어부 출신이고 어머니는 해녀였다. 식당 건녀편은 수협공판장이다.
●꿩땡기는 날(752-1003)
시청 정문 동쪽 사거리에 있는 꿩고기 전문점. 꿩칼국수 3500원. 꿩메밀칼국수 4500원. 꿩만두 4000원. 꿩샤브샤브 1만8000원. 꿩한마리코스(샤브샤브 + 버터구이 + 탕) 3만5000원. 30명 동시 수용.
●장가네해장국(744-5557)
토박이가 전국 어느 지역 사람이나 모두의 입맛에 맞는 해장국을 개발했다는 평가의 집. 신시가지 연동 숙박시설 밀집지역 뉴크라운관광호텔 뒤쪽. 24시간 영업. 해장국 5000원.
●비경회관(711-0033)
용두암 옆 전망 좋기로 소문난 곳에 멋지게 잘 지은 집. 옥돔정식, 활어회, 전복죽, 매운탕을 차려낸다.
●산지로(747-1889)
노형동의 유명한 삼계탕집 비원(746-0295)과 이웃한 자리물회와 갈칫국(각 6000원), 성게국과 옥돔국(각 8000원)의 명소.
●마법의 성(796-7000)
흰 눈 덮인 한라산 정상부가 멀리 보이는 한림읍 금릉리 12번 일주도로 변, 파란 바닷가의 3층집 카페. 잔잔한 음악, 평화로운 실내 분위기가 편안한 외갓집 같다. 2층은 매우 흥미롭고 특이한 시설의 방 5개로 민박손님을 가족처럼 맞는다. 이른 아침 신혼부부에게는 커피와 토스트를 대접하고 노년 손님들에게는 청정해산물로 부드러운 어죽을 끓여낸다. 파도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비양도가 눈앞으로 다가서는 협재해수욕장 바닷가에는 가족 3대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별채도 지어 놓았다. (박재곤·산악인 ‘산따라 맛따라’ 저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한라산 등산로는 성판악~백록담(동릉 정상 9.6㎞), 관음사~백록담(동릉 정상 8.7㎞), 어리목~윗세오름, 영실~윗세오름 4개 코스가 개방돼 있다. 백록담을 보는 게 목적이라면 성판악~백록담~관음사 코스를 택한다. 한라산다운 독특함과 웅장함, 산자락에 올망졸망 형성된 오름을 조망하려면 윗세오름(영실 3.7㎞ 어리목 4.7㎞) 코스를 택하는 게 바람직하다. 단, 어리목과 관음사 코스는 계곡 물이 불어나면 통제하는 구간이 있으니 출발 전 상황을 확인토록 한다. 한라산은 봄가을 건조기 산불예방기간과 관계없이 탐방로를 개방한다. 단, 태풍이나 폭설 등의 기상이변이 일어날 때는 철저하게 통제한다.
■백록담 동릉 정상 등로 : 현재 개방돼 있는 탐방로를 따라 오를 수 있는 최고 지점이 한라산 정상 부악의 동릉 정상이다. 대개 경사가 완만한 성판악 코스로 백록담 동릉 정상까지 오른 다음 용진각대피소와 개미등을 거쳐 관음사로 내려선다.
매표소~동릉 정상 간 3분의 2 지점인 진달래대피소까지는 숲길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도중에 사라악약수와 사라대피소가 쉼터로 이용된다. 조난자 구조를 위해 공원 직원들이 매점을 운영하며 상주하는 진달래밭대피소를 지나면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조금씩 경관이 트이고, 날씨가 좋으면 한라산 동쪽에 산재한 오름의 무리를 감상하면서 오를 수 있다. 부악 동릉 정상에서는 백록담 분화구 안이 잘 내려다보인다.
관음사 코스는 한라산 북면의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백록담 북릉을 타고 왕관릉을 지나 가파른 내리막길로 내려서면 용진각대피소가 나타난다. 구 대피소를 지나 두 번째 계류에서는 한겨울에도 물을 뜰 수 있다.
계류를 건너면 거대한 삼각봉(1695m) 급경사 절벽 밑으로 올라선다. 이곳부터 용진굴과 개미목 부근까지가 관음사 코스에서 경관이 가장 뛰어난 구간이다. 과거 여러 차례 눈사태 매몰사고가 일어났던 곳으로, 낙석방지 그물망이 설치돼 있다.
개미목에서 개미등 능선으로 올라선 이후로는 계속 완경사 내리막이다. 개미등이 끝을 맺는 탐라계곡대피소 이후 산죽밭 사잇길을 따르면 관음사 매표소로 내려선다.
두 코스를 연계해 백록담을 오르는 산행은 한라산에서 가장 긴 코스다. 공원 내에 취사와 야영은 금지되어 있으니 도시락과 행동식, 식수 등을 충분히 준비하고 출발하는 것이 좋다. 산행시간은 9시간 정도 걸린다.
■영실기암과 화구벽 압권인 윗세오름 코스 : 정상을 오르지 못함에도 동릉 정상 코스에 비해 압도적일 만큼 많은 탐방객이 찾는다. 산세와 조망이 독특하고 산행 시간이 4시간 안팎으로 적당하기 때문이다.
영실 코스가 ‘오백나한’이라 일컬어지는 기암과 화산 특유의 자연을 보여주는 부악 서벽 등, 한라산의 웅장함과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코스라면 어리목 코스는 사제비동산 아래 목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울창한 숲과 이후 부악을 향해 올망졸망 솟아오른 수많은 오름 등 제주 특유의 풍광을 엿볼 수 있는 산행 코스다. 단, 윗세오름에서 정상에 이르는 화구벽 구간은 훼손지 복원을 위해 산행이 금지돼 있다.
윗세오름 산행은 영실(1280m)~윗세오름 코스가 어리목(970m)~윗세오름 코스에 비해 짧고, 계단길도 적어 대개 영실에서 시작, 어리목으로 하산한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 점심이나 간식 시간을 가진 뒤 내려선다 해도 4시간이면 산행을 끝낼 수 있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는 컵라면(온수 제공)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팔고 있다. 1100도로변 영실 입구에서 매표소까지는 2.5㎞. 영실매표소에서 아스팔트길로 이어지는 영실휴게소까지 2.5㎞. 어리목 버스정류장에서 어리목까지는 1.3㎞.
■어승생악 오름 코스 : 어리목에 위치한 어승생악은 웅장한 화구벽 서벽을 위시한 한라산 전모와 함께 제주시 쪽으로 튀어나온 수많은 오름을 감상할 수 있는 조망대 같은 곳이다. 임금이 타는 어승마(御乘馬)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이름지어진 어승생악은 표고가 1169m이며 밑면 지름이 2㎞, 북사면의 비고가 350m쯤 되는 큰 덩치를 가진 오름이다. 한라산 주봉이 오름왕국의 군주라면 어승생악은 제후들의 맹주라 할 위풍을 지녔다고 묘사된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대포 진지도 볼 수 있다. 어리목 주차장에서 비고가 200m 정도에 불과하고 경사도 완만하여 누구나 어렵잖게 오를 수 있다. 걸음이 느려도 30분이면 올라갈 수 있다.
*산 밑은 봄, 산 위에서는 한겨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제주도 한라산이다. 날씨의 변덕이 매우 심하므로 봄이라도 방풍방한복은 물론, 방한모와 장갑도 준비하도록 한다. 아이젠도 꼭 지참한다. 윗세오름대피소와 진달래대피소에서 간식거리와 컵라면 같은 요깃거리를 팔고 있으나, 식수 사정이 좋지 않으므로 보온병에 온수를 담아 가는 게 바람직하다. 윗세오름대피소 전화는 2월 16일 현재 폭설로 불통 상태다. 출발 당시 상황은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www.npa.or.kr) 안에 있는 전국국립공원 중 ‘한라산’ 클릭. (한필석 월간산 기자 email@example.com)
■기점별 대중교통
제주공항→성판악=15분 거리인 제주 종합시외버스터미널에서 12분 간격(06:30~21:30) 운행하는 5·16도로(제1횡단로) 경유 성판악, 서귀포행 직행버스 이용. 요금 1600원. 터미널 (064)753-1153~4.
하산지점인 관음사 매표소에서 노선버스를 타려면 2㎞ 떨어진 제주대학교 근처까지 걸어가야 한다. 택시는 공항까지 약 1만5000원, 제주콜택시 (064)757-0800.
제주공항→어리목·영실=제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시간20분 간격(07:50~15:50)으로 운행하는 1100도로(제2회단로) 경유 중문행 직행버스 이용. 어리목 1900원, 영실 3100원. 어리목 버스정류장~공원관리사무소 1.3㎞, 영실 버스정류장~영실 등산로 입구까지 2.5㎞.
*한라산은 당일산행만 허용되는 국립공원으로 비상시가 아니면 숙박은 불허한다. 또한 각 산행기점에는 숙박시설이 없기에 제주시내나 서귀포, 중문 일원의 숙박시설을 이용해야 한다. 제주도청 인터넷 홈페이지의 관광안내코너(cyber.jeju.go.kr) 참조.
[이메일클럽] 오래 살려면 제주도 여자처럼 살아라?입력:2004.02.24 06:16
안녕하세요. 제주도의 임형균기자입니다. 오늘 신문에 ‘제주도가 장수의 섬’이란 기사가 실렸습니다. 간단하게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TOP
제주도가 발표한 2003년 주민등록 인구 통계를 보면 노인(65세 이상) 중에서 80세 이상 고령자의 비율이 20.43%로 전국 1위였습니다. 2000년부터 계속 1위를 고수하고 있다고 합니다. 2위는 강원(16.9%), 3위 광주(16.89%), 4위 전남(16.7%) 등입니다.
제주도는 노인 5명 중 1명은 80세 이상이란 뜻입니다. 2003년 제주도 인구는 55만831명(외국인 제외)으로 전년보다 0.26% 늘어난 반면, 노인 인구(65세 이상)는 5.2% 늘었고, 80세 이상 고령자는 무려 11.5%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젊은 세대의 대도시로의 이동과 그에 따른 출산율 저하 등의 원인 때문에 지방으로 갈수록 노령화가 빨리 진행되는 것은 전국 어디나 비슷합니다. 그런데 전체 인구 중에서 노인인구(65세 이상)의 비율을 보면 전국 1위는 전남(14.1%) 2위(충남 12.74%), 3위 경북(12.3%) 등이며, 제주는 8위(9.15%)에 머물고 있습니다. 즉 제주도가 노인이 다른 곳보다 특별히 더 많지는 않으나, 노인 중에서 특히 80세 이상의 나이 드신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80세 이상의 노인 중에서 여성의 비율이 80%를 넘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길긴 하지만, 남녀 차이가 너무 커 보입니다. 제주도가 왜 장수의 섬이 됐는지 서울대 의대 생화학교실 박상철 교수님께 이에 대한 의견을 여쭤봤습니다.
박상철 교수님은 서울대체력과학노화연구소를 이끌면서 조선일보와 공동으로 전국의 장수 마을을 답사하면서 연구해온 국내 최고의 장수 전문가로 꼽힙니다. 박 교수님의 설명은 명쾌했습니다.
“국내의 대표적인 장수 지역은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이 인접한 부분, 그리고 전라도의 곡성-구례 지역, 그리고 제주도입니다. 이 중 제주도는 몇 가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이 여성 장수노인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점, 그리고 100세 이상의 초고령자는 다른 곳보다 오히려 적다는 점입니다.”
박 교수님은 제주도에서 장수하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를 크게 두 가지 즉, 사회문화적 배경과 식생활로 설명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제주도 여성들은 생활력과 독립심이 강하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돌 바람 여자가 많은 삼다도인 제주의 여성들이 생활력이 강한 이유가 예전에 어부인 남편이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남은 부인네들이 자식을 키우며 살아 남아야 했기 때문이란 설명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제주 여자들의 독립심과 생활력을 다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과거의 인구통계를 보면 일제시대에는 여초(女超) 현상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고, 일제 말기에서 6·25 등을 겪으면서 남녀 성비 불균형이 심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에 특별히 여자가 많았다기보다는 ‘많게 보였던 것’이란 해석도 나옵니다. 여하튼 제주도의 자연환경이 여성들을 강하게 만든 한 원인이 된 것만은 사실인 듯합니다.
제주 여성들의 강한 생활력은 다른 지방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제주의 해녀(海女)를 잘 아시지요. 감귤이 제주도민의 주요 소득원이 되기 전인 1960년대 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해 얻는 수입이 전체 가정 소득의 3분의1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날씨가 많이 풀렸지만 강추위가 몰아치는 겨울 바다에 잠수하는 해녀들을 보면 단지 노동이나 생존의 의미를 넘어서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뭔가가 느껴집니다. 초인적인 의지나 기량이 없으면 바다에서 살아남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이처럼 강인한 제주 여성들은 나이를 먹어도 힘이 있는 한 직접 밥을 해먹는 독특한 관습을 갖고 있을 정도로 독립적입니다. 집의 안채에 노부부, 바깥채에 결혼한 아들 내외와 함께 산다고 가정해보죠.
두 세대는 부엌과 장독대 등이 따로 갖고 먹고 자는 일은 물론이고, 생산 경영도 별도로 합니다. 주거 단위는 한 가족이지만, 경제 단위로는 사실상 남남이 되는 것이죠.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시아버지만 남으면 대개 며느리가 식사를 함께 준비하지만, 시어머니는 아랫채에 혼자 살면서 자신이 먹는 것은 스스로 챙긴다는 것입니다.
가족간에 너무 삭막하다거나, 또는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하기보다는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합니다. 노부부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아들 내외와 안채와 바깥채를 서로 바꾸는 ‘권력이양’도 한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제주도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예전부터 육지 여자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것을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해왔다고 합니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살림을 아무리 잘해도 제주도에서는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엊그제 삼성생명이 한 설문조사를 보니까 바람직한 아내상으로 사회와 가정에서 모두 잘하는 수퍼우먼형이란 응답이 59.1%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더군요. 이 글을 읽는 chosun.com의 미혼 남성 독자들은 주변에 제주 출신 여성이 있거든 수퍼우먼형 아내상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점을 염두에 꼭 두시길 권합니다.
박상철 교수팀은 장수의 요인을 연구하면서 인류학적 연구도 함께 했는데, 그 결과 제주도는 모계(母系) 사회의 전통이 육지보다 강하게 드러났다고 합니다. 여성이 강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원래 모계 사회적인 전통 문화가 강해서 여성들이 강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주의 식문화도 장수의 한 비결이라고 박상철 교수님은 분석했습니다. 당연(?)하지만 식단이 해산물 위주로 돼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주만의 독특한 음식과 식재료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주의 독특한 음식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를 갖겠습니다.
박상철 교수님은 “이런 것들을 종합할 때 제주도는 육지 쪽보다는 일본 오키나와와 같은 섬들의 장수 패턴과 더 가깝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제주도의 장수 패턴과 원인을 열심히 연구해도, 육지와 자연·문화·식생활 등이 워낙 달라서 한국 전체로 일반화할 수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기가 어렵더라고 박 교수님은 말씀하더군요.
제주 여행 기회가 있으면 야자나무나 돌담 같은 이국적 풍경만 즐길 게 아니라, 이처럼 우리나라의 일부이면서도 외국에 더 가까운 제주의 독특한 문화와 관습, 전통을 체험하고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오늘 제주의 모습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전통과 문화는 과거에는 강렬했지만 지금은 많이 흐려졌습니다. 또 많은 것들이 현대화·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빛이 바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제주 여성의 삶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고 봅니다. 강한 생활력과 독립심, 그리고 겨울 바다에 잠수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 등이 현대의 많은 여성들이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 결과로 장수(長壽)까지 얻을 수 있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오래 살고 싶은 남성들도 제주도 여성들의 삶에서 본받을 점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런 여성을 아내로 맞은 남성들은 아무래도 가장으로서의 막강한 권위(?)나 발언권은 상당 부분 포기해야 되겠지요? (제주=임형균기자 드림 firstname.lastname@example.org)
‘長壽섬’ 제주도
제주도는 ‘장수의 섬’이란 사실이 통계로 확인됐다. 제주도는 2003년 주민등록 인구통계 결과 65세 이상 노인 5명 중 1명이 80세 이상(20.43%)으로 전국에서 가장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23일 밝혔다. 2003년 제주의 80세 이상 고령자는 1만330명이며, 그중 여성이 8490명(82.2%)이었다.
노인 중 80세 이상 고령자 비율이 높은 곳은 제주에 이어 강원(16.9%), 광주(16.89%), 전남(16.7%) 전북(16.69%) 순이었다. 제주도는 80세 이상 고령자 비율에서 2000년 이후 전국 1위이다. 작년 제주 인구는 전년보다 0.26% 증가한 반면,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5.2%나 늘어 고령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됐다. 특히 80세 이상 고령자가 전년보다 11.5%나 급격하게 증가했다. 반면,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비율은 제주가 전남(14.1%) 등에 이어 전국 8위 수준이다.
장수전문가인 서울대 의대 박상철 교수는 “제주도는 여성 장수 인구가 유난히 많고, 강원 및 경북 북부와 전남북 등 다른 장수지역에 비해 초고령자(100세 이상)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점 등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제주=임형균기자 email@example.com)
입력 : 2003.12.11 11:03 58' / 수정 : 2003.12.11 17:27 46'
▲ 강원도 속초시 설악워터피아 노천 폭포탕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사람들. 온천수는 수질에 따라 효능도 다르므로, 내 체질에 어떤 온천이 맞는지 미리 알아보고 가야 한다. / 속초=황대진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이거 아주 신선놀음이네, 선녀(仙女)가 따로 있어? 내가 선녀가 된 거 같아.”
정기순(67·서울 송파구) 할머니는 평생 처음 노천탕(露天湯)에 몸을 담가봤다. “옛날 시골 살 적에 몰래 개울서 발가벗고 멱을 감기도 했지만, 한 겨울에 밖에서 온천하기는 첨이여”라며 할머니는 연신 “시원하다, 좋다”를 외쳤다.
지난 7일 강원도 속초시 설악워터피아의 노천 폭포탕. 바위와 동굴, 떨어지는 폭포수에 희뿌연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양이 할머니 말대로 마치 선계(仙界)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깥 기온은 영하 5도. 설악산 골바람과 동해 바닷바람이 만나 힘자랑을 하는 통에 코끝이 아렸다. 하지만 탕 벽에 붙어있는 수온계는 섭씨 42도. 탕에 몸을 담그니 따뜻한 물에 온 몸이 서서히 풀어졌다.
멀리 병풍처럼 둘러쳐진 설악산 울산바위를 바라보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겹겹이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온천물에 조금씩 녹아 없어지는 느낌. “으~시원하다”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천연 나트륨 온천물 폭포 밑에 가 앉았다. 정수리에 물줄기가 떨어진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 홀로 앉아 도닦는 도인이 된 기분이다.
김민섭(36·경기도 성남시)씨는 나이든 부모님과 아내, 7살난 아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김씨는 “겨울 휴가를 맞아 아이를 위해 스키장에 갈까 했지만, 집에 홀로 남아야 할 어머니가 맘에 걸렸다”며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을 찾다 온천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온천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겨울철 여행지로 오랜 사랑을 받아왔다.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겨울 여행을 다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면 여독이 싹 풀린다. 특히 최근에는 어린이를 위한 물놀이 시설과 노천탕, 건강을 위한 각종 기능성 탕까지 갖춘 대형 온천들이 생겨나면서 3대(代)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여행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설악워터피아의 경우, 주말에는 이용객이 많아 조용한 온천욕을 즐기기에는 다소 붐빈다.
국내에는 황 성분이 있는 유황천, 라듐을 함유하고 있는 방사능천, 유리탄산이 들어있는 탄산천 등 다양한 수질의 온천이 있어 각종 질병에 대한 치료 효능까지 기대할 수 있다. 고온욕은 감기환자나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 들에게 특히 권할 만하다. 하지만 모처럼 온천을 찾았다고 해서 “본전 뽑겠다”는 생각은 금물. 장시간의 온천욕은 오히려 건강에 해를 가져올 수도 있으므로 사람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온천과 목욕법을 먼저 알아야 한다. (속초=글·사진 황대진기자 email@example.com)
[온천 여행] 전국의 온천 정보 입력 : 2003.12.11 11:07 21' / 수정 : 2003.12.11 11:27 28'
▲ 아산스파비스의 야외 온천풀에서 어린이들이 물장난을 치는 모습/ 조선일보 DB
온천의 기준은 나라마다 다르다. 영국과 독일·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수온 20℃ 이상을, 미국은 21.1℃ 이상을 온천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하로부터 용출되는 25℃ 이상의 온수로, 인체에 해가 없으면 온천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몸에 맞는 온천이 어떤 온천인가 하는 것. 온천수마다 성질이 다르고, 효능도 다르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산성천을 제외한 탄산천, 식염천, 방사능천 등이 골고루 분포돼 있다.
■ 온양온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 태조, 세종, 세조 등 조선시대 왕들이 휴양이나 병 치료를 위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흥선대원군도 이곳에 전용 욕실을 설치했었다. 약알칼리성 단순천으로 수온은 57℃ 정도. 근대식 온천장은 1904년 개발한 안양관광호텔이 최초.
주변 먹거리
경남숯불갈비 (041)542-1516 왕갈비, 삼천갑식당 (041)541-4848 대구찜
■ 동래온천
부산 금정산 기슭의 온천. 조선 숙종 17년인 1691년부터 개발됐다고 전해진다. 알칼리성 식염수로 수온은 55℃ 정도다. 볼거리로는 충렬사와 금강공원이 있다.
주변 먹거리
어가초밥 (051)554-0331 생선회·생선초밥, 원조 동래 할매집 곰탕 (051)557-4747
■ 유성온천
백제시대에 상처를 입은 병사가 온천수로 아픈 상처를 치료했다는 곳. 조선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다. 알칼리성 단순라듐천으로 수온은 42~55℃ 정도다. 주변 볼거리로는 대청호, 장태산 자연휴양림, 식장산, 국립중앙과학관, 엑스포과학공원 등이 있다.
주변 먹거리
성웅만나(042)825-2001 상추샤브샤브, 서라벌 (042)825-0400 징기스칸국수, 등심
■ 백암온천
경북 울진군에 있다. 라돈성분이 많이 함유된 유황질의 온천수. 수온은 48℃ 정도. 주변 관광지로는 백암산, 선시골계곡, 월송정 등이 있다.
주변먹거리
청풍식당 (054)788-4144 도다리회, 못잊어회집 (054)787-7555 자연산 물회
■ 부곡온천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의 온천. 유황 성분이 많고 규소, 염소 등 20여 ?b>■ 痔?광물질이 섞여 있다. 수온이 매우 높다(78℃). 주변에 화왕산군립공원, 교동 고분군, 옥천계곡, 주남저수지 등이 있다.
주변 먹거리
고향보리밥 (055)521-2516 보리밥, 창녕거위요리 (055)536-1451 거위요리
■ 해운대온천
해수욕장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신라 때는 온천으로 더 유명했다고 한다. 신라 진성여왕의 천연두를 해운대 온천욕으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알칼리성 단순 식염천으로 나트륨과 염소성분이 많으며, 라듐성분도 섞여 있다. 주변에 동백섬과 달맞이고개 등이 있다.
주변 먹거리
해운대 암소갈비집 (051)746-0033, 마산게낙찜(051)747-7773 게장, 게낙찜
■ 이천온천
나트륨 함량이 전국의 온천 중 가장 높다. 염화칼슘, 염화나트륨 등 여러 성분이 들어있다. 수온은 28~31.5℃. 주변에 장암리 마애보살좌상, 설봉산 영월암, 설봉산성 등이 있다.
주변 먹거리
청목 (031)6345414 이천쌀밥, 니나노 (031)6319595 돼지고기, 갈비
■ 척산온천
설악산 자락에 있어 산과 바다 온천을 모두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온천을 하고 동해바다 일출을 보며 소원을 기원하면 성취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불소와 방사능 물질인 라듐 등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는 강알칼리성 단순천이다. 수온은 53℃.
주변 먹거리
김영애 할머니 순두부집 (033)635-9520 순두부정식, 통나무집 식당 (033)672-3523 토종닭
■ 수안보온천
충주시에서 남쪽으로 21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물은 알칼리성으로 무색, 무미, 무취이며 매우 매끄럽다. 산도 8.3 정도로 약알칼리성이며 라듐을 비롯, 인체에 유익한 각종 무기질을 함유하고 있다.
주변 먹거리
언덕넘어 (043)845-7791 꿩요리, 마당가든 (043)845-3999 메밀묵
■ 도고온천
물은 특유의 유황냄새가 심하게 나는 약알칼리성, 약식염천에 속하는 순유황온천이다. 수온이 25~35℃인 냉관천이어서 물을 가열한 뒤 사용하고 있다.
주변 먹거리
경남숯불갈비 (041)542-1516 왕갈비, 삼천갑식당 (041)541-4848 대구찜
■ 덕산온천
알칼리성 단순 방사능천. 온천수로는 유일하게 충남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돼 있다. 주변에 덕산도립공원, 가야산, 예당저수지, 추사고택 등이 있다.
주변 먹거리
줄포회관 (041)333-9000 붕어찜, 신분준할머니 기러기칼국수 (041)333-3337
■ 덕구온천
경북 울진의 응봉산 자락에 있다. 칼슘, 철, 염소, 중탄산, 나트륨, 마그네슘, 라듐, 황산염 등이 함유돼 있다. 주변에 덕구계곡, 원자력전시장, 죽변항, 봉평신라비, 성류굴, 민물고기전시관 등이 있다.
주변 먹거리
옹심이칼국수 (054)783-5830, 옛날집 (054)782-3357 백숙
■ 마금산온천
목욕뿐 아니라 마실 수도 있는 식용 온천이다. 경상남도 창원에 있으며 북면온천으로도 불린다. 물은 알칼리성으로 철분과 유황성분이 많으며, 나트륨과 라듐 등 20여 종의 광물질도 들어 있다. 주변에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다.
주변 먹거리: 언양각식당 (055)266-8050 석쇠불고기, 전통순대촌 (055)298-7564 순대볶음
[온천 여행] 온천욕 효과 제대로 보려면 TOP
먼저 미지근한 물 마셔야 입력 : 2003.12.11 11:08 33'
온천욕의 효과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온천수의 성질과 효능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온천수는 입욕, 음수, 양치질, 흡입 등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는데 이 중 입욕과 음수법이 보편화되었다.
온천욕을 할 때는 수분 보충을 위해 미지근한 물을 마신 후 입욕하는 것이 좋다. 탕에 들어가면 우선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저온탕부터 시작해 고온탕으로 이동한다. 비누는 적게 쓰는 것이 좋다. 때를 미는 것은 동네 목욕탕에서 하고, 온천에서는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온천욕을 즐기는 것이 좋다.
배가 부르거나 공복일 때, 음주 후에는 피하는 것이 좋다. 탕에 너무 오래 있거나 한꺼번에 여러 번 하는 것은 피부나 건강에 좋지 않다. 온탕의 경우는 10~15분 정도로 2~3회 반복하는 것이 적당하다. 열탕은 10분 미만으로 하되, 2회 이상 전신욕을 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입욕 후에는 충분한 휴식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피부병이나 신경통 등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온천욕은 1주일 이상 지속적으로 해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하루 온천욕 횟수는 처음 3~4일간은 1일 1회, 그 후는 2~3회로 점차 늘리는 것이 좋으나 전문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육체노동이나 운동으로 피로한 사람이나 과음한 사람에게는 열탕 목욕이 좋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거나 정신적으로 피로한 사람 또는 성인병 환자나 노약자는 온탕 목욕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열탕목욕의 경우 반신욕, 족욕도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뜨거운 물과 찬물을 번갈아 들어가는 교대욕도 혈액순환과 노폐물 배출에 효과적이다. 식염천과 유황천은 김을 흡입하면 비염, 기관지염 등 호흡기 질환의 환자에게 좋다고 알려져 있다.
민감하거나 연약한 피부가 아니라면 온천욕 후에는 물기를 닦아내지 않고 자연건조 시키는 것이 좋다. 그래야 피부에 유익한 미네랄 성분이 많이 흡수된다. 겨울철에는 목욕 후 보습제를 충분히 발라주는 것이 피부 관리에 효과적이다.
또한 온천수를 마시거나 눈을 씻는 것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온천수에 따라 음용을 할 수 없는 물도 있고 과용을 하면 몸에 해로울 수도 있으므로 전문가나 관계자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좋다.
( 김현주 사라인터내셔날 대표이사·스파컨설턴트 )
[온천 여행] 눈 오는 날엔 노천탕으로 TOP
온천을 하는 재미는 뭐니뭐니 해도 노천탕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온천욕을 하는 맛은 다른 뭣에 비길 데 없다. 다음은 수질도 좋고 가볼 만한 노천탕들.
▲ 수안보파크호텔의 노천탕에서는 눈 쌓인 월악산 줄기를 감상하며 온천욕을 즐긴다.
■ 온양온천
충남 아산시의 온양관광호텔(041-540-1000) 노천탕은 1990년 7월 개장했다. ‘국내 최초의 노천탕’이라는 것이 호텔측의 자랑. 조경이 잘 된 주변 환경 속에서 온천수증기로 몸을 감싸며 세속의 근심과 시름을 잊고 온천욕에 빠져들 수 있다. 높이 10m의 인공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도 시원하다. 온양관광호텔의 노천탕은 대중온천탕을 경유해서 들어가면 된다. 여탕에도 노천탕이 마련되어 있다.
영업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입욕료는 대인 5000원, 소인 3500원. 호텔투숙객에게는 50% 할인권을 제공한다. 총 113개의 객실을 보유한 온양관광호텔 내에는 신정비, 영괴대 등 온천과 관련된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주변 여행 명소로는 외암민속마을, 맹사성고택, 현충사, 천안 광덕사, 예산 추사고택 등. 경부고속도로 천안나들목으로 나가 21번 국도를 타면 아산시에 쉽게 닿는다. 장항선 열차를 이용할 경우 온양온천역에서 하차한다.
-주요 연락처(지역번호 041):아산시청 문화관광과 540-2468, 아산시외버스터미널 542-6848. 아산시의 숙박시설은 온양그랜드호텔(543-9711), 온양프라자호텔(544-1611), 파라다이스도고호텔(542-6031) 등. 맛집은 한일식당(도가니탕, 545-2280), 솔뫼장터(송악면, 수수부꾸미, 544-7554), 외암촌(송악면, 장터국수, 543-4150) 등.
■ 수안보온천
충북 충주시 상모면 수안보온천지구의 온천수는 지하 250~700m에서 용출되는 수온 53℃의 약알칼리성 물이다. 피부미용과 노화방지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수안보에는 숙박을 겸한 온천 시설이 많다. 그 가운데 수안보파크호텔이 노천탕을 보유하고 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원형의 노천탕에서는 눈 덮인 월악산 영봉의 산줄기를 감상하면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수안보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 수안보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호텔은 2002년 7월 리모델링을 끝낸 110여개의 객실과 온천탕, 레스토랑, 연회장 등의 부대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주변 여행명소로는 사조마을 스키리조트, 탄금대공원, 중앙탑(국보 제6호) 등이 있으며 충주호관광선(043-851-5771)을 타면 충주호반의 설경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
-주요 연락처(지역번호 043):충주시청 문화관광과 850-5165. 수안보의 숙박시설은 수안보파크호텔 외에 수안보상록호텔(845-3500), 호텔수안보조선(848-8831), 와이키키수안보(841-3333) 등. 맛집은 향나무식당(한정식, 꿩샤브샤브, 846-2813), 영화식당(산채정식, 846-4500) 등. 15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향나무식당은 국산 콩으로 두부와 청국장, 콩비지를 거의 매일 만들어낸다.
■ 문경온천
경북 문경시의 문경온천단지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서 이화령 터널을 통과, 점촌 방면으로 내려가다 문경읍에 접어들어 왼쪽편에 자리한다. 문경종합온천(054-571-2002)은 각기 1200여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남녀 대욕실 외에 노천탕, 맥반석찜질방, 증기사우나, 황토사우나, 한식당과 양식당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노천탕에서는 쉴 새 없이 폭포수가 흘러내려 청량감을 더해준다. 증기사우나는 욕실을 밀폐하여 40~50℃의 온천증기를 가득 채운 곳으로 비만예방, 피로회복, 신경통 등에 좋다.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연중무휴 영업. 이용요금은 일반 6000원, 어린이 5000원이고 오전6시부터 오전9시까지는 조조할인율이 적용돼 4000원을 받는다. 주변 명소로는 문경새재, 석탄박물관, 하늘재, 대승사, 김룡사 등.
-주요연락처(지역번호 054): 문경시청 문화관광과 550-6394. 숙박시설은 문경관광호텔(571-8001), 예인과 샘터 펜션(문경읍, 571-1961) 등. 맛집은 문경온천지구 내의 금강산가든(청국장, 571-7200), 문경새재 상가지구의 소문난식당(묵조밥, 572-2255) 등.(글·사진=유연태 여행작가 ‘포인트 주말여행’ 저자)
[온천 여행] 온천의 종류별 특징 및 효능 TOP
온천의 종류/대표적 온천/특징/효능 입력 : 2003.12.11 11:14 05'
■ 단순천 /덕산, 온양, 이천, 척산, 덕구/보통의 지하수에 비해 염분이 약간 많다. 무색무취가 특징. /류머티즘,신경통,동맥경화,만성피부염에 효과가 있다. 만성위장병에 음용하기도 한다. /
■ 식염천 /마금산, 동래, 해운대/식염분이 많은 온천. 자극이 약해 노인, 아동, 병을 앓은 환자의 회복기에 적당. /몸을 데우는 작용이 강하다. 류머티즘, 신경통, 창상, 만성피부염에 좋다./
■ 유황천 /부곡, 도고/물 1kg 중 1 mg 이상의 황이 섞여 있는 광천(鑛泉). 용출 시에는 투명 하나, 곧 황백색으로 변한다. /피부질환, 안질, 신경통, 무좀, 당뇨, 변비에 효과. 관절염, 근막염, 신경통 등 류머티스성 질환에 특히 좋다./
■ 방사능천 /백암,유성, 수안보, 해운대, 덕산/라돈천 혹은 라듐천이라고도 한다. 원천 1㎏ 중에 라듐이 1억분의 10mg 이상 함유./자율신경의 과민증과 고혈압, 당뇨병 등 각종 성인병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병, 정력감퇴나 갱년기 장애, 피부 미용에도 좋다. /
■ 철천 /이천, 덕구, 동래/철이온을 다량으로 함유한 광천. 일반적으로 적갈색의 침전물이 있으며, 살균력이 강하다. /노이로제, 만성 습진, 만성부인질환, 불임증 등에 효과. 폐결핵, 소화불량, 위궤양, 순환기 장애 등에는 좋지 않다./
■ 탄산천 /온양/물 1kg 중에 유리 탄산1000mg 이상 함유. 무색투명하며 사이다와 같이 톡 쏘는 맛이 난다./이산화탄소가 피부로 흡수돼 심장의 부담을 가볍게 해 주므로 심장병에 좋다. 마시면 소화를 돕고 변비나 신우염에 좋다./
■ 산성천 /일본 온천/화산지역에서 용출하는 온천에 많다. 살균력이 매우 강하다. 우리나라에선 찾기가 어렵다./습진이나 각종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 자극이 강하므로 지나친 입욕은 해롭다./
[온천 여행] 일본 홋카이도 온천 입력 : 2003.12.11 11:16 21' TOP
▲ 눈이 많은 일본 홋카이도는 노보리베츠 등 온천의 천국이기도 하다. 사진은 삿포로에 있는 클럽메드 노천탕.
일본 최북단의 섬 홋카이도는 눈의 나라다. 한겨울이 되면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린다. 홋카이도는 또 온천의 고장이기도 하다. 섬 전체에 3개의 화산대와 2백개가 넘는 온천이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도 ‘노보리베츠’는 아타미(熱海)·벳부(別府)와 함께 일본 3대 온천으로도 손꼽힌다.
눈이 많이 쌓여 눈축제(유키마쓰리)가 열리는 2월이면 이곳은 진짜 눈의 천국이 된다. 하지만 축제를 즐길 생각이 아니라면 예약도 쉽고 항공료나 숙박료도 싼 12월~1월 중에 다녀오는 것이 좋다.
홋카이도 최대의 온천가인 노보리베츠는 삿포로 시내에서 특급 열차로 1시간10분 정도, 버스로 2시간 반 남짓 더 가야 한다. 노보리베츠 시내에는 수많은 온천호텔과 료칸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사이사이로 “히가에리뉴요쿠”라는 이름의 온천장들도 많이 눈에 띈다. 숙박을 하지 않고도 일일 입욕할 수 있는 곳이다.
온천가 북쪽으로 가면 직경 450m의 거대한 폭발화구에서 열탕이 콸콸 끓어 넘치는 ‘지옥 계곡’에서 약 600m 거리의 산책로를 따라 독특한 풍광을 감상할 수도 있다.
180여 마리의 불곰을 사육하고 있는 곰 목장도 빼놓을 수 없다. 4살 이상의 곰을 방목하는 이 목장은 사람이 곰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곰이 사람을 구경하는 일명 ‘인간 우리’로 유명하다. 사람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 곰들에게 둘러싸이게 되는 섬뜩한 체험을 할 수 있고 산수문제를 푸는 학자 곰 쇼나 갓 태어난 아기곰 유치원, 세계 유일의 곰 전문 박물관,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마을을 재현한 유우카라노사토 등 볼거리가 많다. 영화 ‘러브레터’와 조성모의 ‘가시나무새’ 뮤직비디오 촬영지인 오타루에도 가보자.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유리공예 전문점 기타이치 가라스(glass)를 비롯해서 ‘가시나무새’에 나왔던 오르골(뮤직박스) 전문 상점, 러브레터의 배경이 되었던 눈덮인 오타루 운하의 로맨틱한 설경, 복고풍의 거리 풍경 등은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나은경·나스커뮤니케이션스 사장)
대구광역시의 북동쪽을 장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팔공산(八空山·1192.9m)은 웅장한 산세와 기암괴석, 바위절벽을 이룬 능선 그리고 깊은 골짜기와 울창한 수림 등 명산이 갖춰야 할 덕목을 고루 지녔다. 최정상인 비로봉(일명 제왕봉)에서 남동쪽으로 동봉(일명 미타봉)을 거쳐 염불봉~인봉~노적봉~관봉(갓바위·850m) 연봉을 뻗고, 서로는 서봉(일명 삼성봉)에서 한티재와 가산(901.6m)을 거쳐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내려앉기까지 30㎞가 넘는 길이로 활개를 펼치는 사이 변화무쌍한 산세를 보여준다.
남사면이 급격히 치솟아 기운찬 형상을 하고 있는 반면, 북사면은 군위군을 감싸안는 듯 부드러운 산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한티재를 경계로 동쪽을 팔공산, 서쪽을 가산이라 나누어 부르고 있다. 경상북도가 80년 팔공산과 가산 일원을 한데 묶어 도립공원으로 지정했다. 이듬해인 81년에는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대구지역은 자연공원으로, 경북지역은 도립공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대구시 자연공원 지역(30.593㎢)과 경상북도 도립공원 지역(95.687㎢)을 합치면 126.28㎢ 넓이로, 북한산국립공원의 1.5배, 울릉도의 2배에 이른다.
▲ 동봉에서 바라본 팔공산 동쪽 산세./박호근, 대구 경상여고 산악부 지도교사
팔공산은 신라 오악(五岳) 중 중악(中岳)으로서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을 비는 천신제가 비로봉 정상 제천단에서 올려졌다. 부악(父岳), 공산(公山), 동수산(桐藪山) 등으로 불리다 조선시대 이후 현재의 이름으로 굳어진 역사 깊은 산이다.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화랑들의 수련장이기도 했다.
팔공산은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이 팔공산 남록의 부인사(符仁寺)에 봉안됐다. 유가종(瑜伽宗)의 태두인 홍진국사(弘眞國師) 혜영(惠永)과 자정국사(慈靜國師) 자안(子安)은 동화사 주지로서 전국 불교를 관장하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으로 지내기도 했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도 은해사(銀海寺)는 인종태실수호사찰(仁宗胎室守護寺刹)로, 파계사(把溪寺)는 영조(英祖)의 장수를 비는 원찰로서 조선왕실의 보호를 받으면서 팔공산의 법등을 밝혀왔다. 또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이 동화사를 승군 본부로 삼고 왜적에 대항하기도 했다. (한필석 월간산 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팔공산 주요 등반코스] 숲과 절벽 어우러진 '수태골 코스' 인기TOP
입력 : 2003.12.11 13:08 53' / 수정 : 2003.12.11 17:29 20'
팔공산 산행은 동화사 지구, 파계사 지구, 능성동 갓바위 지구, 대한리 갓바위 지구, 은해사 지구, 수도사 지구 등 6개 지역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상인 비로봉은 방송중계소와 군기지 보안을 위해 접근이 허용되지 않아 제2위 고봉인 동봉(1,155m)을 밟는 것으로 만족해야한다.
■ 동봉 최단등로 : 동봉으로 최단등로는 동화사 길과 팔공스카이라인 능선길을 꼽을 수 있다. 동화사 길은 염불암까지 약 2km 구간은 지루한 콘크리트길을 따라야한다는 점 때문에 주로 하산로로 이용하고, 팔공스카이라인 길을 등로로 이용한다. 능선길 들머리인 탑골은 동화문매표소와 가까이 있지만 문화재관람료를 받지 않는다.
▲ 보물 제431호인 팔공산 갓바위 부처./조선일보 DB사진
동봉 직전 삼거리에서 왼쪽 길은 마애약사여래좌상(대구 유형문화재 제3호)을 거쳐 서봉으로, 오른쪽 길은 석조약사여래입상(제20호)이나 동봉으로 이어진다. 2시간 소요. 하산은 염불암을 거쳐 콘크리트길을 따라 동화사로 내려서거나 수태골을 거쳐 동화사~파계사 순환도로로 내려선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30분 정도 단축시킬 수 있다. 이용료 어른 왕복 5500원, 편도 3500원, 어린이 3000/2000원. 만 3세 미만 어린이는 어른 한 명당 한 명 무임승차. 동절기 운행시간은 오전 9시45분~오후 5시. 스카이라인 전망대에서는 산채비빕밥, 국수 등의 음식과 간식거리를 팔고 있다. 팔공스카이라인 전화 053-982-8801.
■ 최고 인기의 수태골 코스 : 동화사 집단시절지구 버스종점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1.5km 걸어가야 하는 불편함에도 대구산악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산길이다.
대구 바위꾼들이 즐겨 찾아 바윗골이라고도 불리는 수태골은 고즈넉한 숲길이 이어지다 중단부의 기암절벽 구간을 거쳐 동봉이나 서봉으로 이어진다. 2시간 소요. 하산은 염불암~동화사 길이나, 동봉~신령재 능선을 거쳐 폭포길을 따라 동화사로 내려선다. 신령재를 경유하면 5시간 정도 걸린다.
■ 동화사 원점회귀 코스 : 팔공산 하면 동화사, 동화사 하면 팔공산을 떠올릴 만큼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팔공산을 처음 찾는 이들이 최우선으로 꼽는 기점이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코스는 동화사~염불암~동봉 왕복코스(3시간30분)지만, 이보다는 동봉에서 기운차면서도 아기자기한 능선 길을 따라 신령재까지 걸은 뒤 폭포골로 내려서는 코스(5시간)가 팔공산다운 면모를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권할 만하다.
※ 등산에 걸리는 시간 자세히 표시
■ 능선 대종주 코스 : 파계재에서 갓바위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대구 일원에서 가장 뛰어난 종주 코스로 꼽힌다. 웅장하고 거칠면서도 아름다운 팔공산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은 파계사에서 파계재로 올라선 다음 능선 산행에 나서거나 한티 고갯마루에서부터 곧바로 능선길을 따른다. 서봉과 동봉을 거쳐 갓바위까지 뽑으려면 준족일지라도 10시간 가까이 걸리는 긴 코스로, 해가 짧은 겨울철에는 동봉이나 신령재에서 동화사로 내려선다.
■ 갓바위 직등로 : 팔공산 동단에 위치한 갓바위부처(보물 제431호)는 높이 5.6m로, 신라 선덕여왕 때 의현대사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조성했다고 전한다. 산행 기점은 대구시 동구 능선동 갓바위 집단시설지구와 영천시 대한리 선본사 주차장으로 능성동 길(1시간)이 대한리 길(40분)에 비해 시간은 더 걸리지만 교통이 편리해 이용객이 더욱 많다. 특히 대학 입시철에는 한밤 중에도 가로등이 산길을 밝혀주고 있다.
■ 은해사 기점 사암 순례길 : 40여 말사를 거느린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 기점 산행은 은해사를 시작으로, 백흥암(百興庵)~중암암(中巖庵)이나 기기암(寄寄庵) 등 은해사 부속사암을 거치게 돼 있어 사암순례 코스나 다름없다. 극락전수미단(極樂殿須彌壇 보물 제486호)과 극락전(極樂殿 보물 제790호) 등 보물 2점을 지닌 백흥암을 놓치지 말도록.
백흥암~중암암~묘봉암~기기암으로 이어지는 은해사 원점회귀 산행(3시간)이나 중암암에서 인봉을 거쳐 갓바위까지 능선을 밟은 다음 능선동이나 대한리(5시간)로 내려서는 산행이 주로 이루어진다.
■ 호젓한 수도사 원점회귀 코스 : 집단시설지구가 조성된 대구·경산·영천 일원과 달리 수도사 일원은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여름 피서철 외에는 찾는 이가 많지 않아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지역이다. 대중 교통편으로 접근이 쉽지 않아 대개 자가용을 이용한 수도사~팔공폭포~동봉~신령재~수도사 원점회귀 산행이 주로 이루어진다. 수도사 주차장 기점 6시간 정도 걸린다. 영천이나 하양에서 치산행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1시간 추가.
* 팔공산에서는 동화사, 파계사 지구와 한티 서쪽 기슭의 도립공원관리사무소에 야영장이 마련돼 있다. 동화사와 파계사 지구 야영장은 1박당 소형 1000원, 중형 2000원, 대형 3000원으로, 6월1일부터 10월31일까지 개장한다. 도립공원관리사무소 야영장은 사철 운영하며, 입장료는 당일 1인당 1000원이다. (한필석 월간산 기자)
[팔공산 주변 맛집] 동동주 한잔에 피로 씻고 TOP
입력 : 2003.12.11 13:12 04' / 수정 : 2003.12.11 17:30 18'
인구 254만명의 대구에서는 팔공산의 긴 긴 능선이 어느 곳에서나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팔공산을 떼어낸 대구는 생각할 수가 없다. 수성구 두산동 '들안길' 양쪽, 신흥 먹거리 타운에서는 깔끔하게 단장한 127개의 외식업소가 휘황찬란한 불빛을 밝혀 두고 불야성을 이룬다. 동화사쪽에는 집단시설지구가 형성되어 있고 43곳의 식당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 동화사 지구
팔공산스카이라인 입구에 있는 대구광역시 추천 맛집이자 향토음식점 제1호로 지정한 한식집. 대구 도심의 고급 음식점 분위기로 호남권의 단골 손님이 많다는 것을 자랑으로 내 세운다. 산송이버섯차돌배기(1만5000원)와 산채쌈정식(7000원)이 대표음식. 마주 보고 있는 두 업소의 창업주 김태락(65)씨는 만 50년을 이곳에서만 살아 온 사람으로 '팔공산의 사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손님들에게 완벽한 관광안내역 봉사를 한다.
해발 820m지점 팔공산케이블카 종점, 팔공산 정상부가 손에 닿을 듯한 전망대에서 차 한 잔이나 동동주 한잔을 마실 수 있다.
동화사 가는 길에 들르는 식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세대 대구 산꾼들의 향수가 어려 있는 곳으로 산꾼들의 모임이 잦다. 산채비빔밥 5000원.
가장 많은 등산인들의 나들목, 수태골 입구에 위치. 만남의장소로 이용되고 매점이 딸려 있다.
# 파계사지구
파계사들머리 연못 안쪽에 있는 토종닭요리(2만5000원)와 꿩요리(3만원)집. 파계봉을 병풍 삼고 앞마당은 연못이다.
파계사 매표소 바로 앞쪽에 있는 기러기요리 전문점. 스테미너식품인 미미(美味)의 새(鳥)로 알려져 있는 기러기는 백안동에 있는 자가 기러기농장에서 갖고 온다. 기러기 불고기, 소금구이 각 200g 1만원. 1마리를 통째로 주문할 수도 있다.
# 백안삼거리
동화사와 갓바위로 가는 갈림길 삼거리식당가 공산농협 맞은편에 있는 순두부전문점. 음식값은 싸고 맛은 보증수표. 순두부 4000원. 순두부해물찌개 5000원.
실속파들이 즐겨 찾는 공산농협 뒤쪽 갓바위 가는 옛길에 있는 고깃집. 자가 농장을 갖고 식육점을 직영한다. 쇠고기 로스 200g 7000원.
# 한티재 코스
칠곡군 동명면 기성동 삼거리에서 1km 지점, 가산산성 입구 버섯모양 지붕의 팔공산자생 송이전골전문점. 아름다운 조경으로 2003년 대한민국 옥외광고대상에서 우수상(행정자치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송이전골 3인 기준 3만5000원. 기성동은 200여개 먹거리 집들로 작은 도시를 방불케 한다.
기성동에서 제2석굴암으로 넘어가는 한티재 길목 해발 600m 지점에 있는 대구산악인들의 캠프.
# 갓바위코스
18개 업소가 성업 중인 갓바위집단시설지구(대구동구진인동)에 있는 유황오리불고기(200g 6000원) 전문점. 양념맛 좋기로 소문난 집. 소고기버섯전골(7000원)도 인기품목.
메밀면(5000원) 메밀버섯전(6000원) 한방편육(9000원)을 차려낸다.
경산쪽 갓바위(경산시 와촌면 대한리)에도 20여개 업소가 산재해서 영업중이다. 솔매기식당은 향토색 짙은 한국전통음식점. 찹쌀수재비 4000원. 산채비빔밥 5000원. 호박 파 감자 미나리 버섯 고추 등으로 부친 각종 토속전이 5000원이다. 갓바위 아래쪽 선본사 전방 6km 지점에 있다.
선본사까지는 800m의 거리에 새로 지은 대형 편의시설. 시래기국밥(4500원)이나 가마솥육개장(5000원)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딸려 있다. 확보해 놓은 넓은 주차장에 갖고 간 차를 세워두고 갓바위 산길 입구까지는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 은해사 지구
은해사 바로 앞쪽에 있는 전형적인 산촌식당. 손국수 산채비빔밥 각 5000원. 주변에는 비슷한 음식을 차려내는 작은 규모의 몇 집이 영업중이다.
# 대구시가지
동대구역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차편으로 5분 거리인 범어사거리에 있는 명소. 한국관광공사가 '깨끗하고 맛 있는 집'으로 지정했다. 대구를 들르는 외국인들의 식도락 필수 코스로 알려져 있다. 양념갈비 2만원. 불고기 1만2000원. 냉면 6000원. 산악인으로 대구광역시산악연맹 감사를 맡고 있는 업주 배칠근씨는 인근 황금종합사회복지회관에 매주 월요일 중식으로 150명분의 무료급식을 만 10년째 제공하고 있다.
두산동 늘봄예식장옆에 있는 주선(酒仙)급 대구 산꾼들의 단골 맥주집. 지성미 넘치는 집주인 목향 정덕란언니는 산사람들에게 행운을 안겨다 준다는 마스코트.
시가지 중심부 중앙로사거리에 있는 '대구따로국밥'의 원조집. 1946년에 개점하여 3대째 내려 왔다. '따로국밥'은 '국따로 밥따로'에서 생겨난 이름인데 '따로 하나' '따로 둘' 식으로 음식을 주문한다. 따로국밥 한 상 4500원. (박재곤·산악인 ‘산따라 맛따라’ 저자 email@example.com)
[팔공산] 대중교통편, 각종 안내전화 입력 : 2003.12.11 13:16 21' TOP
◆◇ 기점별 대중교통편
◆◇ 문화재관람료 및 주차료
◆◇ 관리소 전화
◆◇ 매표소 전화
입력 : 2003.11.27 11:40 11' / 수정 : 2003.11.27 11:48 16'
월출산(月出山·812.7m)은 덩치가 작다. 그러나 바위로 연출할 수 있는 경관의 거의 모두를 포괄해 지니고 있는 ‘바위 명산’이다.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기상천외한 기암 풍치가 사방에 널렸다.
월출산은 평지에서 불쑥 돌출한 형상이다. 이 치솟은 바위 산 월출산의 산릉이 그리고 있는 하늘선은 감탄스럽기 짝이 없다. 어디서 그렇듯 자유분방한 선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산 안에 들어 보는 월출산의 기암 풍치는 최고봉 천황봉의 동쪽과 서쪽이 크게 다르다. 동쪽은 크고 높은 기둥 형상의 암봉들이 굵직한 능선 줄기에 굳건히 뿌리박고 서서 장관을 이루었다. 서쪽 지역은 온갖 기교를 다한 크고 작은 암탑들의 전시장이다. 설악산이나 북한산의 바위들을 늘 보아온 등산꾼들의 눈에도 이곳 월출산 서쪽 지역의 기암들은 간혹 헛발을 디디게 할 정도로 감탄스럽다. 길쭉하거나 넓적하며 둥글둥글한 바윗덩이들이 가로 세로로, 어떤 것은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듯 교묘히 얽혀서 하나의 큼직한 탑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월출산 동서 종주는 곧 빼어난 수석 혹은 조각품에 다름없는 기암들을 감상하는 예술행위로까지 찬미된다.
영암 사람들은 이 기암마다에 이름을 붙였다. 귀뜰바위, 구멍바위, 남근바위, 사자바위, 말바위, 돼지바위, 칼바위, 탕건바위, 시루바위, 거북바위…. 일상적으로 대하는 우리 주변 거의 모든 사물의 형상을 월출산에서 찾아내서는 이름을 주었다. 월출산이 단 41.88㎢라는 작은 면적으로 국립공원이 된 것은 이 기암풍치 덕분이다. 현재 월출산은 국립공원 중 면적이 가장 작다.
▲ 천황봉에서 바라본 월출산 동쪽 산세. 기암괴봉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월출산의 최고봉 천황봉 정상에서는 오래 전부터 하늘을 향해 제례를 치렀음을 추측하게 하는 기와편이나 그릇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월출산에는 한때 아흔아홉 개 사암이 있었다고 전한다. 선조들은 수적으로 많음을 강조할 때 흔히 아흔아홉이란 숫자를 사용해왔으므로 이 수치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기록이나 유물 등으로 미루어 이 산 곳곳에 수많은 절이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월출산에 지금 남아 있는 큰 절은 도갑사와 무위사 2개 사찰이다. 규모는 도갑사가 한결 크지만 절의 운치에서는 무위사 쪽이 뛰어나다. (안중국·월간산 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월출산 자락 유적 TOP
월출산 산자락에는 문화유적지가 많다. 월출산 서쪽에 위치한 구림(鳩林) 마을은 일본에 백제(일설에는 마한)의 뛰어난 문물을 전해 일본 아스카 문화를 태동시켜 오히려 일본에서 더욱 추앙받는 왕인 박사와 풍수도참설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태어난 곳이다. 도선이 태어난 뒤 비둘기떼가 둘러싸고 보호했다 하여 비둘기 ‘구(鳩)’ 자를 마을 이름으로 썼다 전한다.
전통 마을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구림에는 오래된 기와집과 콩떡담이라 부르는 황토와 돌을 섞어 세운 담장따라 마을로 들어서면서 월출산을 바라보는 맛이 각별하다. 왕인 박사 유적지는 연중무휴로 개방시간은 09:00~17:00, 입장료 어른 800원, 청소년·군인 5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료는 대형버스 2000원, 승합 1500원, 소형 1000원이다. 성기동국민관광지 전화 (061)470-2561.
▲ 월출산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도갑사.월출산에는 99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도갑사와 무위사만 남아 있다.
옛 구림중학교 건물을 보수해 세운 도기문화센터와 구림 도기 가마터(사적지 제338호)도 볼만하다. 왕인 박사 유적지 도로 건너편에 있으며, 연중무휴 개장시간 09:00~17:00, 입장료 무료. 전화 (061)470-2566.
도갑사(道甲寺)는 월출산 내 사암 중 가장 큰 절로, 한때 99개 절에 선·교 양종의 승려가 1000명이 넘었다 전한다. 신라 문무왕 1년(661) 도선(道詵) 국사가 창건하고, 조선 세조 2년(1456) 신미(信眉)와 수미(守眉) 대사가 중건했다는 도갑사의 사천왕문에 해당하는 해탈문(解脫門)은 국보 제50호로 지정돼 있다. 통일신라 불상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제89호)도 볼거리다.
월출산 남쪽,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죽전 마을에 자리한 무위사(無爲寺)는 국보 제134호인 극락보전(極樂寶殿)으로 이름난 사찰이다. 커다란 팽나무 고목 아래 자리잡은 소박한 이 법당 외에 고려 왕건이 선각대사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세운 편광영탑(偏光靈塔·보물 제507호), 현존하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는 극락보전 목조 삼존불 뒤의 후불벽화도 볼거리다.
귀갓길을 서해안고속도로로 잡을 경우에는 도갑사를 탐방한 다음 구림마을의 왕인 박사 유적지와 도기문화센터~선사주거지(061-470-2662, 연중 무휴, 09:00~17:00)~독천낙지음식거리를 거쳐 2번 국도를 따르다 영산강 농업박물관(061-462-2796, 매주 월요일은 휴관, 09:00~16:00, 어른 770원, 어린이 330원)을 경유해 목포하구둑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잡는다.
강진을 경유해 보성이나 광주로 향할 때는 무위사를 방문한 다음 2번 국도를 타고 강진읍내로 향하다 읍내 직전 서거리에서 우회전, 55번 지방도로를 따라 다산 정약용이 10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와 같은 명저를 여러 권 펴낸 다산초당(茶山草堂·관리소 전화 061-430-3345)과 백련사(061-432-0837)를 방문한 다음 다시 강진읍내를 거쳐 강진청자박물관(061-430-3565, 연중무휴 09:00~17:00, 어른 1000원, 청소년 500원, 어린이 400원)을 방문하는 순으로 코스를 잡는 게 바람직하다.
영암읍내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월출산온천장도 가볼 만하다. 지하 600m의 월출산 맥반석 암반대에서 올라오는 온천수를 사용하는데, 미네랄 성분과 원적외선 방사량이 풍부해 피로회복과 신경통, 피부질환에 효험이 뛰어나다고 한다. 입욕료 일반 5000원, 초등학생 이하 3000원. 객실은 11월과 12월에는 비수기 요금을 적용해 2인 1실 기준 6만8000원이다. 전화 (061)473-6311. (한필석 월간산 기자 email@example.com)
월출산 주요 등산 코스 입력 : 2003.11.27 11:41 48' TOP
■ 인기 최고의 천황사지 원점회귀 코스
천황 지구 바람골 일원은 월출산다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역으로 탐방객 중 50%가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사자봉~천황봉~장군봉이 에워싸고 있는 바람골을 따라 오르는 사이 눈에 들어오는 기암괴봉은 덮칠 듯 위압적이면서도 기묘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천황사지 기점 코스는 2001년 3월 화재로 전소한 천황사지를 지나 구름다리에서 두 가닥으로 나뉜다. 구름다리를 건너지 않고 오른쪽 길로 내려서면 바람폭포를 거쳐 천황봉 북릉으로 연결되고, 구름다리를 거쳐 쇠사다리 구간을 올라서면 매봉(605.5m) 정상과 사자봉(667m), 703m봉 남쪽 사면길을 따르다 통천문을 거쳐 천황봉으로 이어진다.
산행 방향은 바람골 일원의 웅장한 산사를 조망할 수 있는 구름다리 코스로 먼저 올랐다가 구름다리 코스에 비해 경사가 덜한 광암터~바람폭포로 하산하는 게 정석이지만, 노약자들의 경우는 반대로 잡는 게 힘이 덜 든다. 4시간 소요.
■ 경관 뛰어나면서 유순한 경포대 코스
강진군 월남리 경포대계곡 길은 경관이 가장 뛰어나면서도 유순한 골짜기로 꼽힌다. 다른 계곡에 비해 수량이 풍부해 특히 여름철에 탐방객들이 많이 몰린다.
경포대계곡 길은 매표소에서 약 30분 거리인 합수목에서 두 가닥으로 나뉘어 왼쪽 골짜기는 바람재(구정치)로, 오른쪽 골짜기는 천황봉과 사자봉 사이의 안부로 이어진다. 원점회귀형 산행은 일반적으로 정상 직등로나 다름없는 오른쪽 계곡 길로 천황봉에 올라선 다음 능선길을 따라가다 바람재에서 다시 경포대계곡 길로 내려선다. 4시간 소요.
하산지점을 천황사지로 잡을 때는 바람재로 올라 천황봉과 통천문을 거쳐 구름다리 코스로 내려선다. 바람재 직전 급경사 바위 사면 구간이 있으나 철난간이 설치돼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 있다. 4시간 소요.
■ 산세 두루 살피는 천황사지-도갑사 종주 코스
천황사지와 도갑사 두 기점을 잇는 월출산 종주 코스는 바람골 일원의 웅장한 바위계곡과 기암괴봉이 연이어지는 능선, 억새능선, 그리고 고찰을 탐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등산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산행 방향은 취향에 따라 다르다. 다리품을 덜 팔고 싶으면 도갑사에서 천황사지 방향으로 잡고, 조망을 으뜸으로 삼는다면 천황사지 방면에서 시작하는 게 정석일 게다. 급경사 쇠다리 길은 하산로보다는 등로로 삼는 게 안전하다는 점에서 특히 얼음이 얼어붙을 가능성이 있는 겨울철에는 천황사지 방면에서 시작하는 게 바람직하다. 천황매표소에서는 문화재관람료를 받지 않아 공원 입장료만으로 들어설 수 있다.
바람재에서 옛날 여인들이 베를 짜던 곳이라는 얘기가 전하는 베틀굴(금수굴) 들머리나 혹곧이어 나타나는 갈림목에서 북쪽 길을 따르면 평평한 정상 바위에 구멍 아홉 개가 나 있는 기암인 구정봉(九井峰·705m) 정상을 거쳐 월출산 안의 최고 문화재인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에 이른다.
자연휴식년제로 입산이 금지된 무위사 길이 갈라지는 억새밭인 미왕재를 지나면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 홍계골을 거쳐 도갑사계곡으로 이어진다. 종주 산행은 6시간 정도면 가능하지만, 산 안의 기암괴봉과 산 밖 영암 강진, 목포 일원을 두루두루 살펴보는 재미를 만끽하려면 한두 시간쯤 더 잡는 게 바람직하다.
■ 영암군민들이 아끼는 산성대 코스
영암주민들을 위해 개방된 산성대 코스는 최고의 경관지에서 벗어나 비교적 한갓진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예전 봉화대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전하는 산성대(천황봉 북릉 상의 485m봉) 이후로는 산행이 금지돼 있다.
산행 기점은 영암실내체육관 앞 도로 건너편으로, 묘를 바라보면서 숲길로 들어서면 능선으로 접어든다. ‘月出第一關(월출제일관)’이란 글씨가 음각된 암벽을 거쳐 산성대 정상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 자연해설 프로그램 코스
월출산 국립공원 관리소는 천황사지, 도갑사, 무위사 3개 지역에 탐방객들이 쉽게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자연해설판과 관찰시설을 설치한 1km의 코스를 개설, 체험 위주의 자연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천황지구(1시간, 천황매표소 집결)에서는 자연경관과 지형 지질에 관한 해설을, 도갑지구(1시간30분, 도갑매표소)에서는 습지생물·계곡생태·사찰 해설을, 무위지구(1시간30분, 무위사 주차장)에서는 난·온대식물과 사찰 해설을 위주로 하는 프로그램이 실시되고 있다. 매년 3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실시하며, 공원 입장료 외에 참가비는 없다.
예약접수는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npa.or.kr/wolchul/reserv/reserve.htm → 월출산자연해설프로그램예약)나 전화(061-473-5210 보존과)를 통해 받고, 각종 교육에 필요한 자료 및 재료는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무료 제공한다.
* 월출산 국립공원은 산불예방기간(11월 15일~12월 15일) 중에도 법정 등산로를 개방한다. 관리소 전화 (061) 473-5210. (한필석·월간산 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월출산 주변 맛집들 TOP
“봄 조개, 가을 낙지에 영암별미 짱뚱어탕이라.” 수정 : 2003.11.27 11:54 02'
영암의 별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영암은 월출산 바위만큼이나 희한하고 신비스러운 먹거리들이 많다. 짱뚱어탕과 갈낙탕, 낙지연포탕과 낙지비빔밥 낙지구이 등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맛보기 어려운 별난 음식들이다.
짱뚱어는 탕만이 아니라 회와 구이로도 해 먹는다. 쫀득한 맛을 볼 수 있는 세발낙지는 낙지초무침으로도 나온다. 낙지구이는 술꾼들의 안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민물고기들도 한몫을 거든다. 허한 몸을 재충전한다는 보양식품 가물치 요리, 전라도 양반의 보양식이라는 용압탕이 있다. 기름진 미꾸라지만으로 끓여내는 추어탕과 갖은 양념으로 찜을 한 붕어찜도 빠지지 않는다. 냇물에서 기른 오리를 원적외선으로 구워내는 토종오리훈제도 있다. 영양보신 1호로 내세우는 염소구이집과 멧돼지구이 명소, 산채나물과 더덕을 구워내는 산자락음식점들도 성업 중이다. (전화 지역번호 : 061)
■ 영암읍내
월출산 (473-7722) 식탁에 앉으면 정남향의 넓은 통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월출산 천황봉과 구정봉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것만으로도 이 집을 찾아온 본전은 챙기는 셈. 토종오리 훈제, 로스, 전골(각 3만원)이 대표음식이고 낙지 요리도 취급한다. 낙지연포탕 1만원. 갈낙 1만2000원. 낙지초무침 낙지구이 각 2만~3만원. 추어탕과 생태탕(각 7000원)도 먹을 수 있다. 100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고 주차에도 불편함이 없다.
중원회관 (473-6700) 남도음식축제 전시음식부문솜씨상 수상 경력을 가진 30년 전통의 식당. 집주인 문희례(64) 할머니는 김대중 전 대통령 해외 방문길에 밑반찬을 3차례나 챙겨드렸던 일을 긍지로 삼고 있다. 모치젓, 고들빼기, 돗김치, 토하젓, 엽삭젓, 창젓 등 전라도 맛이 물씬 풍기는 것들이었다. 이 중 DJ가 가장 즐긴 것은 숭어새끼를 묵힌 모치젓. 갈낙탕 1만2000원. 낙지구이(한 마리) 4000원. 짱뚱어탕(7000원)을 먹을 수 있다. 군청 정문 건너편에 있다.
■ 천황사지 코스
월출음식문화원 (471-9274)
국립공원 매표소 건너편. 300명이 함께 민박할 수 있는 깨끗한 방이 있고 150명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 된장찌개 설렁탕 각 5000원, 추어탕 7000원, 연포탕(2인 기준) 2만5000원.
산악인의 집 (473-3778)
호남권 산꾼들의 오랜 단골 집. 도토리묵 파전 김치찌개 된장찌개 동동주 각 5000원, 더덕구이 홍어회 각 1만원, 통닭 3만원. 민박시설도 갖춰져 있다.
■ 무위사. 금릉경포대 코스(강진군성전면)
경포대산장식당 (432-5767)
하산길, 별미 녹차파전과 도토리묵(각 7000원)에 찹쌀동동주(6000원)로 갈증을 푸는 집. 오골계백숙과 오골계약탕(각 3만5000원)도 차려낸다. 1983년에 개점한 집으로 강진군에서 모범음식점으로 지정했다. 매표소 바로 위쪽에 위치. 주차공간이 넉넉하다.
자연이 좋은 사람들 (433-3377)
허브와 녹차로 퓨전한정식(8000원·1인분은 안 됨)을 차려낸다. 허브백김치가 독특하다. 집주인 김은규씨는 자연해설가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민박이 가능하다.
강당식당여관 (433-1296)
여관을 겸하고 있는 멧돼지소금구이 명소. 자가농장에서 기른 멧돼지를 요리하므로 값이 싸다.
무위다원 (434-1774)
월출산 남녘 자락은 넓은 설록차다원이다. 무위사 입구, 은은한 음악을 들어가며 현지 재배한 차 한잔을 마셔 보는 맛은 세속의 것이 아닌 듯하다.
■ 도갑사 코스
호남식당 (472-0509)
도갑사 해탈문 앞쪽 토속음식점거리에 있는 7개 업소 중의 한 곳으로 더덕구이 전문점이다. 자가 농장에서 재배한 더덕만을 쓴다. 더덕백반 8000원.
해남인정식당 (472-0432)
토속음식점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집. 토종닭을 우선 육회로 맛보게 하고 다음 백숙으로 끓여 낸다. 마지막으로 검은깨를 넣어 흑인자죽을 상위에 올린다.
호텔월출산장 (472-0405)
해탈문 바로 앞쪽에 있는 숙박시설. 산채정식(1만5000원)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딸려 있다. 호텔 주변의 조경이 아름답다.
하눌타리가든 (471-1171)
현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다는 닭고기와 오리고기 전문점. 전라남도에서 지정한 모범음식점이다. 토종닭약백숙 소금구이 양념구이 각 3만원. 오리주물럭 오리소금구이 각 2만5000원.
도갑사가는길 철판요리 전문점 (471-1030)
시골 고향의 정취를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죽정마을에 있다. 민박집을 겸한다. 왕인박사유적지가 지척. 토종닭철판요리 약오리정식 각 3만원. 더덕백반 7000원.
■ 독천낙지음식점거리
영명식당 (472-4027)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에는 20여개 업소가 영업 중인 낙지음식거리가 있다. 독천(犢川)의 독(犢)은 송아지라는 뜻이다. 우시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곳은 구림·삼호·미암·서호 4개면의 중심부에 위치해, 가까운 바다에서 잡아 올린 낙지로 요리를 하는 먹거리 집들이 많이 들어섰다. 그 중 영명식당은 고부간 2대가 50년의 전통을 이어왔다. 갈낙탕과 낙지연포탕(각 1만2000원)을 차려 낸다. (박재곤·산악인 ‘산따라 맛따라’ 저자 email@example.com)
월출산… 가는길, 공원이용하려면 TOP
◆◇ 교통 ◇◆
■ 대중교통
천황사·도갑사 지구와 경포대 지구행 군내버스가 다니는 영암읍·성전행 노선버스는 광주에서 주로 운행한다. 광주 광천동 종합버스터미널에서 오전 4시20분부터 오후 10시5분까지 25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영암행 직행버스 이용. 오전 4시30분부터 오후 10시5분까지 강진이나 해남행 직행버스는 영암과 성전을 경유한다. 요금 영암 4400원, 성전 5600원. 전화 062-360-8114 ARS.
천황사와 도갑사 지구는 영암에서, 경포대 지구는 강진군 성전면에서 운행한다.
영암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천황지구는 1일 5회(06:40, 09:10, 10:10, 15:20, 16:30) 출발(15분 소요, 730원), 도갑지구는 1일 2회(09:30, 16:10) 출발(20분 소요, 850원). 전화 061-473-3355(~7).
경포대(무위사 경유)행은 성전시외버스정류장에서 1일 6회(07:00, 08:50, 10:15, 15:15, 16:20, 17:45) 출발(10분 소요, 750원) 한다. 전화 061-432-5900.
■ 승용차 : 호남고속도로 이용시 광산(비아)IC에서 빠져나와 13번 국도를 나주를 거쳐 진입한다. 광주시내를 거칠 경우 30분 이상 더 걸린다. 서해안고속도로는 무안IC에서 1번 국도로 바꿔 타고 동쪽으로 나아가다 나주에서 13번 국도를 따라 영암으로 진입한다.
◆◇ 공원 이용료◇◆
입장료 : 천황지구와 경포대지구는 모두 어른 13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300원. 도갑지구는 공원입장료 외에 문화재 관람료(어른 12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400원) 추가.
■ 주차요금(당일 기준) : 소형차(800cc 이하) 2000원, 승용차 4000원, 대형차 6000원.
야영장 : 공원 내에는 천황지구, 금릉경포대지구 2개소에 야영장이 있다. 이용료(1박 기준)는 소형 3000원, 중형 4500원, 대형 6000원.
■ 자연휴식년제(2003년 1월 1일부터 3년간)
구간 / 거리(km)
무위사~억새밭 / 2.0
천황사~바람폭포 / 1.0
동원농장~억새밭 / 3.1
■ 관리소·매표소 전화(지역번호 061)
본소 473-5210, 5211
천황매표소 472-9201
도갑분소 473-5111
도갑매표소 471-5122
금릉경포대매표소 432-7921
“가마솥에 지은 고슬고슬한 흰 쌀밥에 우리집 전독간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어봐. 다른 반찬이 아무것도 필요 없어. 밥 한 그릇 뚝딱이지”.
200년 묵은 장(醬)이 있다. 올해 여든다섯의 노(老) 종부(宗婦)는 이 장 맛을 두고 “누가 훔쳐 먹을까 무섭다”고 했다.
한 손가락 찍어 입에 넣어봤다. 검지만 탁하지 않고, 구수하면서 짜지 않고, 약간은 달콤한 맛. 과연 명장(名醬)이었다.
■ 200년째 묵은 간장 독에 햇장 넣어
27일 충남 논산군 노성면 교촌마을. 집집마다 내년 한 해 동안 먹을 장을 담그기 위해 메주 띄우기가 한창이다. 17세기 말 소론(少論)의 거두였던 윤증(尹拯)을 중시조로 모시는 파평 윤씨 노종파(魯宗派) 종갓집을 찾았다. 안채 뒤뜰 양지바른 장독대에 그 유명한 ‘전독간장’이 있었다. 묵은 간장독(항아리)에 햇장을 첨장, 독을 전(傳)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충남 논산군 노성면 교촌리 윤증 고택(古宅) 장독대에서 종부 양창호 할머니가 큰며느리 신정숙씨와 함께 장 담그는 비법을 설명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 집은 햇장을 담가 묵은 장에 합치는 방식으로 200년간 한결같은 장맛을 유지해왔다. /논산=전재홍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11대 종부 양창호(85) 할머니는 “새로 담근 장을 묵은 간장에 부어 되매기 장을 만드는 게 우리집 전통이야. 그래서 200년이 됐다는 거지. 장 맛? 기본은 메주지. 겉에서 보기에 누릿하게 잘 말랐다고 다 좋은 게 아니야. 속을 봐야지. 잘 뜬 메주는 속을 갈라보면 검붉은 빛깔이 나. 그 다음은 소금이 중요해. 당진 소금밭에 가서 천일염을 직접 사와야 돼. 세 번째는 물인데, 물은 우리집 마당의 우물물이 최고야.”
늙은 종부의 장 맛 자랑은 계속됐다.
“옛날에 우리집 장 달이는 날이면 온 동네가 달콤한 냄새로 뒤덮였지. 배탈나거나 소화 안될 때 간장 한 숟가락 먹으면 금세 나았어. 위장병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집 간장 한 번 먹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었거든”.
지난 98년 추석 때 한 방송사에서 음식 잘하는 종갓집을 모아놓고 음식 품평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종갓집이 모두 나왔다고 한다. 저마다 독특하고 화려한 요리를 선보였지만, 1등은 이 집의 떡볶이가 차지했다. 단순하고 소박한 요리였지만 양념을 한 간장 맛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란 게 심사위원들 평가였다.
이 집 간장은 재료 외에 담그는 방법도 특이하다.
음력 10월에 메주콩을 삶아 메주를 만든다. 메주는 가로 15㎝, 세로 20㎝ 크기로 직사각형으로 만든다. 마루에 짚을 깔고 메주를 늘어놓아 1주일 정도 말린다. 다음은 짚으로 동여매 40일 정도 처마밑에 매달아 둔다. 메주를 내려 마루 한 켠에 짚 한 켜, 메주 한 켜씩 놓고 비닐을 덮는다. 비닐에는 공기 구멍을 만들어야 습기가 생기지 않는다. 한 달 정도 지나서 열어보면 메주 전체에 곰팡이가 피어 있다. 이를 다시 딱딱해질 정도로 햇볕에 말린다. 말린 메주는 물에 씻지 않고 솔로 닦는다.
■ 새해 첫째, 둘째 甲午일이 장 담그는 날
장 담그는 날은 반드시 새해의 첫째 또는 둘째 갑오(甲午)일을 택한다. 2달에 한 번꼴로 돌아오는 갑오일은 옛부터 귀신도 못 돌아다닌다고 해서, 횡액이 끼지 않는 날이다.
항아리에 메주를 차곡차곡 담고 빈 공간은 메주를 잘게 쪼개 채운다. 그리고 나서 물과 소금을 붓는데, 여기 이 집만의 독특한 비법이 있다.
보통 간장을 담글 때는 소금 양을 물의 15% 안팎으로 맞춘다. 그러나 이 집은 물과 소금을 1대 1로 잡는다. 소금을 많이 쓰는 셈이다. 항아리 맨 위에는 다시 웃소금을 5㎝ 두께로 얹고 천을 덧씌운 다음 뚜껑을 덮는다.
보통 장은 담근 지 40일이면 간장을 뜨지만, 전독간장은 6개월 정도 지난 추석무렵에 간장을 뜬다. 항아리를 열어보면 소금이 새카만 강정처럼 딱딱해져 있다. 이 소금떡은 꺼내 버리고 메주를 한쪽으로 치우면 간장이 술처럼 푹 올라온다. 햇간장이다.
“막 뜬 햇간장은 어른들이 첨으로 맛보셨지. 그때 가슴이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 姑婦시집살이 합치면 99년
전독간장 맛은 둘이 합쳐 시집살이가 99년이라는 ‘늙은 며느리’들이 지키고 있었다. 양창호 할머니는 열아홉 살 때 경기도 안성에서 이곳으로 시집와 66년을 살았다. 서울에서 자란 큰며느리 신정숙(57)씨는 지난 70년 이 집 종손을 만나 연애 결혼을 했다. 두 종부의 남편들은 이미 저세상으로 갔다.
식솔이 많아 1년에 쌀 300가마를 먹었다는 종갓집의 시집살이는 진솔버선(새 버선)을 신으면 그 날로 해질 정도로 고됐다. “시조부님 입맛이 얼마나 고귀하던지, 김치가 네모 반듯하게 썰어지지 않으면 바로 상을 물렸어. 빨간 고추도 가루로 드시는 법이 없어. 꼭 통고추를 칼로 썰어 드려야 했지. 진짓상을 볼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니까.”
다시 종부로 살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못 살지, 안 살어”라는 할머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며느리가 말했다. “피차 일반이에요, 어머니.” (논산=황대진기자 email@example.com)
[주말 매거진] 몸에 좋은 간장·된장… TOP
콩의 힘! 입력 : 2003.11.27 10:49 56'
간장이든 된장이든 장의 기본은 메주다. 메주는 콩으로 만든다. 콩을 잘 먹지 않던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 콩이 항암물질로 널리 알려지면서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콩 바람’이 불고 있다. 장의 효능은 바로 이 콩의 힘에서 나온다.
콩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민족에게 쌀에 부족한 단백질과 지방질을 보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콩에는 단백질이 40%, 지방이 20% 정도 들어 있으며 전분은 1% 이하다.
콩에는 또 토코페롤로 불리는 비타민E 성분이 많이 들어 있는데, 이는 지방의 산화를 방지해 동맥경화와 같은 성인병 예방에 좋다. 또 말초혈관의 혈액 순환 촉진 및 호르몬의 균형 유지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최근에는 콩을 발효한 식품의 항암효과가 알려지면서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 앨라배마대학의 스테펜 바너스 박사는 콩을 먹인 쥐와 먹이지 않은 쥐를 비교 실험한 결과 콩을 먹인 쥐의 폐암 발생률이 70% 가량 낮았다고 발표한 바 있다.
콩의 폐암 억제 효과는 동물 실험뿐만 아니라 역학조사에서도 밝혀지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콩을 적게 먹는 미국 여성에 비해 콩을 많이 먹는 아시아지역 여성의 폐암 발생률이 8분의 1 정도로 낮았다고 한다.
동의보감에는 콩을 장기간 복용하면 보신효과가 있으며 체중이 증가한다고 했다. 또 위장의 열을 제거하며 장의 통증, 열독에 효과가 있고, 대소변의 배설을 다스리며 부종, 복부 팽만 등에도 효과가 있다고 했다.
또 콩가루는 위와 장을 다스리며, 곡물의 소화를 돕고 종기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으며, 콩나물은 무릎의 동통을 다스리고 근육통을 없애는 데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최근에 뜨고 있는 검은콩은 예부터 해독제로 쓰였는데 독극물에 중독됐을 때 검은콩을 달여 먹으면 해독효과가 있다고 하며, 끓는 물에 화상을 입었을 때도 검은콩을 진하게 끓여 환부에 바르면 낫는다고 전해온다. 장은 이 같은 콩의 효능을 그대로 흡수했다. 서양 소스보다 우리 장의 경쟁력이 강한 이유다. (황대진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주말 매거진] 집에서 장 담그기 TOP
겨우내 먹을 김장김치를 담그고 나면 곧바로 장 담글 메주를 준비하는 게 우리 조상들의 겨우살이 순서였다.
예로부터 입맛이 예민해 소금 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우리 조상들은 장 담그는 문화가 발달했다.
장은 고기를 발효시킨 육장(肉醬), 생선을 발효시킨 어장(魚醬), 콩을 발효시킨 두장(豆醬)이 있는데, 그 중 콩을 이용한 장 만드는 기술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발달했다. 콩은 한반도 전역에서 풍부하고 값싸게 얻을 수 있는 단백질 공급원으로 발효 음식의 주재료로 사용됐다.
▲ 장담그기 행사에 참여한 주부들이 간장 만드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전문가들은 좋은 장맛을 내려면 콩과 소금, 물 등 재료의 질(質)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손길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조선일보 DB
장 담그기는 콩으로 메주를 쑤면서 시작된다. 우선 가을걷이한 노란 햇콩을 잘 골라 하루 정도 찬물에 담가 푹 불린다. 가마솥에 무르게 푹 찐 콩을 절구에 빻아 적당한 네모 모양의 메주를 만든다. 메주는 겉면을 말리고 속을 발효시키는 이른바 ‘띄우기’를 거쳐 비로소 장의 재료가 된다.
메주는 이듬해 정월 적당한 소금물에 한 달 정도 담가 간장과 된장으로 가른다. 장 담그는 준비를 위해서는 질 좋은 콩, 좋은 물, 좋은 날을 가리는 정성이 필요하다. 특별히 신(辛)일은 장 담그기를 꺼렸는데, 이는 ‘시다’는 말과 음이 통하는 날이라 장맛이 시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 담그기 전에는 문상(問喪)도 가지 않았으며 몸을 깨끗이 했다.
음력 정월에 길일을 택해 삼사 일 전에 굵은 소금을 깨끗한 물에 풀어 체에 받친다. 소금물의 농도는 보통 17% 정도로, 장 담그는 날이 늦어져 기온이 올라갈수록 농도를 진하게 해야 한다. 소금물은 여분을 남겼다가 햇볕에 졸아드는 부분을 채운다.
이렇게 40일 정도 담그면 메주에서 맛과 영양이 빠져나온다. 이때 나오는 즙액이 간장이고, 건져 낸 메주에 소금을 더 넣어 주물러 만든 것을 된장이라 한다.
그해 담근 맑은 청장은 주로 나물을 무치거나 국의 간을 볼 때 쓰고, 묵은 장은 진장이라 하여 약식이나 장조림 같은 검은 빛을 얻고자 할 때 쓴다.
된장은 잘 눌러 두어 익혔다가 찌개나 무침에 쓰는데, 영양학적으로 탁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는 항암효과가 입증되기도 했다.
된장으로 국이나 찌개를 끓이면 발효식품 특유의 떫은 맛이 나는데, 약간의 생강즙을 넣어 주면 떫은 맛이 덜해진다.
요즘엔 오랜 숙성기간이 필요한 된장과 달리 속성으로 띄워 먹는 청국장이 변비나 다이어트에 좋다 해서 인기다. 푹 삶은 콩을 소쿠리에 볏짚과 같이 이삼 일 띄우면 실 같은 진액이 나온다. 여기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조금 넣고 빻아두면 청국장이 된다. 청국장은 된장보다 짠 정도가 약하므로 찌개를 끓일 때는 넉넉히 넣어 걸죽하게 해야 제 맛이 난다. 된장으로 간을 맞추면 훨씬 감칠 맛이 나기도 한다.
고추장은 고추가 전래된 임진왜란 이후부터 담그기 시작했다.
고추장은 따로 고추장용 메주를 준비해야 한다. 잘 말린 메주를 가루 내고, 찹쌀가루나 멥쌀가루를 익혀 엿기름으로 삭힌 후 섞어 담근다. 고추장은 물론 메줏가루도 좋아야 하지만 햇볕에 잘 말린 고추가 한몫을 한다. 고추장을 이용한 요리는 일일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종류가 다양하지만, 특히 꿀이 들어가 있어 싫어하는 이가 없다는 ‘약고추장’이 유명하다. 발효가 진행 중인 고추장에 양념해 볶은 고추장을 넣어 같이 조려준다. 이때 고추장의 농도에 따라 배즙을 넣으면 훨씬 좋은 맛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장 맛을 오덕(五德)으로 표현했다. 우선 다른 맛과 섞여도 제 맛을 잃지 않아 단심(丹心),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아 항심(恒心), 비리고 기름진 냄새를 없애준다 하여 불심(佛心), 매운 맛을 부드럽게 해주므로 선심(善心),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고 해서 화심(和心)이라고 했다. 장 맛에 인생살이가 다 들어 있지 않은가. (박종숙ㆍ요리연구가)
[주말 매거진] 사먹는 장 고르기 TOP
▲ 한 주부가 대형 할인점에서 간장을 고르고 있다. 장 제조업체들은 최근 건강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을 겨냥, 국산 콩 100%로 만든 간장, 홍삼을 넣은 고추장 등 프리미엄급 제품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장을 담가 먹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굴뚝 같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자. 아파트에 커다란 장독을 놓을 장소가 있을까. 냄새나는 메주를 베란다에 널어놨다면 옆집 사람에게 당장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
여론 조사기관인 TNS 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3000가구의 84.7%가 최근 1년 내에 간장을 사먹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제 장을 담가 먹는 집보다는 사먹는 집이 훨씬 많아졌다는 얘기다.
장을 대량 생산하는 식품회사들은 최근 국산 콩을 사용, 전통적인 장맛을 재현한 ‘프리미엄’급 제품들을 경쟁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일반 제품보다 값은 비싸도 건강에 좋은 장을 먹겠다는 소비자들이 줄을 서 있기 때문이다.
■시판장, 어떤 게 있나
샘표는 100% 콩과 소금만을 사용, 재래식 방법으로 만든 ‘맑은 조선간장’을 판매 중이다. 샘표식품 박도선 부장은 “전통 간장의 고유한 맛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며 “기존 국간장에 실망했던 소비자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샘표는 특히 100% 국산 태양초 고추를 원료로 사용한 ‘국산태양초 햇고추장’을 선보이며 고추장시장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샘표의 ‘숨쉬는 콩된장’은 재래식 된장의 구수한 맛을 살려내기 위해 콩알 하나하나에 메주를 띄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대상의 ‘청정원 햇살담은 조림간장’은 지난 2001년 출시 이후 기존 혼합간장에 익숙해져 있던 소비자들의 입맛을 양조간장 쪽으로 바꿔 놓은 제품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천연 양송이와 굴농축액이 들어 있어 맛이 진하고 깔끔한 것이 특징이다.
대상의 ‘순창 찰고추장’은 전통적으로 장맛 좋기로 유명한 순창에서 직접 생산되고 있다. 100% 콩메주를 발효 첨가하는 등 전통의 제조방법을 현대화했다.
해찬들의 ‘태양초 고추장’은 고추장 특유의 매콤하고 시원한 맛을 살린 대신 달고 텁텁한 맛을 없앴다. 고추장에 칼슘을 첨가했다는 것도 다른 제품과 구별되는 점이다.
해찬들 제품 중 가장 특이한 것은 홍삼고추장이다. 해찬들 관계자는 “6년근 홍삼 분말을 넣었으며 국산 고춧가루만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어떤 장을 고를까
수많은 시판용 장 중 과연 어떤 제품이 좋을까
우선 간장을 보자. 간장은 진간장, 왜간장, 양조간장, 조선간장 등 여러 이름으로 판매 중이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면서 간장공장을 설립하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나온 간장을 우리 전래의 간장과 구별하여 ‘왜간장’이라고 불렀다. 보통 진간장으로 불리는 게 바로 이 왜간장이다. 반면 짠맛이 강해 주로 국을 끓일 때 사용하던 우리 전통 간장은 이때부터 ‘조선간장’으로 불리게 됐다.
간장은 제조방식에 따라 종류를 나눌 수 있다. 간장 용기를 잘 들여다보면 양조간장인지 혼합간장인지 표시돼 있다. 양조간장은 콩과 전분으로 만들며 곰팡이를 이용해 발효시킨다. 보통 6개월간 미생물의 숙성 과정을 거쳐 만들어져 자연숙성간장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반면 혼합간장은 콩에서 얻은 단백질을 화학적으로 분해, 아미노산액에다 양조간장 원액을 섞어 만든다. 화학 분해를 하기 때문에 좀더 빨리 간장을 만들 수 있어 대량 생산에 유리하며 그만큼 가격도 저렴하다.
간장을 고를 때에는 레벨 뒷면에 HACCP(식품위생우수식품)마크가 붙어있는지 확인하면 좋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권장하는 HACCP 인증을 받은 제품이 안전과 위생면에서 다소 나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 양조간장의 경우 숙성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시판 된장의 경우 가정에서 만드는 것과는 달리 콩과 밀을 섞어 만든 된장이 있는가 하면 재래식 그대로 콩 100%로 만든 된장도 있다. 콩과 밀가루를 섞은 된장은 단맛이 있지만 전통적인 구수한 맛은 다소 떨어진다. 최근에는 업체마다 100% 콩된장 제품들을 선보이고 있다.된장을 개봉한 후에는 냉장 보관하는 것이 좋다. 요즘 나오는 제품들은 구수한 맛을 살리기 위해 방부제를 넣지 않기 때문에 색깔이 검어지는 ‘갈변’현상이 빨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고추장은 원재료의 품질을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유명 고추장 제품들은 대부분 중국산 고춧가루를 쓴다.
마지막으로 제품의 정확한 성분이나 제조방법을 알고 싶으면 각 제조회사의 고객 상담전화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황대진기자 email@example.com)
[주말 매거진] 장을 이용한 간단한 요리 TOP
입력 : 2003.11.27 10:49 15' / 수정 : 2003.11.27 10:58 05'
■ 맑은 조선간장으로 맛을 낸 샐러드
● 재료
샐러드용 채소 적당량, 맑은조선간장 3큰술, 식초 4큰술, 설탕 3큰술, 참기름 1큰술, 다진마늘 1큰술, 굵은 고춧가루 1큰술, 송송 썬 풋고추와 홍고추 1개씩, 레몬 1/4개 배 1/4개
● 만드는 법
1. 샐러드용 채소는 한입 크기로 썰어 얼음물에 30분간 담가 싱싱하게 한다.
2. 분량의 재료를 합하여 소스를 만든다.
3. 준비한 채소의 물기를 뺀 후 껍질 깐 배를 얄팍하게 썰어 합하여 소스를 곁들여 낸다.
■ 진하게 끓이는 청국장
● 재료
차돌박이 50g, 참기름 1/2큰술, 다진마늘 1/2큰술, 청국장 5큰술, 된장 1큰술, 배추김치 150g, 두부 130g, 멸치다시마육수 2컵, 생강즙 1작은술, 대파 1/2대, 풋고추 1개, 홍고추 1/2개
● 만드는 법
1. 배추김치를 잘게 썬다.
2. 양념에 무친 소고기와 마늘을 참기름으로 볶다가 잘게 썬 김치를 넣고 다시 한 번 볶다가 육수를 붓는다.
4. 김치가 물러지면 청국장과 된장을 넣어 끓인다.
5. 중간에 두부와 파 생강즙을 넣어 맛을 낸다.
■ 된장으로 맛을 낸 돼지고기구이(맥적)
● 재료
돼지목살 400g, 미나리 20g, 달래 10g
양념장
된장 1큰술, 양조간장 1/2큰술, 맛술 1큰술, 조청 1큰술, 참기름 1큰술, 배즙 2큰술, 깨소금 1큰술, 생강즙 1작은술, 마늘 3쪽
● 만드는 법
1. 돼지고기는 도톰하게 썰어 잔 칼집을 넣는다.
2. 미나리와 달래는 송송 썰고 마늘은 편으로 썬다.
3. 된장에 양념을 합쳐 고루 풀어 양념장을 만든다.
4. 고기에 마늘편과 달래와 미나리를 합하여 버무린다.
5. 양념이 잘 어우러지면 직화로 구워 낸다.
■ 구운김과도 잘 어울리는 약고추장
● 재료
고추장 1컵, 배즙 1/2컵, 소고기 100g(양조간장 2작은술, 설탕 1작은술, 다진파 2작은술, 다진마늘 1작은술, 참기름·깨소금 각각 1/2큰술씩, 후춧가루 약간), 잣 1큰술, 참기름 1큰술
● 만드는 법
1. 소고기는 곱게 다진 후 괄호 안의 양념으로 무쳐 볶는다.
2. 볶은 고기에 고추장과 배즙을 넣어 은근한 불로 조린다.
3. 충분히 어우러진 고추장에 잣과 참기름을 넣어 마무리한다.
입력 : 2003.11.25 10:55 40' / 수정 : 2003.11.25 11:07 50'
▲ 강원도 철원평야에 날아온 두루미떼. 야생조류를 탐사할 땐 자연에 대한 예의가 필요하다.
■ 첫째 주:야생조류탐사
첫 주엔 강원도 철원 민통선 마을로 야생조류탐사를 갑니다. 그곳에서는 독수리와 쇠기러기, 재두루미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철새를 바라보며 분단된 우리나라의 슬픈 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수 있을 듯합니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겠지만 생태 나들이라는 이름 아래 오히려 그냥 놔두어도 좋을 것들을 더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어디를 가느냐보다 왜 가느냐를 더 많이 생각하고 자연에 대한 최대의 예의를 지켜야 하겠지요.
지난해 양지 바른 곳에 마치 군인처럼 줄지어 앉아 있던 독수리들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여섯 살배기 어느 꼬마가 행여 독수리가 날아갈까 숨죽여 걸으며 멀리서 조심조심 관찰하던 모습도요. 올해도 또 내년에도 철새들 모습을 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반드시 생각해봐야 겠지요.
■ 둘째 주:겨울 산행
▲ 함박눈 맞으며 겨울산행을! 안전장비는 필수다.
저는 개인적으로 겨울 산을 좋아합니다. 한 해의 묵은 짐들을 훌훌 벗어버린 채 빈 모습으로 서 있는 나무와 숲들이 마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번 주엔 아이들과 함께 서울 관악산에 갈 겁니다.
겨울 산행을 할 때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아이들과 함께하거나 자주 산을 찾지 않았을 경우라면 비교적 쉬운 코스의 야트막한 산을 오르는 것이 좋습니다. 또 겨울에는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서둘러 산행을 하고 적어도 오후 4시에는 산을 내려오는 것이 좋습니다.
산을 오르면 땀이 많이 나는데 자칫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므로 보온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가방에는 비상시에 먹을 초콜릿과 땅콩, 충분한 양의 물을 함께 가져가는 것이 좋습니다. 밑창 두툼한 등산화는 필수고요, 부상을 대비해 약간의 구급약도 필요합니다.
■ 셋째 주:바다 여행
▲ 보물 1336호인 건봉사의 능파교.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장신2리에는 소똥령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산 생김새가 소똥 모양이라서 소똥령이라 하기도 하고, 고개 너머 장으로 팔려 가는 소들이 고개 정상에 있는 주막까지 와서는 너무 힘든 나머지 똥을 많이 누어서 소똥령이라고 한대요.
우선 전통마을로 지정된 이곳에서 팥죽을 쑤어 먹고 두부를 만들어볼까 합니다. 가마솥에 장작을 때고 새알심 을 동동 넣은 팥죽 한 사발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 한 접시를 상에 두고 별이 총총한 밤 흰 눈으로 덮인 산을 바라보며 뜨끈한 아랫목에서 저녁을 먹는다면 대장금의 수라상이 안 부럽지요.
다음날에는 동해의 일출을 보고 건봉사 쪽으로 가볼까 합니다. 파도를 헤치며 불법의 세계로 간다는 능파교, 돌기둥 위에 봉황이 앉아 있는 돌솟대 등 옛모습을 간직한 겨울 산사에서 마음도 씻고 스님으로부터 역사 깊은 절에 내려오는 숨은 옛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면 좋겠지요.
■ 넷째 주:크리스마스 공연 한 편
마지막 주엔 신나는 타악기 공연 구경갈까 합니다. 50여 가지의 타악기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선율과 리듬으로 레게 음악부터 크리스마스 캐럴까지 들려주는 극단 황금겨자씨의 ‘KNOCK’이라는 공연인데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공연을 보러 갈 때는 아이와 충분히 보러 갈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공연장에서의 예절을 숙지시키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는 것이기 때문에 여럿이 함께할 때의 예절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거든요. 공연이 시작되기 전 아이들에게 미리 화장실을 가게 하고 음식물을 가지고 들어가거나 하지 말고 공연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하여 좌석을 확인하고 또 공연이 끝나고 아낌없는 박수를 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함께 가져가야겠지요? (홍준희‘마음에 드는 학교(www.mahak.net)’ 운영자)
남종화의 聖地운림산방 입력 : 2003.11.20 11:37 19'
섬에 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주문을 거는 것일까. 섬에 가면 잃어버린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섬은 오늘의 현실을 한번 떠나보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장소다. 조선일보 주말매거진은 독자들 호평 속에 연재되고 있는 ‘한국의 산’과 함께 ‘한국의 섬’ 시리즈를 오늘부터 연재한다. 첫회는 국내에서 세 번째 큰 섬으로 악천후라도 육교를 건너 갈 수 있는 전남 진도 편이다. 이곳에서 보석 같은 명소들을 찾아가보자.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환절기. 고교 교사 이원도(50·경기도 고양시)씨 가족 3명은 진도를 찾았다. “한국화가 허유의 혼이 깃들어 있다는 운림산방을 가보고 싶었다”는 게 이곳을 방문한 이유. 이씨는 “배롱나무의 화사한 꽃이 다 떨어진 계절이라 아쉽긴 하지만 바로 곁에 소치기념관과 진도역사관이 있어 교육용으로도 그만”이라고 말했다.
진도읍에 사는 현지 주민 허유정(27·학원강사)씨는 “남종화의 성지로 불리는 운림산방이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것은 인공연못이며 그 연못 한가운데 작은 섬에 심어진 배롱나무 등 정원 조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라며, “계절별로 빛깔과 모양을 달리해가며 멋진 풍광을 연출해내 틈나는 대로 찾아와 사진을 찍어둔다”고 자랑했다. 운림산방은 그저 가만히 거닐기만 해도 동양화의 맑은 정신이 머릿속에 솔솔 박히는 문화유적지인 동시에 결혼을 앞둔 진도 처녀총각들의 기념사진 촬영 장소로도 자주 애용된다.
운림산방뿐 아니라 진도는 섬 전체가 볼거리요, 역사 유적의 보고다. 특히 철새들이 한반도로 모여드는 요즘의 진도 나들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가 진도군 북쪽 군내호에서 백조를 비롯한 겨울철새들의 군무를 만나는 일이다. 호반휴게소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새들의 휴식을 담고 있던 심해경(목포시 용당동)씨는 “이곳은 철새들의 낙원”이라며 “철새들을 본 후 해가 지기 전에 지산면 서쪽 해안가 세방마을로 가서 보는 낙조도 일품”이라고 했다.
▲ 주말을 맞아 가족여행객들이 운림산방 연못가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진도가 고향인 예비 신혼부부들은 이곳에서 평생 간직할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운림산방 옆 소치기념관은 1대 허유, 2대 허영, 3대 허건 등이 남긴 동양화를 전시한 예술공간이다.
진도 나들이는 진도대교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를 잇는 현수교가 진도대교이다. 바다의 폭은 고작 295m로 한달음에 건너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다리 아래로는 남해 바닷물이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이 좁은 해협이 바로 울돌목이며 한자로는 명량이라고 불린다. 물살이 얼마나 거센지는 진도대교에 바짝 붙어 있는 녹진휴게소 뜰에서 내려다보면 쉽사리 알 수 있다. 그토록 빠른 물살을 이용해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유명한 명량해전이다.
진도는 용장산성이며 남도석성 등 문화유적지도 풍부하지만 신비의 바닷길을 비롯해서 해안 풍광이 절경이고 한겨울에도 들판에서는 월동배추, 대파 등이 널리 재배돼 싱싱한 초록빛 향연이 줄기차게 펼쳐진다. 간재미회와 찜, 바지락회, 전라도 한정식도 별미다.
섬 속의 섬인 진도군 남단의 조도나 관매도까지 방문하고 싶은 여행객들이라면 팽목항으로 내려가서 여객선에 몸을 싣고 귀갓길에는 흑미, 홍주, 구기자주, 돌미역과 돌김 등 진도의 특산물을 주머니 형편대로 구입하는 것도 좋다.
진도에 가는 길엔 꼭 듣게 되는 노래가 있다. 진도아리랑이다.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노다 가세 노다나 가세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 가세.” (진도=유연태 여행작가·‘포인트 주말여행’저자)
[주말 매거진] 한국엔 유인도 444개·무인도 2726개 TOP
한국은 필리핀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의 ‘섬 왕국’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한국해운조합에 따르면 국내의 섬은 유인도 444개, 무인도 2726개 등 총 3170개(일부 조사에서는 3200여개로 추정)에 이른다. 이들 섬은 대부분 해저 화산활동에 의해 생겨난 섬이며 탄생 시기를 보면 대개 한반도가 형성된 제3기 중신세와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제주도의 부속섬인 비양도의 경우에는 1002년 6월에 탄생했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다.
대개의 큰 섬들은 부속 섬들을 보유하고 있다. 가장 큰 섬인 제주도만 해도 우도, 가파도, 마라도, 추자군도 등의 유인도를 비롯, 차귀도 등 많은 무인도를 거느렸다. 섬들이 불규칙적으로 모인 것은 군도, 한 줄로 늘어선 것을 열도라고 칭한다. 전라북도의 고군산군도, 충청남도의 격렬비열도 등이 그 같은 보기이다. 섬의 크기를 면적으로 따져 베스트 7위까지 보면 1위를 제주도가 차지하고 있으며 그 뒤로 거제도, 진도, 강화도, 남해도, 안면도, 완도 순이다.
▲ 전남 여수에서 경남 통영 한산도까지 이어지는 한려수도를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섬 사이로 배 한 척이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다. 우리나라 바다 곳곳에는 수많은 아름다운 섬이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일보DB
우리나라 섬 여행은 교량이 놓여져 차로 편하게 여행할 수 있는 곳과 배를 타야만 하는 곳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제주도는 배편이나 비행기편을 이용하고 울릉도는 반드시 배를 타야 하지만 거제도, 진도, 강화도 등 육지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큰 섬들에는 다리가 놓여있어 폭풍 등의 기상변화에 상관없이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앞으로 인천에서 신안군을 거쳐 부산까지 이어지는 77번 국도가 완공되면 서해안과 남해안의 많은 섬들이 교량으로 이어져 여행객들의 나들이를 손쉽게 도와줄 것으로 보인다.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최소한 1박 이상을 해야만 그 섬의 지리적 특성과 주민들의 인심을 만나볼 수 있다. 인천·경기권을 제외한 섬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멀고 외딴 곳까지 찾아가는 여행이니만큼 시간적 여유를 갖고 일몰, 일출 감상에 섬사람들의 소박한 밥상도 받아보고 밤하늘의 별들도 가슴에 듬뿍 담아올 일이다. 또 서해안의 섬들에서는 개펄체험이 가능한 곳들이 많아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자녀들의 현장체험 학습에도 큰 도움을 준다.
그뿐 아니다. 작은 섬들을 찾아가면 하나씩 솟아있는 정상까지 어렵지 않게 등산을 즐길 수 있고 바닷가를 따라 형성된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산길 트레킹도 정겹기만 하다. 유람선 관광도 필수이다. 홍도나 흑산도 같은 섬에 가서 유람선을 타지 않으면 반쪽짜리 여행이 되고 만다. 파도따라 넘실거리는 유행가 가락도 흥겹다. 섬에 들어갔다가 폭풍주의보라도 만나 그 안에 갇히게 되면 육지를 그리워하지 말고 자연이 안겨준 휴식의 시간을 최대한 즐기는 지혜도 필요하다. (유연태·여행작가)
[주말 매거진] 섬 여행땐 일기예보 꼭 챙기고 구급약품 필수
입력 : 2003.11.20 11:42 39'
수정 : 2003.11.20 11:52 34' TOP
한국해운조합(홍보실 02-6096-2043)이 일러주는 ‘섬을 여행할 때 준비물과 유의사항’은 여행객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1)섬을 방문할 때는 여객선의 좌석을 예약해두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여객선의 승선권은 보통 7일 전부터 해당선사에서 예약을 받는다.
2)늘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뱃길은 비가 많이 오는 것은 상관없으나 일단 태풍주의보가 내리면 막힌다. 때문에 라디오는 필수품이다.
3)섬에는 수송문제 때문에 생필품이 대체로 부족한 편이다. 간단한 일상용품과 세면도구, 구급약품 등은 반드시 가져간다. 작은 섬을 방문할 경우 먹을거리를 충분히 준비해 간다.
4)1주일 정도의 여정이면 읽을 책을 두세 권 가져가는 게 좋다. 섬 여행 일정은 물놀이와 물구경, 산책, 독서와 명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5)조개나 게를 잡으러 갈 경우 담을 수 있는 호미나 모종삽, 맛소금, 게에게 물리지 않도록 면장갑을 준비해 가면 좋다.
6)섬 내 마을버스를 이용할 경우 여객선 시간에 늦지 않도록 버스기사에게 정확한 운행시간을 미리 문의한다. (유연태·여행작가)
[주말 매거진] 진도 여행명소, 다도해 낙조감상에 최적지 TOP
입력 : 2003.11.20 11:45 49' / 수정 : 2003.11.20 11:55 36'
진도에는 보석 같은 관광명소가 널려 있다. 그래서 하루 관광으로 즐기기는 벅차다. 적어도 1박2일, 넉넉하게 2박3일은 잡아야 제대로 섬을 볼 수 있다.
진도 기상대부터 찾아보자. 진도군 최고봉인 첨찰산(485.2m) 봉우리와 눈높이를 마주하고 있다. 기상대 뜰에서는 사방팔방으로 시원하게 시야가 뚫려 진도 주변 다도해 바닷가 풍광을 맘껏 눈에 담게 된다. 예서 첨찰산 봉화대까지는 불과 10여분 거리. 의신면 회동마을과 가계해변 중간, 신비의 바닷길을 서양에 처음 소개한 인물인 피에르 랑디 신부의 이름을 따서 조성한 공원 인근 국도변 바닷가에는 3층짜리 전망대가 만들어져 일출 감상 포인트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해남반도 위로 솟아오르는 일출을 만나보기에 적당한 곳이다. 날이 맑으면 제주 한라산도 눈에 들어온다.
진도에는 고려시대 삼별초와 관련된 유적이 유난히 많다. 진도 남부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남도석성은 고려 삼별초군이 몽골군과 항쟁을 벌였던 곳 중의 하나. 삼별초 관련 유적지로 또 한 군데 들를 곳이 고군면 용장산성으로 그 안에는 건물자리가 12개 남아 있고 주변에는 길이 420m의 토성이 둘려 있다.
▲ 운림산방 옆 쌍계사 경내.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가 하면 동백은 붉은 꽃망울을 툭툭 터뜨리고 있다.
진도역사관은 지난 11월 초에 개관한 새 나들이 명소. 삼별초실, 유배문화실,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도읍에서 의신면에 위치한 운림산방으로 향하면 왕온의 묘라 전해지는 무덤을 지나게 된다. 왕온은 고려 삼별초가 몽골군과 대적할 당시 왕으로 추대했던 인물. 그는 왕무덤재에서 잡혀 죽임을 당하며 지금의 묘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운림산방 바로 곁에는 소치기념관과 진도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운림산방 왼편의 쌍계사도 들러본다. 신라 문성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절 양쪽으로 계곡물이 흐른다고 해서 쌍계사라 이름 지어졌다는 설이 전해 내려온다. 요즘 쌍계사에 가면 늦단풍과 주렁주렁 감이 달린 감나무, 그리고 핏빛 꽃망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동백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지산면 가치리에서 가학리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일몰을 감상하기에 좋은 길로, 특히 세방마을 인근에는 세방낙조전망대가 세워져 매일 저녁이면 일몰을 감상하려는 여행객들이 모여든다.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섬 사이로 하루를 마감하는 해가 떨어지고 붉은 기운이 완전히 가실 때까지 여행객들과 사진동호인들은 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진도를 떠나기 전 꼭 들를 곳 중의 하나가 진도군 북서부의 군내호이다. 이 호수는 군내지구 간척사업으로 방조제 도로(3.2㎞)가 만들어진 후 생겨난 인공호수. 지금 가면 고요히 수면 위를 유영하고 있는 백조 무리들과 일찍 찾아든 청둥오리 등 철새떼를 만날 수 있다.
진도를 여행하는 일정표를 한번 짜보자. 금요일 출발하는 2박3일 일정이라면 첫째날은 왕온의 묘→운림산방→쌍계사→진도기상대→가계해수욕장 해변→금갑해수욕장 해변→임회면 여귀산 입구 탑공원→상만리 5층석탑과 구암사 답사→남도석성→세방낙조전망대에서 일몰 감상 순으로 엮는 것을 권한다. 둘째날에는 진도 북부지역을 순례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회동마을 삐에르랑디공원 인근의 전망대에서 일출을 감상한 다음 용장산성→벽파진전첩비→진도읍내에서 점심식사→전두마을→군내호에서 백조와 철새 감상→진도대교→해남 우수영관광지 방문 등으로 순서를 짜본다.
토요일 출발해서 일요일 귀가하는 1박2일 계획일 경우 진도읍→운림산방→쌍계사→진도기상대→세방낙조전망대 일몰 감상으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삐에르랑디공원 인근 전망대에서 일출 감상→임회면 죽림리 해안도로 드라이브→남도석성→남진미술관→진도읍→군내면 군내호 방조제 드라이브 및 철새 감상→용장산성→진도대교 순으로 여행하면 좋을 듯싶다.
▲ 사진작가 김정명
사진작가 김정명(58)씨는 20년 가까이 야생화를 찍었다. 그리고 그것을 ‘김정명의 우리꽃 사진’이란 이름의 달력 겸 사진집으로 10년째 펴내고 있다. 최근 나온 ‘한국의 야생화’ 제10집이 그것이다.
삼지구엽초 봉오리, 시닥나무 새순, 변산바람꽃, 민들레…. 매주 한 번씩 꽃이 바뀌는 김정명씨의 달력은 ‘움직이는 뜰’이라고 불린다. 탁자 위에 놔두고 보고 있으면 사진에서 들꽃 향기가 맡아지고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40여년간 카메라 작업을 해온 그는 전국의 산과 오지, 먹을거리, 민속놀이 등을 사진에 담는 일을 했다. 82년에는 전라도 지역에 1년반 동안 아예 눌러살면서 ‘예향’이란 주제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찍기도 했다. 그러다가 80년대 중반부터 무릎 아래로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KBS는 94년 매일 아침 이 필름을 방영했고, 호평에 힘입어 “꽃을 알리는 책자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이듬해 첫 책자를 냈다.
▲ ‘야생화의 천국’ 백두산에 핀 바위솜나물이 색깔도 선명하다. ‘솜방망이’로도 불리는 이 꽃은 휴전선 이남에서는 4월에서 6월까지 어느 산에서든 볼 수 있다. 백두산은 6월 20일에서 9월 20일까지 등반할 수 있다. /김정명·사진작가
1집은 6000부가 팔렸다. 사람들은 전화(02-765-3520)로 주문을 해, 9000원짜리 꽃달력을 사 연하장 대신 보내곤 했다. 그 달력을 받은 사람들이 또 사서 친지들에게 연하장으로 보내면서 판매 부수가 늘었다. 9집은 3만5000부가 나갔다. 6집에서 9집까지는 한국특산식물 수생식물 멸종위기식물 약용식물 등을 집중적으로 다뤄, 김씨의 달력은 그대로 식물 도감이 되고 있다.
야생화와 교감을 나누다 보니 김씨는 시인이 다 됐다.
그가 꽃 사진에 붙여 놓은 설명은 그대로 한 줄의 시다. “이별이 두려운 것은 아마도 잊혀짐의 고통 때문이리라.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꽃말로 유명한 이 꽃은 일명 ‘아네모네’로 불린다.”(꿩의 바람꽃) “어린 아이 허리춤에 매달린 복주머니를 연상시키는 꽃이다. 넙죽 절하고 고사리 손 벌려 세뱃돈 받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금낭화)
야생화 사진을 찍기 위해 김씨는 1년에 200일을 촬영으로 보낸다. 백두산과 독도를 14번씩 올랐고, 제주도 울릉도 오대산 지리산 등 안 가본 산이 없다. 필름 값만 해도 한 달에 1000만원씩 든다. “눈 감고도 지금 어느 산 어느 자락에 가면 어떤 꽃과 열매가 있다는 것이 떠오릅니다. 그 꽃들이 부르니 가서 찍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그렇게 찍은 꽃 종류만도 1500여종, 필름 컷 수로는 30만컷을 넘는다.
10년을 계속하면서 김씨를 추종하는 팬도 많아졌다. 어떤 시인은 “당신이 찍은 야생화 사진이 마음에 환한 불빛이 됩니다”는 편지를 보냈다. “아름다운 꽃을 보노라니 백두산에서 김 선생님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짐작이 됩니다”며 차를 한 통 보내준 스님도 있었다.
김씨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의 야생화’를 찍을 생각이다. 11집은 ‘야생란’으로 잡아놓았지만, 12집부터는 어떻게 이어갈지 미리 고민 중이다. “사람들이 달력을 보면서 눈이 트여, 해마다 더 좋은 주제로 더 좋은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야생화에 관한 한 행복하다. 식물 종 수가 4500종이나 돼 독일(2500종) 등에 비해 훨씬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그를 ‘사부’라 부른다.
김씨는 “입산했을 때 관심만 갖고 주위를 살피면 시야에 가득히 피어있는 야생화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보고, 꽃 냄새를 맡고, 그리고 계곡이나 산 냄새도 의식적으로 맡아보는 노력을 한다면 우리의 산하가 더 다정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왕근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주말 매거진] 야생화 향기에 취하면 바람이 보이고 내가 보인다
입력 : 2003.11.06 10:38 00' / 수정 : 2003.11.06 11:27 10' TOP
한국은 야생화 천국이다. 이 가을, 들로 산으로 나가 야생화를 감상해 보자. 지금 볼 수 있는 야생화는 ‘산국’. 9월부터 11월 말까지 한반도 전역의 산과 들, 볕이 잘 드는 언덕이나 바위 틈에서 서리가 내릴 때까지 볼 수 있다. 꽃잎을 따서 손으로 비비면 ‘민트’향과 비슷한 청아한 향기가 난다. 산국과 함께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자.
한반도에서는 1년 내내 야생화를 즐길 수 있다. 야생화 전문가인 사진작가 김정명씨가 추천하는 ‘야생화 캘린더’(D2·3면)가 야생화 관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표적인 꽃인 복수초 노루귀 홀아비바람꽃 할미꽃 금낭화 붓꽃 패랭이꽃 왜개연 구절초 용담 산국 동백을 눈여겨 보자. 우리 주위의 어디라도 좋다. 산을 오르면서, 들판을 거닐면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언제든지 야생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야생화에 관한 한 한국은 축복받은 나라다. (김왕근기자 email@example.com)
[주말 매거진] 야생화 색·향기가 왜 더 짙을까
입력 : 2003.11.06 10:49 42' / 수정 : 2003.11.06 11:11 16'
비바람이 몰아치는 높은 산, 바닷바람이 강렬한 해안가 절벽…. 야생화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뿌리를 내린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 잘 살펴보면 저마다 악조건을 극복하며 생존할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다.
선명한 꽃 색깔과 향기는 그 지혜 중의 하나다. 바람 불고 비가 오는 외진 곳에 사는 처지라 벌과 나비를 만나기는 어렵다. 귀한 손님을 어렵게 만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야생화는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꽃의 짙은 색깔과 향기는 절박한 상황에서 종족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처절한 몸짓이다.
야생화를 실내에서 거름주며 키우면 절벽 위에서 풍기던 특유의 진한 향기가 옅어지고 꽃 색깔도 그 빛을 잃는 일이 많다. 실내에서라면 특별한 노력 없이도 종족 번식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벽 위에 핀 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것을 딸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 절벽 위의 꽃은 평지의 양지바른 곳에 있는 꽃보다 더 아름답다.
따라서 야생화를 캐서 안마당에 심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는 박남수 시인의 노래는 야생화에도 해당한다. 진짜 생명의 신비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야생화가 피어 있는 현장을 찾아가야 한다.
바위구절초에서 볼 수 있는 현상도 그 생명의 신비 중 하나다. 백두산 천지의 바위 틈에 자라는 바위구절초는 봉오리를 맺고(①) 그것이 피어나(②), 꽃받기를 할 때(③)까지는 선명한 붉은색을 띤다. 하지만 꽃받기를 하고 난 후에는 꽃잎이 흰색으로 변한다.(④) 열매를 맺기(⑤) 위해서 꽃받기를 하고 난 다음에는 굳이 꽃과 나비를 유혹해야 할 까닭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김왕근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도움말 김정명 사진작가)
[주말 매거진] 야생화 캘린더
입력 : 2003.11.06 10:42 50' / 수정 : 2003.11.06 17:24 42'
1월 복수초, TOP
2월 노루귀,
3월 홀아비바람꽃,
4월 동강할미꽃,
5월 금낭화,
6월 붓꽃,
7월 패랭이꽃,
8월 왜개연,
9월 구절초,
10월 용담,
11월 산국,
12월 동백
계룡산 '한국의 산' 100배 즐기기
입력 : 2003.09.04 11:02 08' TOP
계룡산은 충남 제일의 명산이다. 1968년 12월 3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계룡산은 대전광역시·공주시·논산시에 걸쳐 있다. 주봉인 천황봉(845.1m)을 비롯해 삼불봉·연천봉·관음봉 등 열댓 개의 봉우리와 기암괴석이 장관이다.
서쪽에 용문폭포, 동쪽에 은선폭포, 남쪽에 암용추, 숫용추 폭포를 어우르고 있다. 봄에는 동학사 진입로변의 벚꽃터널, 여름에는 동학사 계곡의 신록, 가을에는 갑사와 용문폭포 주위의 단풍, 겨울에는 삼불봉과 자연성릉의 설경이 장관을 이룬다.
▲ 산봉은 닭머리 형상이고 밑부분은 용 비늘처럼 보인다는 계룡산은 규모가 작지만 경관이 빼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은 계룡산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삼불봉으로. /계룡산 국립공원사무소 제공
계룡산이 가진 아름다움의 핵심은 암봉미(岩峰美)다. 불끈 치민 듯한 바위봉우리 혹은 손을 벨 듯 날카로운 암릉이 종횡무진 내달으며 기기묘묘한 산세를 이루었다. 이렇듯 산릉의 갈래마다 남모르게 자리를 틀 곳이 많아서인지 무속인들이 유별나게 많이 찾아든다. 태백산처럼 계룡산 기슭에도 곳곳에 당집이며 굿집이 있고, 조용히 치성을 드리는 무속인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계룡산이란 이름은 ‘산봉은 닭머리 형상이고 밑부분은 용 비늘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였다는 얘기가 있다. ‘산세가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자 나는 용이 승천하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서 무학대사가 계룡이라 명명했다’는 설도 있다.
평평하게 이어지다가 급작스레 코가 닿을 듯한 경사를 보이는가 하면, 갑자기 여러 가닥으로 능선이 나뉘며 발길을 머뭇거리게 하는 곳도 여러 군데다. 균형감과 고소공포에 대한 적응훈련이 돼 있지 않으면 두려움으로 발이 묶이고 말 곳도 있다. 주등산로에서 벗어나 산릉을 하나만 넘어서면 심산유곡의 그것 같은 음험한 분위기의 협곡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한국 산의 여러 특성이 작은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곳이 바로 계룡산이다.
그러므로 계룡산은 등산꾼들에게 하나의 교본이 된다. 지도를 보며 산릉과 계곡을 구별해내고 길을 찾아가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 보기에 계룡산만큼 적당한 산은 서울 북한산 이외에는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계룡산 경관의 백미는 ‘자연성릉’. 90년대 초 이 자연성릉 안전시설 공사가 끝나자 계룡산을 찾는 탐방객들의 수가 연간 200만명으로 크게 늘어나기도 했다.
수치상 최고봉은 천황봉이고, 등산로의 중심은 관음봉이라면, 풍수상의 계룡산 주봉은 삼불봉(三佛峰·775.1m)이라고 풍수가들은 말한다. 계룡산의 모든 기와 혈은 삼불봉에 집중되었기에 계룡산의 심장이 된다고 주장한다. 계룡산 4대 사찰을 연결한 선이 정확히 다이아몬드형을 이루고, 그 가운데 삼불봉이 위치하는 사실은 자못 신비스럽다. (안중국·월간 산 기자 email@example.com)
◆ 동학사 원점회귀 코스
계룡산의 대표적인 자연경관인 자연성릉(삼불봉~관음봉 능선)을 거치는 원점회귀 코스로 인기가 가장 높다. 동학사에서 지계곡 길을 따라 남매탑으로 올라서든지, 또는 유순한 천장골을 따라 큰배재를 거쳐 남매탑에 올라선 다음, 삼불봉~자연성릉~관음봉을 거쳐 동학사계곡으로 내려선다. 자연성곽을 이룬 자연성릉 암릉 구간은 철계단과 난간이 설치돼 있으나 눈 얼음이 덮이는 겨울철에는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약 5시간 소요.
◆ 동학사~갑사 고전루트들
동학사~남매탑~금잔디고개~갑사 코스(3시간)와 동학사계곡~관음고개~갑사 코스(3시간30분)는 관음봉~삼불봉 자연성릉 구간에 안전시설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탐방객 대부분이 이용하던 고전 루트로, 요즘도 인기를 잃지 않고 있다. 계룡산을 대표하는 사찰을 연결하고, 명소인 남매탑과 금잔디고개나 혹은 조망명소인 관음봉 전망대를 경유하는 코스로서, 산길이 워낙 뚜렷한 데다 위험한 구간이 거의 없어 노약자도 무난히 따를 수 있다.
◆ 갑사 원점회귀 코스
갑사 지구는 동학사에 비해 교통이 불편해 자가용을 이용해 접근하는 이들이 많다. 산행 방향은 대개 절승지마다 1곡(一曲)부터 9곡까지 이름이 붙어 있는 갑사계곡을 따라 금잔디고개까지 올라선 다음 자연성릉~관음봉~관음봉고개~연천봉고개까지 능선을 거쳐 원효대계곡을 따라 갑사로 내려서는 식으로 한다. 약 5시간 소요.
◆ 호젓한 분위기의 신원사계곡 길
접근 교통편이 불편하지만 호젓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코스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융 왕자에 얽힌 전설이 있는 고왕암을 거쳐 연천봉과 문필봉 사이의 연천봉고개에 올라선 다음 왼쪽 길을 따르면 등운암을 거쳐 계룡팔경 중 하나인 연천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연천봉으로 올라선다. 약 1시간30분 소요.
연천봉고개 사거리에서 고개를 넘어 원효대계곡을 따라 갑사로 내려서거나(약 1시간30분), 오른쪽 능선길을 따르면 관음봉고개(20분)로 간다. 관음봉고개에서는 동학사계곡길이나 자연성릉으로 산길을 잇는다. 준족들은 신원사에서 시작, 자연성릉~큰배재~신선봉~장군봉 능선까지 잇기도 한다(약 6시간).
신선봉~갓바위~장군봉 능선은 황적봉~천왕봉~쌀개봉 능선, 자연성릉(관음봉~삼불봉 능선)과 더불어 험난하면서도 경관이 빼어난 바위능선으로 꼽힌다. 특히 인위적인 시설물이 들어서지 않아 자연미 넘치는 산행을 맛볼 수 있다.
문화재 관람료가 포함되지 않은 공원 입장료만 낸다는 이점 때문에 박정자 삼거리 부근의 병사골 매표소에서 시작하는 이들이 많다. 매표소에서 장군봉까지는 1㎞ 남짓 되지만 줄곧 오르막길이어서 1시간 가까이 걸린다. 장군봉에서 갓바위까지는 로프를 잡고 내려서야 하는 등 제법 험난한 바윗길이 세 곳 나오지만, 노약자들을 위해 우회로가 나 있다. 갓바위 슬랩을 올라서면 이후 신선봉까지 평범한 오르막이 계속된다.
담력이나 체력이 약한 사람은 갓바위 직전 안부(장군봉 1.6㎞, 지석골 매표소 1.5㎞)에서 작은배재를 거쳐 지석골이나 천정골로 빠지도록 한다. 장군봉~신선봉 구간은 2시간 정도 걸린다. 신선봉에서 큰배재로 내려서면 천장골 코스나 큰골~상신리 코스로 하산하거나, 자연성릉길 또는 갑사 길로 이을 수 있다.
◆ 숲 분위기 뛰어난 상신리 큰골 코스
상신리 큰골은 동학사나 갑사에 비해 한결 호젓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골짜기다. 등산로 대부분 자연스런 흙길로 이어지고 숲의 모양새도 원시림에 가까워 아늑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교통이 불편해 자가용을 이용한 원점회귀 산행객이 많다. 상신리 매표소~큰골~삼거리~금잔디고개~삼불봉~남매탑~큰배재~큰골~상신리 매표소 원점회귀 산행은 3시간 정도 걸린다.
※쌀개봉~천왕봉~황적봉 능선 남쪽과, 정상인 천황봉 남릉 동쪽 일원은 군사보호구역으로 산행이 금지돼 있다. (한필석·월간산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
계룡산 인근 맛집 TOP
계룡산을 찾으면 인근 맛집을 들러보자. 갑사 입구에는 산촌다운 순박한 맛을 즐길 수 있는 몇 곳의 식당들이 모여 있고 동학사 가는 길가에는 여느 대도시 주위의 산자락들과 별 다름없는 먹을거리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 수정식당 (041-857-5164)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 입구 집단 식당가에 있는 공주시 지정 향토 음식점. 계룡산 전체를 통해서도 외지에 가장 많이 알려진 식당. 크고 작은 각종 모임이 열리고 음악회 등 문화행사도 수시로 열린다. 산채비빔밥 6000원(단체 5000원), 아침해장국 6000원, 버섯덮밥 8000원. 이 식당의 대표 음식이자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더덕구이가 1만5000원이다. 넓은 식당의 벽면 전체가 이 집을 찾았던 손님들의 서화(書畵)작품 액자로 도배돼 있다. 이 작품들은 수시로 교체돼 1년 내내 작품전이 열리는 셈이다. 전국 각지의 명산자락에 있는 음식점 주인들이 결성한 산촌미락회의 김태순 회장이 업주다. 조용하고 편안한 숙박업소인 녹수장(041-857-6312)을 함께 운영한다.
◆ 새이학가든 (041-855-7080)
백제의 고도 공주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업소. 금강철교 옆 미나리꽝 금강변에 위치, 공산성과 무릉왕릉과는 지척 거리다. 한우 석갈비 1인분 1만3000원, 돼지갈비 1인분 6000원, 냉면 5000원.
◆ 등산로식당 (041-857-0064)
수정봉과 삼불봉 사이의 안부 금잔디고개에서 설희의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매표소 앞집. 상신계곡과 나란히 달리는 아스팔트 외길이 이 식당을 찾는 승용차로 늘 붐빈다. 하산길 농주(5000원) 한 잔과 두부 한 쟁반(5000원)에 기분좋게 취한다. 순두부·도토리묵 각 5000원, 닭고기 2만원, 오리고기 3만원.
◆ 청주식당 (042-825-2879)
동학사 쪽 식당가에서 단골손님이 가장 많다는 집 중 하나. 파전 버섯전 도토리빈대떡 녹두빈대떡 김치전 장떡의 6가지 전이 한 쟁반에 담기는 모듬전(1만5000원)이 인기. 장떡은 고추장과 된장으로 구워내는 옛날 어머니들의 손맛이 담긴 전통 음식이다. 음식 궁합으로는 모듬전에 더덕 동동주(7000원)가 잘 맞는다. 된장찌개가 따라 나오는 비빔밥이 5000원.
◆ 머쉬룸(042-825-1376)
간단한 식사와 차를 마실 수 있는 대형 전원 카페. 조경이 잘 되어 있고 새벽 2시까지 영업을 한다. 동학사 버스 종점 위쪽에 있다. http//www.ilovemushroom.co.kr
◆ 아구타운 (042-633-7750)
대전고속버스터미널 인접 조선일보 사옥 건너편에 있는 아구요리 전문점. 이 식당 지하는 아구 냉동창고로 되어 있다. 미국에서 수입된 가장 싱싱한 아구요리를 먹을 수 있는 집으로 정평이 나 있고 식당 안은 늘 손님들로 만원사례다. 대전 서구 둔산동 시청 가까운 곳에 있는 둔산 2호점(042-471-7750)도 같은 집이다. 아구찜 소 2만원, 중 2만6000원, 대 3만2000원. (박재곤·산악인 ‘산따라 맛따라’ 저자 email@example.com)
관악산(冠岳山·631m)과 삼성산(三聖山·455m)은 서울 남측 방벽을 이루고 있는 산들이다. 남태령을 통해 동서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천연의 장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바위 투성이의 산인 관악산은 산세가 미더워 조선 태조에 의해 북한산, 용마산, 덕양산과 더불어 외사산(外四山)으로 꼽혔다.
▲ 관악산 연주대의 위용.
또 개성 송악산, 가평 화악산, 파주 감악산, 포천 운악산과 함께 경기오악(京畿五岳)의 하나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 의상, 윤필 세 대사가 도를 깨닫고 성불했다는 삼성산도 관악산과 더불어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관악산 방면
관악산 횡단 루트
서울대 정문 옆 만남의 광장에서 제4야영장을 거쳐 연주대에 올라선 다음 과천향교로 내려서는 코스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약 3시간30분)
서울대 원점회귀 코스
만남의 광장에서 관악산과 삼성산 분기점인 무너미고개를 넘어 서울대학교실습림으로 내려서는 사이 왼쪽으로 산길이 여러 가닥 나온다. 그 중 한 가닥을 잡아 연주대로 오른 다음 신공학관 길이나 깔닥고개~제4야영장 길을 따라 하산한다. 관악산 매니아들이 최고의 암릉길로 꼽는 팔봉능선은 하산로로 잡는 게 수월하다. (약 3~5시간)
과천 출발 원점회귀 코스
과천향교 매표소를 지나 나뉘는 계곡길과 능선길을 잇는 원점회귀 산행이 주로 이루어진다(약 3시간). 일명사지~426m봉~정상~남릉~육봉능선을 잇는 공업진흥청 원점회귀 산행은 한갓지면서도 암릉산행의 즐거움이 더해지는 코스다(약 4시간30분).
남북 능선 종주 코스
사당전철역 부근 남현동 관음사에서 출발, 북릉~559m봉~연주대~남릉~불성사를 거쳐 안양시 관양동에서 끝맺는 종주 코스는 일망무제의 조망과 스릴 넘치는 바윗길을 즐기면서 관악산 유일의 삼림욕장으로 내려서는 장쾌한 코스다(약 5시간30분). 안양종합운동장을 종료지점으로 삼기도 한다(약 6시간30분).
신공학관 기점 최단등로
서울대학교 신공학관~자운암~왕관봉 암릉 길은 연주대 최단 등로로서, 줄곧 암봉으로 이어져 스릴 넘치고, 서해바다 조망까지 더해지는 멋진 코스다. (1시간 40분).
▲ 관악산 주요 등반 코스 관악산 '해부도' 보기(PDF / 1.5MB)
◆ 삼성산 방면
서울대 원점회귀 코스
만남의 광장에서 무너미고개로 향하는 사이 오른쪽으로 장군봉이나 삼막사로 오르는 산길이 여러 가닥 나온다. 그 중 철망 사이 문으로 접어드는 첫번째 갈림목에서 장군봉(412m)~국기봉(446m)을 거쳐 삼막사에 올라서는 코스가 대표적인 등로다. 하산로는 무너미고개~제4야영장 길을 비롯, 다양하게 잡을 수 있다. (약 2시간)
호암터널 산복도로변 코스들
호압사나 제1호암터널 북측 입구에서 출발, 장군봉을 거쳐 신우초등학교 하산(약 1시간30분)하거나, 장군봉 북릉을 따라 만남의 광장으로 내려선다(약 2시간).
관악산·삼성산 연결 종주 코스
관음사나 낙성대 위쪽 인헌아파트에서 북릉을 타고 연주대로 올라선 다음 정상 서릉이나 팔봉능선을 거쳐 무너미고개로 접어든다. 이후 삼막사를 거쳐 안양사나 국기봉~만남의 광장 또는 장군봉~호압사(또는 신우초교)로 내려선다. (6시간 이상)
◆ 전철 이용 접근 방법
서울대 입구 : 전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이나 신림역(3번 출구) 버스정류장에서 서울대행 버스 이용. 신공학관은 52번(신림역), 413-1번(서울대입구역) 이용. 낙성대역 4번 출구 뒤편에서 3번 마을버스를 타도 신공학관까지 올라간다.
남현동 관음사 기점 : 전철 2·4호선 사당역(5번 출구)에서 과천 방향 아형 언덕에서 마을길을 따르면 관음사 입구 매표소(약 600m)가 나온다. 매표소나 매표소 위쪽 배드민턴장에서 능선으로 접어들 수 있다.
과천향교 기점 : 전철 4호선 과천역(7번 출구)이나 정부과천청사역(11번 출구)에서 도보로 접근한다. 10~15분 거리.
공업진흥청 기점 : 정부과천청사역(11번 출구)에서 도보로 약 20분 거리. 공업진흥청 담을 끼고 오른쪽 백운정사길로 접어든다.
안양 관양동 기점 : 전철 4호선 인덕원역(7번 출구) 건너편 정류장에서 안양공설운동장 방향이나 국철 1호선 안양역에서 인덕원사거리 방향 버스를 타고 관악중학교 앞에서 하차. 관악중학교 뒤편 아파트단지를 빠져나가면 관악산 산림욕장이다.
안양유원지 기점 : 국철 1호선 관악역에서 경수산업도로를 건너 걸어서 안양유원지로 접어든다. 안양사 기점인 공영주차장까지 1.3㎞, 서울대학실습림 입구까지 2.7㎞. 소공원을 거쳐 무너미고개로 가려면 실습림 직전 화장실 뒤편 길을 따른다.
삼막골 기점 : 국철 1호선 관악역에서 경수산업도로를 건너 삼막골로 접어든다. 차량통제소까지 2.7㎞, 통제소~삼막사 진입로 종료지점 3㎞. 전철 2호선 신림역에서 호압사 방향 25-1번, 289-1번 버스를 타면 삼막사 입구 도로에서 내려준다.
석수역 기점 : 전철 1호선 석수역 동쪽 출구에서 시흥대로를 건너 마을길에 접어들면 남서울약수 능선길로 이어진다.
호압사~신우초교 기점 : 전철 2호선 신림역에서 호압사행 25번, 25-1번, 289-1번 시내버스 이용. 국철 1호선 독산역·시흥역에서 1번 마을버스를 타면 호압사 입구 맞은편 벽산아파트단지까지 간다. (한필석·월간산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관악산 주변 맛집 입력 : 2003.08.21 11:03 12' / 수정 : 2003.08.22 11:54 22' TOP
관악산은 주변 어느 곳이나 도시형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산자락에는 오히려 음식점 찾기가 어렵다.
◆ 서울대 코스
관악산회관(02-873-0943) 관악산휴게소 2층에 위치. 100평 규모 200명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시원한 공간의 식당. 단체모임에 적격이고 주차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해장국 4000원. 보리밥 5000원. 관악산갈비 1만1000원.
◆ 사당(남현동 관음사) 코스
암사동뼈다귀감자탕(02-582-6479) 전철 4호선 개통 이전부터 영업해 온 집. 뼈다귀감자탕 1만5000~2만5000원.
한다라닭갈비(02-588-5948) 닭갈비(7000원×2인) 전문점. 된장찌개 3500원. 닭곰탕 동태찌개 김치찌개는 각 4000원.
찬스병천순대(02-525-7511) 순대국 4500원. 모듬순대 1만3000원.
이상 3개 업소는 사당역 5번 출구 바로 옆쪽에 나란히 있다. 24시간 영업.
예송우동(02-584-9068)·짱구짱구(02-586-7141) 사당역에서 수원방향의 버스 정류장에 있는 김밥과 만두 전문점. 산행길 김밥을 예약해 놓고 찾아갈 수 있다. 24시간 영업.
◆ 안양유원지 코스
봉암식당(031-471-7428) 1968년에 문을 연 대형 식당. 계곡 물가에 식탁이 펼쳐져 있다. 100명 수용 연회장과 노래방시설. 닭백숙과 닭도리탕(각 3만2000원) 전문. 승합차로 전철역과 버스까지 교통 편의 제공.
금수식당(031-473-2227) 안주인 고순이씨가 별나게 친절하다고 소문 나 있는 집.
데이지아(DAISYA·031-473-2505)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길가의 카페. 차와 간단한 식사 가능. 매표소에서 산쪽으로 300m 지점에 위치.
◆ 과천 코스
향교집(02-502-7584) 과천향교 옆에 있는 다섯 업소 중 산을 오르다 첫 번째로 만나는 식당. 순두부(4000원) 묵(6000원) 파전(7000원)에 하산길 막걸리(3000원) 한 잔으로 목을 축이는 곳. 과천 시내 직장인들의 점심집으로도 인기. 20년 전에 문을 열었고 60명까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규모다. 집주인은 이곳에서 3대째 살아온 토박이고 부인은 맛의 고장인 남도출신이다.
과천하이트광장(02-504-6802) 전철4호선 정부과천청사역 11번 출구, 고려빌딩 지하에 있는 대형 업소. 낮시간 식사에 야간 맥주집 형태로 운영. 참나무장작닭구이(1만1000원)가 특기이고 해물돌솥밥(5000원)은 주변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식단. 세계 각국의 60여종 유명 맥주를 얼음에 담가 두어 맥주매니아들이 즐겨 찾는다. 하산길 해단식 장소로 편리. (박재곤·산악인 ‘산따라 맛따라’ 저자)
오르면 오를수록 오묘하고 넉넉한 산 입력:2003.08.07 10:16 43'
▲ 지리산은 깊은 계곡을 즐기기엔 국내 최고의 명산이다. 지리산 대성골 계곡을 오르고 있는 세 남자. 이들은 마치 신선이 된 듯, 일상의 스트레스는 이미 잊어버린 것 같다. 지리산은 골짜기들이 하도 깊어 ‘파르티잔이 활동할 수 있는 남한 유일의 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광형 전 출판사진부 기자 지리산 '해부도'(PDF) 보기(2.76MB)
지리산(智異山·1915m)은 넓다. 규모로 등산객을 압도한다.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지리산의 넓이는 440.5㎢. 한국의 16개 육상 국립공원 가운데 가장 넓다. 단순 비교를 해본다면 북한산의 5.5배이며 설악산보다는 70㎢가 더 넓다. 전북 남원시, 경남 산청군과 하동군, 함양군, 전남 구례군 등 3도 5개 시·군에 걸쳐 그 산자락을 펼치고 있다.
광대함은 직접 지리산 영마루 중 한 군데를 올라보아야 제대로 실감할 수 있다. 어느 한 봉에 오르면 저쪽으로 전혀 독립된 산인 듯 지리산의 또 다른 산봉(山峰)이 푸른 하늘을 떠받들고 있고, 어느샌가 저편으로 몽롱한 이내를 허리춤에 두른 지리산의 또다른 거대한 능선이 장벽으로 일어서기도 한다. 장벽으로서 이 지리산릉은 사방, 특히 동서간 사뭇 다른 양상의 문화가 피어나게 했다.
지리산은 또한 깊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봉만도 30여 개가 여기저기 늘어서서, 그 사이마다 길고 깊은 골을 이뤄 놓았다. 뱀사골, 피아골, 칠선골 등 지리산의 계곡들은 걸어 오르노라면 끝이 없는 것 같다. 지리산에서는 얕고 짧다고 하여 이름조차 없이 푸대접받는 지류들도 맞대놓고 비교해 보면 여느 산의 가장 큰 계곡들보다도 더 길고 깊다.
산이 가진 넓이와 깊이를 아울러 ‘품’이라는 단어로 표현해 본다면 지리산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그 품의 넉넉함이다. 평수로 따져 1억3000만 평, 둘레가 800리인 지리산에는 1300여 종의 식물과 180여 종의 동물(곤충류 제외)이 살고 있다. 품어안은 사암(寺庵)도 화엄사, 연곡사, 천은사, 쌍계사, 칠불사, 대원사, 법계사, 실상사 등 대찰만 10여 개를 헤아린다. 규모와 짜임새, 가진 문화재의 품격 모두에서 두루 감탄스러운 명찰을 이렇듯 여럿 가지고 있는 산은 이 땅에 지리산뿐이다.
지리산 중에는 또한 수많은 은자(隱者)들이 숨어 살고 있다. 지리산 남녘의 유불선 합일 갱정유도 신자들의 마을인 청학동, 수만 개의 돌탑 쌓기를 하나의 선(禪) 수행으로 삼으며 언젠가는 이화(理化)세계가 도래할 것을 꿈꾸는 한풀선사의 삼성궁(三聖宮) 등. 지리산 중에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수많은 구도자들이 골짜기마다 나름의 수행처를 두고 해탈을 구하고 있다. ‘파르티잔, 혹은 유격대란 말에 걸맞는 활동이 가능한 지역은 남한에서 지리산뿐’이란 말도 지리산이 가진 품이 어떠한가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등산객들에게도 물론 지리산은 넓고 깊다. 수백 번 올라도 잘 모르는 산이 지리산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오르면 오를수록 오묘하여, 종내는 침묵으로 오르게 하는 산이 지리산이다.
멀리 남해안까지 내려가도, 북동으로 두어 시간 달린 끝의 함양땅에서도 지리산은 하늘의 절반쯤을 가린 듯한 육중함을 잃지 않는다. 지리산 자락에서 살던 사람들은 지리산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먼 곳에 가 살더라도 자기는 지리산 사람이라고 얘기한다. 지리산의 품은 이렇듯 어머니처럼 넓고 넉넉하다. 가진 품이 이렇듯 넓어서, 지리산은 이윽고 우리에게 ‘영원(永遠)’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산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안중국 월간 산 기자)
지리산 등반 코스 7選 TOP
◆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일출맞이
가장 인기 높은 코스는 백무동 기점과 중산리 기점의 천왕봉 등로로, 두 코스를 이어 남북 횡단을 하거나 원점회귀식 산행을 한다. 남북 횡단의 경우 백무동~장터목~천왕봉~법계사~칼바위~중산리 코스, 또는 그 역 코스가 가장 짧고 인기 높다(8시간 소요).
중산리 기점의 원점회귀 산행은 법계사 코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힘든 법천폭포 계곡길로 장터목에 올라(편도 4시간) 대피소에서 하룻밤 머문 뒤 이튿날 천왕일출을 감상하고 하산하는 게 정석이다. 천왕봉만을 목표로 삼았을 경우는 칼바위~법계사~천왕봉이 최단 등로로 애용된다(편도 4시간).
백무동 원점회귀 산행은 계곡 풍광이 수려한 한신계곡을 따라 세석대피소까지 오른 다음 연하봉~장터목~천왕봉~장터목~하동바위~백무동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따른다. 산행시간만 12시간 정도 잡아야 하는 긴 코스로, 장터목대피소에서 하룻밤 머문 뒤 둘쨋날 천왕일출을 감상한 다음 하산하면 여유로운 산행이 될 것이다. 한신계곡 지계곡인 가내소폭포~내림폭포~장터목 구간은 반달가슴곰 보호를 위해 입산이 금지돼 있다.
◆ 피서 산행지로 인기높은 뱀사골
반야봉(1,732m)과 명선봉(1,586.3m) 사이로 뻗어내리는 뱀사골은 지리산 내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피서산행지로 인기 높은 골짜기다. 요룡소, 뱀소, 병소, 병풍소, 간장소 등 비경이 연이어질 뿐더러 나무가 우거지고 수량이 넉넉해 언제 찾아도 경관이 뛰어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뱀사골대피소에 이르기까지 줄곧 완경사로 이어져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뱀사골은 계곡의 오염을 막기 위해 98년 7월1일부터 계곡휴식년제 구간으로 지정, 계류가로 접근할 수는 없지만 등산로는 개방돼 있다.
골 상단의 뱀사골 대피소까지 5시간 정도 걸리는 이 코스는 주능선상의 화개재로 오른 다음 서쪽 노고단~성삼재로 이어 당일 산행으로 마치거나, 동쪽 주능선을 따라 연하천~벽소령~세석을 거쳐 천왕봉까지 뽑기도 한다. 계곡으로만 잇는 산행을 원하면 화개재에서 노고단 쪽으로 향하다가 임걸령 삼거리에서 남쪽 피아골로 내려선다. 뱀사골~임걸령~피아골 산행도 건각일 경우 당일에 가능하다. 피아골은 특히 가을 단풍으로 이름나 있다.
◆ 절경의 폭포, 소와 담의 연속 피아골
지리십경 중 하나로 꼽히는 ‘직전단풍(稷田丹楓)’은 바로 피아골 입구 직전 부락 일대의 단풍 절경을 일컫는다. 피아골은 이러한 단풍 절경 때문에 단풍 산행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잠룡소, 삼홍소, 통일소, 연주담, 남매폭 등 자연미 뛰어난 소와 담, 폭포가 골을 따라 연이어져 여름 계곡 산행지로도 인기 높다. 계곡풍광이 수려한 피아골대피소까지는 2시간, 대피소에서 임걸령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
◆ 시원한 암릉길도 안은 대원사 코스
천왕봉 동단의 코스인 대원사 기점 산행은 비교적 호젓한 멋이 있다. 등산로 중간에 지리산에서 불일폭포 다음으로 큰 무재치기폭포를 볼 수 있고, 지리산 유일의 암릉길인 써리봉 암릉을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코스다. 등로보다는 종주산행을 마치고 하산로로 이용하는 코스다.
대원사 코스는 유평 마을~무재치기폭포~치밭목대피소(4시간), 윗새재 마을~무재치기폭포~치밭목대피소(3시간) 2개 코스로 나뉜다. 각 기점을 출발, 치밭목을 거쳐 천왕봉(3시간)을 향해 산행하거나 써리봉을 최종 목표로 2개 코스를 잇는 산행을 시도한다.
◆ 호젓하고도 장쾌한 남부능선
주능선상의 세석평전에서 삼신봉(1,284m)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길은 지리산 마니아들이 특히 좋아하는 한갓진 능선 코스다. 산행기점은 삼신봉 남서쪽과 남쪽 골짜기에 자리잡은 쌍계사, 그리고 도인촌 청학동이다.
쌍계사~불일폭포~상불재~내삼신봉(1,355m)~삼신봉(외삼신봉) 구간은 5시간, 청학동~삼신봉은 1시간40분 정도 걸린다. 삼신봉에서 한벗샘과 음양수를 거쳐 세석평전까지는 4시간 소요. 따라서 쌍계사에서 출발할 경우, 아침 일찍 출발해야 숙박이 가능한 세석대피소까지 갈 수 있다. 세석피소에서는 역시 천왕봉을 잇는 산행이 주로 이루어진다.
쌍계사계곡 맨 위쪽 마을인 의신에서 대성골을 경유해 빠른 시간에 음양수를 거쳐 세석평전까지 오를 수 있다(5시간 소요).
쌍계사는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와 부도(보물 제380호), 적묵당(보물 제458호), 대웅전(보물 제500호) 등의 문화재가 많은 신라고찰이고, 능선 너머의 청학동은 도인촌과 삼성궁으로 이름나 있다. 이 두 명소를 잇는 삼신봉 산행은 비교적 짧고 길도 편하다.
◆ 종주파들이 최고로 꼽는 주능선 종주길
노고단~천왕봉간 25.5km의 주능선은 종주 산행의 전범(典範)으로 등산꾼들 사이에 정평이 나 있다. 지리산 전체를 조망하며 산행할 수 있어 인기가 높은데, 예전에는 화엄사를 기점으로 잡았지만, 성삼재 도로가 생긴 뒤로는 대부분 차량으로 성삼재까지 오른 다음 산행에 나선다.
대개 노고단~세석, 세석~천왕봉~중산리(또는 백무동) 2개 구간으로 나누어 1박2일로 시도하는데, 천왕봉 일출을 목표로 한다면 첫날 장터목대피소에서 머무는 게 유리하다. 보행 능력에 따라 2박3일이나 3박4일로 일정을 잡아도 좋다. 중간에 노고단, 연하천, 벽소령, 세석, 장터목 등에 대피소가 있다. 천왕봉에서 하산은 중산리(3시간30분 소요), 백무동(3시간) 또는 중봉~써리봉~치밭목대피소를 거쳐 대원사(5시간30분)로 한다.
91년부터 자연휴식년제로 지정해 복원사업을 펼쳐온 노고단 탐방은 5~10월에 한해 1일 4회(10:00, 13:00, 14:30, 16:00), 매회 100명씩 허용한다.
삼도봉 직전 노루목에서 왼쪽 길을 따르면 지리10경 중 하나인 반야낙조로 이름 높은 반야봉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할 수 있고, 5월 초에는 철쭉꽃으로도 이름난 봉이다.
◆ 관리사무소가 안내하는 생태탐방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호랑이가 살았다는 맹세이골(대원사계곡) △깊은 산골 중산리에서는 △뱀사골? 구룡 자연해설 프로그램 △화엄사 생태탐방 △지리산 천왕봉 탐방 △반달곰과 함께 떠나는 아고산대 자연생태계 탐방 △지리산 왕등재 고산습지 탐방 △뱀사골 고산지 생태탐방 △지리산 와운골 생태탐방 등, 당일 또는 1박2일로 환경해설 생태탐방 코스를 실행하고 있다. 각 기점별 입장료와 문화재 관람료만 받고 전문가가 안내한다. 문의 전화 055-972-7771∼2.
※ 지리산 국립공원은 공원 입장료 1인당(어른 기준) 1,300원씩 받는다. 이밖에 기점에 따라 문화재 관람료가 추가된다. 화엄사(1,700원), 천은사(1,300원), 연곡사(1,300원), 쌍계사(1,500원).
지리산 각 산행기점에는 거의 다 주차장이 갖춰 있다. 주차료는 성삼재 주차장에 한해 최초 1시간 1,000원, 1시간 이후 10분당 200원씩 추가, 당일 한도액 10,000원씩 받고. 다른 지역은 당일 4,000원씩 받는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3개 도에 걸쳐 있는 지리산 국립공원은 도별로 관리되고 있다. 따라서 산행 문의는 지역별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산리·백무동·쌍계사·대원사 기점은 동부본소 전화 055-972-7771, 화엄사·천은사·성삼재·피아골 기점은 남부지소 전화 061-783-9100, 뱀사골·구룡·내령매표소 기점은 북부지소 전화 063-625-8911. 또한 기상특보시 출입을 통제하니, 출발 전 반드시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의 지리산 항목에 들어가 확인토록 한다. www.npa.or.kr/chiri.
지리산 자락 맛집 TOP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산인 만큼 산자락이 넓고 먹거리집들도 수없이 많다. 산채음식이나 닭고기 요리는 기본이고 온갖 음식들을 다 골라 먹을 수 있다.
◆ 산청
지리산덕산관광휴양지(055-9726269)
거목산장(055-973-9415)
산꾼의 집(055-972-1212)
웅석관광농원(055-973-8565)
◆ 함양
느티나무집(055-962-5345)
지리산칠선휴게소(055-962-5494)
두레박흙집(055-962-5507)
예원(055-963-5444)
◆ 하동
산골제다(055-883-2511)
석문식당(055-883-1723)
강변회식당(055-558-7344)
동이주막(055-883-3934)
불지산장(055-882-7071)
동흥횟집(055-883-8333)
◆ 구례
백화회관(061-782-4033)
백제회관(061-783-2867)
산아래첫집(061-782-7460)
심원계곡산장(061-782-1101)
심원산장(061-782-9110)
◆ 남원
달궁식당(063626-3473)
뱀사골남원식당(063-626-5770)
지리산산채식당(063-625-9670)
새집(063-625-2443)
지리산 안내 가이드 입력 : 2003.08.07 10:31 37' TOP
◆지역별 관리소 및 매표소 전화번호
▽동부본소(지역번호055)
▽남부지소(지역번호061)
▽북부지소(지역번호063)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통제지역
▽노고단~쑥발재~치발목(102.17㎦)야생 동물 보호
◆휴식년제 구간(구역)
▽세석평전 철쭉 군락지(30.000㎡)'03~'05
◆교통
◆지리산 내 대피소
▲ 청계산 주요 등반 코스 입력 : 2003.07.24 14:11 23'
청계산(淸溪山·618m)은 서울 서초구와 성남시 수정구, 의왕시, 과천시에 둘러싸인 수도권 남부의 명산이다. 예로부터 과천을 중심으로 서쪽 관악산(冠岳山·631m)이 백호산이라 불린 반면, 청계산은 청룡산이라 불렸다.
사방으로 굵고 기운찬 산줄기가 뻗어 있고 그 사이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청계산은 목은 이색(李穡·1328~96) 등 절개 곧은 이들의 은둔처로도 이용됐다. 정상 봉우리인 망경대(望景臺)와 매봉(583m), 이수봉(貳壽峰·545m), 국사봉(國思峰·540m) 등 암팡진 봉우리들을 여럿 가진 청계산은 80년대 이후 수도권이 확대되면서 주변 주민들에게 ‘허파’ 역할을 해주고 있다.
▲ 정상 망경대 등정 코스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청계산 역시 정상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가장 인기 높다. 그중 전철 2호선 강남역과 3호선 양재역을 경유하는 노선버스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원지동 원터골(原基)과 옛골 기점 코스에 등산인이 가장 많이 몰린다.
원터골 코스는 원터골 계곡길이나 진달래능선을 타고 매봉을 거쳐 정상인 망경대에 올랐다 다시 원터고개~원터골 길로 내려서는 코스가 가장 인기 있다. 매봉이나 옥녀봉까지 가벼운 산행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옛골 기점에는 부드러운 코스들이 여러 가닥 나 있다. 정토사~옻샘~492.7m봉~망경대, 정토사~옻샘~약초샘골~망경대, 정토사~어둔골~목배등~이수봉~망경대가 대표적인 코스로, 이슬샘~이수봉~망경대~혈읍재~약초샘골 방향으로 진행하는 게 경사가 완만하다(약 3시간 소요).
▲ 호젓한 매봉 능선 길
과천시 문원동이나 서울대공원에서 출발, 매봉(368m)을 거쳐 절고개로 이어지는 코스는 숲 분위기 뛰어난, 호젓한 능선 길이다. 절고개에서 망바위와 이수봉 삼거리를 거쳐 망경대로 이어지는 코스를 왕복하거나 절고개에서 청계사로 하산하는 식으로 산행한다(약 2시간 소요).
내친 김에 옛골이나 원터골로 내려서면 청계산의 다양한 산세를 더욱 알차게 둘러볼 수 있다(약 3시간 반 소요).
계속 호젓한 능선 산행을 원하는 이들은 이수봉 삼거리에서 이수봉~국망봉을 거쳐 청계사나 의왕시 원터 마을로 내려서기도 한다. 국사봉에서 원터로 하산하려면 하수고개 갈림목과 철탑을 지난 다음 능선 왼쪽으로 빠지는 ‘성지 가는 길’을 따라야 한다(약 4시간 소요).
▲ 청계사 코스
청계사에서 급사면 길을 따라 과천 매봉 능선상의 절고개로 올라 망경대로 향하거나 과천 매봉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대표적이다. 이수봉과 국사봉을 거쳐 능선 갈림목에서 청계사 아래 녹향원으로 이어지는 원점회귀 산행도 인기 높다.
청계동계곡은 청계산 일원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는다. 어른 500원, 어린이 300원으로 주차비는 무료다. 청계사에 50대 수용 공간의 주차장이 있으나, 휴일이나 피서철에는 교행이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차를 꼭 가지고 간다면 녹향원 아래 주차장에 세워두는 것이 바람직하다(약 2시간 반 소요).
▲ 금토동 코스
성남시민들이 즐겨 찾는 호젓한 코스다. 산행 기점인 두레이골에서 이수봉 동릉과 국사봉 동릉을 거쳐 산행한다. 두 능선 모두 숲 분위기가 뛰어나고 비교적 사람이 덜 몰린다. 국사봉이나 이수봉 왕복 코스나, 두레이골~국사봉 동릉~국사봉~이수봉~목배등(이수봉 동릉)~두레이골 원점회귀 산행이 주로 이루어진다(약 1시간40분~2시간 소요).
▲ 종주코스
청계산 종주코스는 북단의 양곡도매시장 남쪽 들머리에서 시작, 옥녀봉~매봉~망경대~절고개~과천 매봉을 거쳐 대공원(또는 문원동)으로 하산하거나, 망경대에서 이수봉~국사봉을 거쳐 의왕시 원터나 청계동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말한다. 6시간 소요.
국사봉에서 원터로 하산하려면 하수고개 갈림목에 이어 철탑을 지난 다음 ‘성지 가는 길’ 표시가 돼 있는 갈림목에서 왼쪽 길을 따른다(6시간 소요). 준족들은 국사봉 서릉을 따르다 하오고개(학현, 청계터널 위)에서 수원 광덕산까지 잇기도 한다. 약 10시간 소요.
양곡도매시장 남쪽 아스팔트 포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직진, 양재물류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면 능선을 따라 옥녀봉으로 이어진다. 양곡도매시장 삼거리에서 우회전, 700m쯤 더 들어가 전원주택 직전 계곡길을 따르면 밤나무골 약수터를 거쳐 능선길과 만난 다음 옥녀봉으로 올라선다.(한필석·월간산 기자 email@example.com)
청계산 100배 즐기기 / '별미 명소' 즐비 TOP
청계산 자락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여러 음식점들이 들어서 등산인들의 요깃거리를 제공한다. 이 음식점들은 산행과 관계없는 도시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 원터골 코스
토성가든(02-578-0808) 서초구 원지동 원터, 청계산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오른쪽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집. 청계산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들른다는 음식점이다. 가마솥 선지 해장국(5000원)이 인기 품목. 정월 초하룻날에는 손님 2000명에게 이 해장국을 대접하고, 손님들은 불우이웃돕기 성금 3000원씩을 성금함에 넣는다.
토종흑돼지구이(500g·2만원)도 인기다. 집주인 권태균씨는 고기를 구울 때 연기와 냄새가 나지 않는 구이 기구 ‘안타네로스타’를 개발, 특허를 취득했고 신지식인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지난해 월드컵 때는 한일공동응원단(K.J. Club)의 회장을 맡아 응원과 함께 봉사활동을 폈다.
소담채(02-574-0764) 원터 먹거리마을 가운데 지점에 위치. 옛날보리밥(5000원)과 쌈밥(8000원)이 대표 음식. 옥호는 음식을 ‘소담’스럽게 차려내는 집이라는 뜻. 보리밥 식탁에는 봄동·원추리·유채·취나물·고사리·표고버섯·비름나물·돌미나리·고구마줄기, 된장에 무친 얼갈이배추 등 열 가지나 되는 나물들이 계절따라 다르게 올라 온다. 석쇠구이쌈밥에는 고추장 양념에 24시간 잰 생삼겹살을 숯불에 두 차례 구워낸다. 기름기가 쪽 빠진 담백한 맛이다. 주말이나 휴일보다 주중에 여성 손님들이 유난히 많다.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를 관통해서 이곳까지 닿는 마을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시설이 말끔하고 분위기가 깔끔하다.
당진콩 순두부(02-576-6315) 40여개 업소 중 가장 위쪽, 약수터 입구에 있다. 순두부백반·손두부·두부김치·콩비지찌개·생두부·두부전골 등 값싼 음식들을 먹을 수 있다.
▲ 옛골 코스
이수봉산장(031-723-7544) 성남시 수정구 상저동, 청계산 나들목에 있다. 낡고 허름한 집인데도 손님들이 많이 찾아, 주말 오후는 전쟁터 같다. 두부 한 모, 순두부김치 각 8000원. 콩국수 5000원. 막걸리 한 병, 생맥주 500cc 각 2000원. 이 집의 김태관 대표는 낡은 시설로 손님들을 모시는 것이 안쓰럽다고 하지만 손님들은 흙 묻은 등산화로 부담없이 땅바닥 식탁, 간이의자에 앉는 것이 편안하다고 한다.
▲ 의왕 청계사 코스
등나무집(031-426-2494) 의왕시 청계동, 청계사 코스에 있는 꿩고기 전문점. 꿩고기 칼국수와 꿩고기 만두국 각 5000원. 꿩샤브샤브 4만5000~5만원. 새로 지은 건물이 깨끗하다. 목장을 하던 집주인 박종인씨가 25년 전에 황소 한 마리와 바꾸어서 심었다는 등나무가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시원한 분위기의 별미집이다. 대중교통 편이 불편한 곳이라 차편을 항시 대기시켜 놓고 인덕원 전철역까지 교통편의를 제공해 준다.
사랑채(031-423-9600) 청계산 매표소 건너편에 새로 문을 연 보리밥집. 젊은 여인이 새로운 감각과 당찬 의욕을 갖고 시작한 집. 보리밥 5000원. 버섯전골 2만~3만원.
▲ 서울랜드 코스
장미의 언덕(02-504-5311) 청계산 산행에서 얻는 큰 덤 하나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들러보는 것이다. 미술관 옆 서울랜드에 있는 이 집은 갈비가 유명하다. 찾아 가는 언덕길 굽이굽이가 환상적이다. 계절따라 주변 색깔이 바뀌고 장미꽃 향기가 온몸으로 다가와 객을 반긴다. 조리사 전창희씨는 48년 경력을 자랑한다. 주중 점심시간(11:30~14:30)에 차려내는 점심특선 ‘런치 샤브 샤르르’(1만3000원)가 이 집의 특기. 오늘의 죽, 기본찬, 버섯과 야채, 등심, 일품요리, 국수사리, 후식의 순으로 음식이 나온다. 갈비탕, 냉면은 각 6000원. 여러 종류의 차편을 대기시켜 두고 교통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다.(박재곤·산악인 ‘산따라 맛따라’ 저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입력 : 2003.07.31 16:23 33' / 수정 : 2003.07.31 16:24 49'
전국의 스키장들은 여름 휴가철을 맞아 숙박과 식사, 골프 등을 엮은 상품들을 운영하고 있다. 여름 스키장은 스키는 탈 수 없어도 리프트·곤돌라, 물썰매, 수영장 등을 이용할 수 있다. 휘닉스파크 퍼블릭 골프 패키지는 골프를 즐길 수 있고, 무주리조트에서는 별자리 체험이 가능하다. 용평리조트에는 케이블카가 있고, 현대성우에서는 오프로드 카트를 즐길 수 있다.
◆스키 리조트 숙박패키지
무주리조트/(063)322-9000/www.mujuresort.com
용평 리조트(02)3404-8000/www.yongpyong.co.kr
현대성우(02)523-7111/www.hdsungwooresort.co.kr
여행 레저 단신 입력 : 2003.07.31 16:11 48'
맛기행 전문 여행사인 ㈜다음레저(www.tournfood.com)는 동해·남해의 별미와 특급호텔 숙박, 우등고속버스를 연계한 2박3일 휴가상품을 내놓았다. 동해는 삼척 팰리스 특급호텔에 묵으며 황기백숙, 삼보잡탕과 도루묵찜, 강원도 한정식 등을 제공한다. 삼척 환선굴, 무릉계곡, 삼척해수욕장, 해신당 등 관광지도 둘러본다(28만5000원). 남해는 스포츠파크호텔이 숙소. 십전대보약백숙, 참게탕과 은어튀김 등을 먹고 산청 구형왕릉, 남해유람선, 보리암, 사촌해수욕장, 하동 칠불사와 최참판댁 등을 돈다(27만5000원). 새마을호 열차를 이용, 거문도 백도로 떠나는 상품도 있다(29만5000원). (02)725-2005
재단법인 춘천인형극제(8~17일·www.cocobau.com)는 오는 15, 16일 이틀간 청량리역에서 춘천역까지 연결하는 ‘코코바우열차’를 운행한다. 오전 9시20분 출발, 오후 9시40분 귀환. 열차 안에서 인형극과 마임, 아코디언 연주 등을 공연하고 페이스페인팅도 해준다. 춘천 인형극장에서의 인형극과 인형 만지기 등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성인 3만원, 초등학생 이하 2만5000원. (033)253-0291
클럽리조트 PIC(Pacific Islands Club·www.pic.co.kr)가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 강남 코엑스 웨덱스 행사장에서 ‘예비 부부들과 함께하는 자선행사’를 펼친다. PIC에서 준비한 500원짜리 복권을 구입하거나 집에서 잠자고 있는 외국 동전(혹은 한국 동전)을 가져오면 예비 부부들이 아니어도 참가할 수 있다. 복권판매 수익금 등은 한국수양부모협회에 자선기금으로 전달한다. 호주 코란코브리조트와 PIC 괌·사이판 여행권 및 서울프라자호텔 등 국내 숙박권 등을 경품으로 제공한다. 퍼팅 골프 게임 혹은 스포츠 전문강사 자격증 소지 엔터테이너인 클럽메이트들과의 게임을 즐길 수도 있다. PIC 댄서들의 이국적인 공연도 있다. (02)739-2020
강과 바람이 속삭이네! "어서 오세요" 입력 : 2003.07.31 10:30 47'
◆ 다산유적지
◆ 수종사
◆ 서울종합촬영소
◆ 대성리관광지
◆ 이덕분추어탕
◆ 진짜네집 매운탕
◆ 환상의 드라이브코스
◆ 가일미술관
◆ 청평타워
◆ 밸리펜션과 명달리계곡
◆ 산중카페 ‘시골여행’
◆ 양수리 연꽃군락지
◆ 수상레저
북한강변과 청평호반은 물의 천국이다. 일출 때부터 일몰 때까지 수상스키, 모터보트 등 수상레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로 강물은 늘 넘실거린다. 북한강레저타운(031-584-5700)의 경우 당일짜리와 1박2일짜리 수상레포츠 캠프를 운영하면서 초보자들에게 강습을 한다.
모터보트로 청평호반을 한번 시원하게 가른 다음 수상스키를 가르쳐주고 워터슬레이를 태워주는 당일 프로그램 비용은 점심식사 포함 6만5000원이다. 바나나보트 1인당 1만원, 땅콩보트 1인당 1만5000원, 플라이피시(일명 가오리) 1인당 2만원, 수상오토바이 10분당 대여료 3만원, 수상스키 초보 강습 5만원, 물에서 타는 스노보드라고 할 수 있는 웨이크보드 초보강습 5만원 등. 수상스포츠를 즐기기 위해서는 여벌 옷으로 반바지와 면티셔츠, 수건 등을 준비해간다.
◆ 북한강 주요 전화번호(지역번호 031)
가평군청 582-2684
우리는 내일 북한강 간다 입력 : 2003.07.31 10:26 11' TOP
▲ 하늘에서 내려다본 북한강과 남이섬. 골프장이 들어서 있던 남이섬은 최근 가족들이 즐길 수 있는 종합 위락공원으로 변모하면서 드라마 촬영 무대로 등장하기도 했다./본사 제비2호에서 사진=이오봉 월간조선기자 email@example.com /조종=김면수차장
강변을 따라 달리는 시원한 드라이브, 청평호 팔당호 등 넓은 호수의 장관, 그 위에서 아침 공기를 가르는 수상스키의 시원한 물보라, 그리고 자연휴양림에서 쐬는 맑은 공기…. 북한강은 수도권 주민들의 간판 나들이 명소다. 맛집과 카페 미술관들도 여행객들의 피로를 덜어준다. 호숫가에 피어 있는 연꽃을 감상하거나 개구리 소리 들리는 논둑길을 거니는 것도 운치 있다.
한여름, 중부권의 젖줄인 북한강으로 떠나보자. 최근에는 길도 잘 정비되어 더욱 쾌적한 여행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자동차로 떠날 경우 길이 막힐 우려가 있으므로 되도록 아침 일찍 출발하고, 귀갓길도 저녁은 피하도록 하자. 경춘선 열차로 대성리역 청평역 가평역 강촌역 등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최근 몇 년간 북한강은 수상 레포츠의 천국으로 변했다. 곳곳에 수상스키나 바나나보트·웨이크보드를 탈 수 있는 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이 레포츠들은 당일 강습만으로도 즐길 수 있고, 근처에 음식점들이 함께 있어 맛 여행도 덤으로 할 수 있다.
다산 유적지나 수종사 등 문화유적지를 찾는 것도 좋다. 운길산(610.2m) 아래에 위치해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장관을 감상하기 좋은 수종사는 조선시대 유학자 서거정에 의해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을 지녔다”고 평가받은 곳이다. 석조부도와 팔각오층석탑 등을 볼 수 있고, 전망좋은 찻집에서의 전통차 한잔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다산 유적지에는 다산이 발명해 수원 화성 축성에 이용했다는 거중기 모형 등이 전시돼 있어 한번 가볼 만하다.
서울 종합촬영소도 방문을 권할 만하다. 야외에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찍은 판문점 세트, ‘취화선’을 촬영했던 민속마을 세트, 전통 한옥세트 ‘운당’ 등이 있어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간 듯한 느낌을 준다. 입장료(어른 3000원)만 내면 무료 영화감상에 운이 좋으면 영화 촬영 현장까지도 엿볼 수 있다. 대성리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대성리 유원지는 8만여평 규모의 유원지에 피크닉장·산책로·야영장·숲길 등이 조성되어 있어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본격 휴가철…전국 고속도로 곳곳 정체 입력 : 2003.07.26 13:03 11' TOP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아 주말인 26일 전국 고속도로가 한꺼번에 밀려든 휴가 차량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날 오전 비교적 원활한 흐름을 보였던 경부고속도로는 오후에 접어들면서 부산방면으로 판교~서울요금소 4㎞구간이 시속 10㎞내외의 정체를 보이고 있으며 수원부근에서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장마가 끝난뒤 오랜만에 찾아온 맑고 무더운 날씨 탓에 동해안 명산과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영동고속도로는 피서 차량들의 행렬로 평소 주말보다 막히는 구간이 증가했다.
강릉방면으로 서창~월곶 6㎞구간에서 차량들이 거북이 운행을 하고 있으며 신갈부근에서는 승용차 사고가 겹쳐 답답한 흐름을 보였고 마성타널~호법 27㎞ 구간에서 차량들이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중부고속도로는 영동고속도로로 진입하는 호법분기점에서 차량들이 한꺼번에 몰려 혼잡했다.
서울 시내는 전반적으로 시원한 흐름을 보였지만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는 길목인 한남대교 남단과 반포 인터체인지 부근은 시속 10㎞ 미만의 정체현상을 빚었다.
이날 서울을 빠져나간 차량은 정오까지 24만7천대로 다른 주말보다 8만여대 늘어났고 특히 평소 차량 소통이 뜸한 0시~6시에도 정체를 피해 휴가를 가려는 차량이급증, 이 시간대만 5만7천대*가 피서지를 향했다.
도로공사 측은 “피서 차량들 때문에 영동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지.정체 구간이 빠르게 늘고 있다”며 “오늘은 평소 주말보다 약간 많은 모두 30만대 정도가 서울을 빠져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서울=연합뉴스)
'보령머드축제' 방문객 늘어···작년보다 24% 130만 TOP
입력 : 2003.07.25 18:10 46'
충남 보령시는 25일 오후 8시 대천해수욕장 시민탑광장에서 이시우(李時雨·55) 시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과 시민, 관광객 등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19일 개막한 ‘보령 머드축제’ 폐막식을 가졌다.
이번 축제기간 중 방문객은 총 131만6000명으로 지난해 106만5000명에서 23.6% 늘었다. 특히 외국인의 경우 지난해 1만1960명에서 1만5720명으로 31.4%나 급증, 올 축제의 주제인 ‘보령머드의 세계화’가 기틀을 다진 것으로 보령시는 자평했다.
이영구(李榮求·45) 보령시 관광진흥계장은 “재미있는 행사가 많아 피서객들로부터 최고의 축제라는 평가를 받았다”며 “내년에는 더욱 알찬 프로그램으로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겠다”고 말했다.(대구=임도혁 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
변산반도의 서쪽 끝, 격포에서 꾼들은 행복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사이 ‘서해 갯바위 감성돔시대’의 중심이었던 격포는 10년 세월을 훌쩍 뛰어 넘은 지금에도 변함없는 손맛강산이다.
5월에 들어서자 몸 좋은 감성돔이 선보이기 시작했고, 홀린 듯 찾아오는 꾼의 행렬은 끝이 없다. 위도나 왕등도처럼 멀리 나가야 하는 곳도 있지만 일정바위, 싼여, 하섬 등 담배 한 대 거리에 있는 포인트도 많다. 그 넉넉한 수심(水心)을 헤아리다 보면 격포를 감싸고 있는 변산반도의 푸근한 산수(山水)와 인심(人心)을 지나치기 쉽다.
흔히 외변산이라고 일컫는 바다 쪽 풍경을 꾼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국립공원이라고 해도 늘 보는 바다가 새삼스러울 리 없다. 변산반도 산자락 내변산 일대의 아름다움은 그러나 색다르다.
서해안 고속도로 부안IC에서 변산반도의 북쪽 연안으로 들어가다가 바람모퉁이 쉼터를 지나면 왼쪽에 부안댐 물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댐에 닿기 직전의 변산온천은 물힘이 좋아 약 노릇도 한다지만 새벽에 문을 열었다가 저녁8시30분 일찍 문을 닫는 것이 흠. 온천을 좋아하지 않아도 직소천 동쪽 연안의 멋진 바위는 챙겨서 볼만하다.
종소리 울리는 저녁 내소사
풍경을 휘휘 둘러볼 양이면 변산해수욕장을 지나 변산면사무소 앞에서 좌회전, 부안댐 상류를 일별하다가 월명암 쌍쌍바위의 낙조(落照)나 직소폭포 등 변산팔경을 하나씩 마음에 새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 다른 여러 사람이 저마다 변산팔경에서 제1경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소사모종(蘇寺暮鐘). 종소리 울리는 저녁 무렵 내소사(진서면 석포리) 풍경이 얼마나 운치가 있기에 그러는 것일까.
무표정한 은행나무 대신 나이가 천살 이상이라는 느티나무가 정겹게 서 있는 내소사(來蘇寺). ‘모든 일이 다 소생되게 해 달라는 비원’이 이름에 담겨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범종은 소리와 몸이 다 아름답다. 저녁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돌아 나오는 길, 절안 출입로 왼쪽에 있는 찻집 화래원(和來院)에서 ‘솔바람차’ 한잔 데울 수 있으면 어떤 쓸쓸한 인생도 따스해질 것이다.
꾼들은 격포항의 아름다움조차 잘 모르고 있다. 북쪽 방파제 바로 앞에 있는 채석강과 격포해수욕장 북쪽의 적벽강은 멀리 봐도 아름답고 배를 타고 찾아가 상륙한 뒤 채비를 드리우면서 봐도 아름다운 쌍둥이 해식애(海蝕崖)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는 낙조(落照)를 감상하고 싶은 이는 격포 항구 남쪽 해넘이공원을 찾으면 된다. 격을 갖추자면 산길을 1.7km나 걸어야 하지만 3백m 지점 돌계단 위의 조망도 뛰어나다.
변산반도의 아름다움은 선캄브리아대 지질 구조가 남아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5억7천5백만년 이전에 생성된 화강암과 편마암과 7천만년 전의 퇴적암이 기와 모양으로 층을 이루고, 이것이 심한 지각변동을 받아 단층과 습곡을 이루면서 그 유난한 모습이 생겨났다. 5억7천5백만년 전이라니. 아름다움의 대가로는 너무 긴 시간이지만 우리의 여행에선 하루에 그 것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격포리와 도청리 사이에 있는 금구원조각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조각공원. 낚시솜씨도 뛰어난 조각가 김오성씨의 작업 공간과 개인천문대가 있다. 영상테마파크 건설과 도로 확포장 공사로 입구를 알리는 푯말을 놓치기 쉽다.◆ 1.내소사 대웅전 앞을 천년 동안 지켜온 느티나무. 2.도청리에 군락을 이룬 호랑가시나무. 변산반도가 서식 북방한계선이다. 3.진서리 젓갈단지의 한 매장. 4.격포항 노천횟집. 장보기도 가능하다.
보안면 우동리 우동저수지 들어가는 길목에는 조선 중기 학자로 실학의 씨앗을 뿌렸다고 평가받고 있는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글을 썼던 서당이 있다. 산길 30분을 걸어 서당 앞에 서면 보안면의 너른 들과 염전, 풍성한 삶의 터전인 곰소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언덕에 서서 선생은 중농사상을 기반으로 한 농지개혁의 꿈을 키웠다.
격포에서 우동리 가는 길, 풍경이 좋다 싶은 곳에는 예외 없이 카페촌이 형성돼 있다. 도청리 남쪽 호랑가시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앞은 오후 시간에 배낚시 출조지로 유명한 모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에 적당한 자리.
격포에서 낚시를 마치고 철수하는 길에는 두 가지 옵션이 있다. 남쪽 연안 길을 택하면 보안면 신복리 일대 젓갈시장을 거치게 된다. 곰소어민후계자젓갈, 다해젓갈할인백화점, 위도식품젓갈공장 등 상호는 제각각이지만 풍성한 맛은 한 가지다.
영전에서 바로 고속도로로 들어가지 않고 부안으로 발길을 돌리자 죽염 생산지로도 유명한 상서면 감교리에 원숭이학교가 있다. 학교에선 일본 니코 원숭이를 들여와 매시간 재롱을 보여주는 공연을 한다. 악어이빨 콘테스트가 열리는 파충류관도 있어 아이들에게 점수 따기 좋다.
어느 길을 택하든 격포 부근엔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바닷가에 횟감이나 매운탕감이 흔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어디나 있는 것이기에 더 새로운 맛을 찾게 되지 않을까. 바자락죽 한 그릇은 입맛이 까다로운 꾼에게도 해답이 될 수 있다.
바지락은 참조개과에 속하는 바닷조개. 담수가 섞여 염도가 낮은 바닷가의 얕은 뻘에 숨어 산다. 바지락죽은 잘 끓인 쌀죽에 싱싱한 바지락을 넣고 한 번 더 끓인 뒤 생인삼, 녹두 등을 넣어 한 차례 더 살짝 덥혀 완숙시킨 것이다. 최근엔 변산반도 북쪽 계화도 돈지연안에서 채취한 백합으로 끓인 백합죽이 가세했다. 그나마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면 백합죽은 맛보기 어렵게 된다.
변산반도의 북쪽 연안에는 간척사업에 반대하는 환경단체의 시위라고 할 수 있는 목조각품이 늘어서 있는가 하면 그 당위성을 설명하는 새만금관광안내소(월요일 휴관)가 있다. 꾼들은 이미 새만금방조제 건설로 물길이 바뀌면서 포인트가 급변하고 감성돔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을 느끼고 겪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70% 이상 방조제 건설이 진행된 뒤에, 지금에 와서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을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격포항 저편으로 내려앉는 저녁노을은 아름답고 또 슬펐다.
격포로 가려면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부안IC로 나와 30번 국도로 부안읍으로 들어간다. 부안읍서 격포까지 승용차 20분 거리. 곰소만이나 내소사 쪽을 먼저 보고 싶을 때는 줄포IC로 나와 23번 국도-30번 국도를 거치도록 한다. 호남고속도로를 타야 할 때는 태인IC가 출구. 고속버스 승차권 예약 및 운행 안내 easyticket.co.kr 시외버스 안내는 부안 063-584-2098 격포 582-8740 줄포 582-0008 곰소 582-7129.(글 사진 장창락 기자 email@example.com)
서해로 떠나자! 해수욕장·맛집·펜션베스트 TOP
입력 : 2003.07.24 21:20 03' / 수정 : 2003.07.24 21:25 51'
[주말매거진] 서해 해수욕장 주변 맛집
입력 : 2003.07.24 14:43 34' / 수정 : 2003.07.24 20:08 53'
바캉스 시즌, 많은 사람들이 서해안으로 떠난다. 피서여행 길에 별미집까지 들른다면 금상첨화. 서해안 지역에서는 농어 등 활어회에 굴비구이정식, 꽃게장, 백합죽, 영양솥밥, 밀국낙지탕, 쌈밥 등 다양한 별미가 기다린다.
▲ 무안 곰솥가든식당의 기절낙지. 양파 소스에 찍으면 꼼짝않던 낙지다리가 꿈틀거린다.
홀통해수욕장, 조금나루유원지 등을 거느린 전남 무안군에는 ‘무안5미’라는 것이 있다. 세발낙지, 양파한우, 명산장어구이, 사창돼지짚불구이 그리고 도리포활어회가 무안의 5가지 맛이다. 공용버스터미널 뒤의 낙지골목과 곰솔가든식당(망운면, 452-1073) 등에서 기절낙지를 맛볼 수 있다.
무안 갯벌에서 잡히는 세발낙지를 소금물로 잘 씻어낸 다음 다리와 머리를 잘라내 한 접시에 담는데 머리는 살짝 데치고 다리는 익히지 않는다. 낙지 다리를 무안의 대표적 특산물인 양파소스에 찍어내면 죽은 듯하던 다리들이 다시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이래서 기절낙지라고 한다.
가격은 시세에 따라 받는다. 요즘은 1접(20마리)에 13만원선. 홍어회, 삶은 돼지고기, 도가니 수육, 육회, 생선회 등이 곁음식으로 나오고 낙지를 먹은 다음 공기밥(1그릇 1000원)을 주문하면 게장, 된장찌개, 조기구이 등 10여 가지 반찬이 차려지는 상이 나온다.
그 밖에 매일회관(무안읍, 453-2572) 에서는 양파한우고기(1인분 1만6000원), 명산장어(몽탄면 명산리, 452-3414) 에서는 장어구이(1kg에 4만원), 두암식당(몽탄면 사창리, 452-3775) 에서는 돼지짚불구이(1석쇠에 6000원), 도리포횟집(해제면 송석리, 454-6890) 에서는 농어, 돔, 민어 등 자연산 회를 즐길 수 있다(1kg에 5만~5만5000원선).
영광 가마미해수욕장 에서 피서를 즐긴 여행객들이라면 굴비한정식 전문인 일번지식당(법성면 법성리, 356-2268·8111)을 찾아가본다. 2000년 전라남도로부터 남도음식명가 지정을 받았다. 한정식을 주문하면 1인당 한 마리씩 굴비 맛을 볼 수 있고 계절에 맞는 활어회를 비롯해 자린고비, 꽃게간장게장, 잘 삭힌 홍어와 편육, 서대, 장대, 박대, 병어조림, 갈치속젓, 꼬막, 삶은 새우, 갈치구이, 굴회 등등 도저히 밥 한 그릇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반찬들이 상에 오른다.
이처럼 35~40가지 반찬이 차려지는 한정식은 1인당 1만5000~2만원선이다. 미리 예약을 해놓고 가야 음식의 제 맛을 즐길 수 있다.
▲ 부안 계화회관의 백합탕과 백합죽. 백합조개의 깊은 맛은 조개류 중에서 으뜸이다.
◆전북(지역번호 063)
동호, 구시포 등의 해수욕장을 보유한 전북 고창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풍천장어를 먹어봐야 한다. 선운사 입구 삼거리 길가에는 전통, 원조, 옛날 등등의 수식어를 단 식당간판들이 즐비하다. 그중 가장 소문난 집이 신덕식당(아산면 삼인리, 564-1533) . 3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초벌구이를 한 장어를 비법의 양념장에 푹 담가 짙은 맛이 배게 한 다음 다시 서너 차례 장을 더 발라가며 재벌구이를 한다. 그러면 씹지 않아도 스르르 목구멍으로 넘어갈 만큼 부드러워진다. 1인분에 1만4000원. 식사를 겸할 때는 된장찌개와 곰삭은 젓갈을 곁들인 밑반찬 대여섯 가지가 1000원의 실비로 제공된다. 거기에 복분자 술 한잔 겸해도 좋다.
그 밖의 고창 맛집으로는 조양식당(고창읍, 한정식 1인분 1만7000~2만5000원, 564-2026), 한우물회관(고창읍, 바지락죽 1인분 6000원, 561-5694) 등이 있다.
변산반도와 변산, 고사포, 격포, 상록, 모항 등등의 해수욕장을 품은 부안군에서는 회는 기본이고 꽃게장, 백합죽, 바지락죽 등이 피서여행에 나선 가족들의 입맛을 유혹한다. 곰소항의 칠산꽃게장횟집(진서면 진서리, 581-3470) 의 꽃게는 싱싱하면서도 비릿하지 않고 간장 맛이 잘 배어있으면서도 너무 짜지 않다. 1인분 1마리에 1만3000원. 공기밥(1000원)을 곁들이면 꽃게장 정식이 된다. 된장국 등 10여 가지 반찬이 딸려나온다.
또 부안지방 여행 중 백합죽을 먹고 싶으면 계화회관(행안면 신기리, 584-3075, 0075) 을, 바지락죽을 먹고 싶으면 변산온천산장(변산면 대항리, 584-4874) 등을 찾는다. 백합죽과 바지락죽은 1그릇에 각 6000원.
선유도행 여객선과 유람선이 떠나는 군산시에서는 경산옥(영화동, 아귀찜과 복찜, 5만~6만원선, 442-4223), 군산횟집(금동, 활어회, 442-1114), 장춘횟집(금동, 활어회, 443-5161), 압강옥(사정동, 쇠고기쟁반, 1인분 1만3000원, 452-2778) 등이 식도락가들에게 인정받는 맛집이다.
선유도해수욕장과 망주봉 등의 비경을 지닌 선유도 내에는 중앙횟집(옥도면 선유도리, 465-3450), 서해횟집(465-8787) 등이 영업 중. 농어, 간재미, 갑오징어, 소라 등이 제철이다. 협정가격이 식당 안에 붙어 있어 바가지를 피할 수 있다. ▲ 태안 이원식당의 밀국낙지탕. 낙지를 먹은 다음 그 국물에 수제비를 끓인다.
◆충남(지역번호 041)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북 군산시와 마주한 서천군의 피서여행지는 춘장대해수욕장, 장항송림해수욕장 등. 맛집으로는 장항읍에 바다횟집(복어탕 1만2000~3만원선, 우럭탕과 서대탕 각 1만5천원, 956-7932), 군장횟집(956-6531) 등이, 서천읍에 한국관(영양돌솥밥, 1인분 6000원, 953-1301), 바다매운탕(활어회, 아귀찜, 장어구이, 952-0182) 등이, 한산면에 한산회관(칡냉면, 4000원, 951-9444) 등이 있다. 서면의 마량포구와 홍원항에도 횟집들이 즐비하다.
대천해수욕장, 무창포해수욕장, 용두리해수욕장과 원산도, 삽시도, 호도 등의 섬을 품고 있는 보령시에서 회를 맛보려면 대천항 주변으로 간다. 약 30여개가 모여있다. 항 초입의 한국수산식당(933-7155) 은 자연산 회도 좋지만 졸복을 이용한 복찜(3만~5만원), 복지리와 복매운탕(각 1인분 1만원)을 잘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대천 시내에서 대천항이나 대천해수욕장 구광장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게 되는 대천관광농원(신흑동, 933-8542) 은 영양돌솥밥(1인분 8000원)이 특미이다. 찹쌀, 현미, 흑미, 수수, 검정콩, 찰보리, 밤, 대추, 은행, 인삼 등이 들어가며 손님이 오는 즉시 장수곱돌에다 밥을 짓는다. 밑반찬으로 쓰이는 야채는 주인 안만수씨가 유기농법으로 지은 것들이다.
이 밖에 꽃게탕(1인분 1만6000원), 수육 형태로 쪄내 겨자장에 찍어먹는 ‘아귀 1마리’(5만~7만원)도 인기가 높다. 이 농원에는 TV와 에어컨을 갖춘 객실이 11개 있고 투숙객들은 숙소 옆 잔디밭에서 취사도 할 수 있다.
태안해안국립공원, 안면도 등이 있어 충남 제1의 바다여행지로 대접받는 태안군.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밀국낙지탕이 있다. 싱싱한 박속 외에 여러 가지 야채를 숭숭 썰어넣고 끓인 육수에다 세발낙지를 데쳐 먹고 난 다음 그 국물에 수제비를 더 넣어 먹는 음식. 박속의 시원한 맛, 세발낙지의 달콤함, 밀가루 수제비의 걸죽한 풍미 등이 잘 어울린 음식이다.
원북면 소재지의 원풍식당(672-5057, 1인분 1만2000원) , 이원면 소재지의 이원식당(672-8024, 1인분 1만5000~2만원선) 등이 여행객들에게 지명도가 높은 밀국낙지탕 전문 맛집이다. 낙지를 어느 정도 넣었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
삼봉, 밧개, 꽃지, 바람아래 등 10여개의 해수욕장이 해안을 따라 주욱 펼쳐지는 안면도의 별미집으로는 꽃지해변의 전망좋은 횟집(꽃게탕과 회덮밥, 674-8868), 방포 입구의 대륙붕횟집(활어회, 673-4282) 등이 손꼽힌다. 만리포해수욕장과 가까운 소원면 모항리 모항포구에는 붕장어(속칭 아나고)구이를 잘 하는 반도회관(672-2626) , 만리포해수욕장 해변에는 돌섬회관(672-9540) 등이 자리한다. 붕장어구이 가격은 두 군데 모두 1kg에 2만5000원.
서산시에서는 천수만방조제 중간, 부석면 창리의 바위회관(우럭·광어회, 669-8844) 이나 부석면 간월도리의 큰마을횟집(영양굴밥, 8000원, 662-2706) , 맛동산(영양굴밥, 8000원, 669-1910) , 해미면 반양리 향수가든(비지찌개를 곁들인 보리쌈밥, 6000원, 688-3757) 등에서 별미를 즐기며 귀갓길 드라이브의 원기를 얻는다.(글·사진=유연태 여행PD firstname.lastname@example.org)
서해로 떠나자 / 예약 가능한 펜션 TOP
입력 : 2003.07.24 14:21 07' / 수정 : 2003.07.24 20:09 31'
휴가철, 여행을 위해서 가장 긴요한 게 잠자리다. 다음은 서해안 쪽에 아직 방이 남아있는 숙소들이다.
▲ 서산 펜션(충남 서산·02-2166-2477)/bnbclub.co.kr
150평 규모의 허브 농장을 집주인이 직접 운영하고 있어 아로마 테라피(향기 요법) 체험을 할 수 있고 허브차와 허브소주도 시음할 수 있다. 바로 뒤쪽으로 5분거리에 팔봉산 등산로가 인접해 있으며, 자동차로 20분 이내 거리에 바다가 있어 갯벌에서 즐길 수도 있다. 객실은 4인 기준 9만원. 7월 말에서 8월 초 예약할 수 있는 객실 많음(현재 예약률 약 40%). ◇ 허브나라
▲ 허브나라(태안군·041-673-3100)/hubhouse.com.ne.kr
허브차가 제공되며 저렴한 가격으로 허브를 구입할 수도 있다. 안면도만의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장점. 생일·결혼기념일·100일 등 기념일에는 이벤트를 준비해 주기도 한다. 꽃지 해수욕장과 안면 자연휴양림은 차로 5분 거리. 2인 기준에 10만~12만원선
▲ 바다가 보이는 You & I (서산·02-2166-2477)/bnbclub.co.kr
전 객실(1·2층)에서 바다를 볼 수 있으며 객실 앞 나무 테라스 앞에서 일몰을 감상할 수도 있다. 팔봉산 등산로까지 차로 10분 거리. 자전거는 무료로 대여해줘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만리포·학암포 해수욕장은 차로 20분만 달리면 도착한다. 취사가능한 커플룸 2인 기준 10만원. 패밀리룸은 4인 기준 12만원.
▲ 로그캐빈 펜션(태안군·041-673-8983)/ipinehill.co.kr
안면 자연휴양림이 인접해 있다. 꽃지 해수욕장이 차로 15~20분 소요. 단, 취사는 별도 공간에서 해야 하며 애완견은 금지된다. 침대방과 온돌방이 있으며 4인 기준 7만~10만원선.
▲ 잉스힐(논산·041-733-2639)/ingshill.co.kr
수락계곡이 집 주변에 있어 연인들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다. 낚시 여행을 떠난 가족들이 이용해도 좋다. 주말농장도 가능하다. 취사 시설이 완비돼 있다. 10평(4인 기준) 10만원. 11평형(8인 기준) 15만원, 15평(15인 기준) 20만원. 1명당 5천원씩 추가.
▲ 해마루(태안군·041-674-8668)
안면도 밧개 해변에 인접해 20m만 걸어나가면 해변을 볼 수 있다. 밧개 해수욕장에서는 말을 탈 수도 있다. 성수기에는 4인 기준 6평형은 10만원, 8인 기준 10평형 객실은 10만~12만원선.
◇ 강당리계곡 펜션
▲ 강당리계곡 펜션(아산·02-2166-2477)/bnbclub.co.kr
강당리계곡 상류에 위치해 계곡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집 앞에 잔디 정원이 있고 바비큐도 가능하다. 황토방이 있어 황토 원적외선을 쐴 수 있는 통나무형 안채가 있는 48평형은 10명 기준으로 30만원. 올해 신축한 화이트 통나무형은 4인 기준에 12만원(15평형). 1인당 1만원이 추가된다.
▲ 별빛고운언덕 펜션(진천·043-536-6114)/ipension.net
아침·저녁 식사와 숙박이 한번에 해결되는 패키지 상품. 산악MTB자전거를 무료 대여해주고 있으며 펜션 근처에 산책로가 있다. 주말가격으로 커플룸 2인 기준 6만5000~7만5000원. 스위트룸은 3인 기준 10만원, 패밀리룸은 6인 기준 15만원선.
▲ 골망태(전남 화순군·061-374-5544)/golmangtae.com
짚으로 만든 바구니란 뜻의 ‘골망태’는 고풍스러운 비품을 비치해 독특함을 맛볼 수 있다. 보성 차밭이 차로 40분 거리에 있으며 송광사와 쌍봉사가 20~25분 거리. 황토방은 2인 기준 5만원. 일반객실은 2인 기준 4만원. 방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지만 취사는 공동취사장을 이용해야 한다.
▲ 변산통나무집(전북 부안군·063-584-2885)/bspension.co.kr
초대형 스크린을 통해 DVD를 즐길 수 있다. 객실 내에서 변산 앞바다를 창 밖으로 볼 수 있으며 상록 해수욕장이 걸어서 7분 거리. 성수기 요금은 별도 문의.
▲ 나오스펜션(무주군·063-322-4448)/naospension.com
돌침대와 깔끔한 싱크대 및 조리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바비큐 시설 완비돼 있다. 펜션 100m 앞에는 무주구천동 계곡이 흐른다. 덕유산 자연휴양림은 차로 5분 정도. 4인 기준 15만원선. 6인 기준 7만~20만원선.(정민경·비앤비클럽 여행칼럼니스트)
바닷가 맛집- 파도소리 곁들여 회 한접시 TOP
강원도와 경상북도 해변의 주변 맛집 소개
입력 : 2003.07.17 14:49 13' / 수정 : 2003.07.17 19:33 51'
▲ 경주시 장진마을 수도회식당의 모듬회. 한 접시에 3만5000원~6만원이다.
◆강원도(지역번호 033)
고성군 거진항 입구의 성진식당(682-1040) 은 북어국과 생태찌개를 잘 하는 집이다. 고성 토박이이자 수산물 중매인, 건어물 판매상도 했던 김창길씨와 평창 출신의 부인 황경남씨 내외가 운영한다. 거진항에서 추운 겨울에 잘 말려놓았다가 냉장고에 보관해두는 북어로 해장국을 끓여낸다.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며 밑반찬으로 6가지가 나온다. 술꾼들에게는 대환영을 받는 메뉴로 1그릇에 4000원.
화진포해수욕장 가는 길의 화진포막국수(682-4487) 는 100% 메밀로 만든 국수를 동치미 국물에 말아내 시원하고 뒷맛이 깔끔하다. 1그릇 5000원.
속초 대포항 위쪽의 외옹치항은 속초 주민들이 즐겨찾는 곳. 청이횟집(635-3318) 등 10여개 횟집이 영업 중. 요즘에는 ‘떡마리미’라는 이름의 생선이 제철이다. 정치망 어장에서 잡히는 자연산 횟감으로 1마리 2kg짜리가 6만원.
주문진항 어판장 맞은편의 주문진생선회센터 건물 1층에 자리한 뽀빠이횟집(661-9898)은 물회로 소문난 집이다. 주문진 토박이인 김남진씨가 주방을 책임지고 있다. 돌삼치, 전복치 등 도시인들로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잡어를 사용한 물회가 좋다. 값은 각각 1만원.
연곡해수욕장 연곡횟집(662-7979) 은 회에 딸려나오는 곁음식과 밑반찬이 푸짐하다. 해안도로가 90도로 꺾어지는 지점에 위치, 방안 어디에서건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회를 맛볼 수 있다.
강릉시 경포도립공원 내의 음식점은 대략 200여개. 그 중에서도 호텔현대 경포대 인근 바닷가에 자리한 원주횟집(644-2475)은 호텔 직원들이 추천하는 맛집으로 2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모듬회가 5만~7만원선. 강문동 강문해수욕장의 원조바다도매횟집(652-1064)은 우럭미역국을 잘 한다. 1인분 8000원~1만원선. 홍서범, 김종서, 문희옥 등 연예인 단골이 많은 집이다.
동해시 묵호동 부흥횟집(531-5209), 대진어촌계회센터(534-6668) 도 이름이 있고 삼척항 횟집촌에 자리한 평남횟집(572-8550) 은 대를 이은 맛집. 주인은 고깃배 입항 시간에 맞춰 나가서 싱싱한 횟감을 구입해 온다. 목선 모양의 접시에 담겨 나오는 회는 푸짐하다. 모듬회 4만~15만원. 삼척시내에서 해물탕이 입맛에 당긴다면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의 남양동 남해해물탕(572-0980) 을 찾아간다. 솥 크기에 따라 1만5000원~3만5000원.
◆경북(지역번호 054)
영덕군 축산면 축산항 용궁회타운(732-4338) 은 농어, 참돔 등 고급 어종의 회를 비롯해서 잡어를 가미한 모듬회 등을 내놓으며 해삼과 소라 등등이 미식가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모듬회는 4만~6만원. 축산항 북쪽, 대진항 인근 대진횟집(732-0046) 은 자연산 도다리나 산 오징어로 물회를 맛깔스럽게 차려준다. 고객 취향에 따라 도다리 반, 오징어 반을 섞기도 한다. 밥을 포함 1인분 값은 1만원. 주인이 집에서 담근 고추장으로 맛을 낸다. 12년 전부터 영업중이다. 영덕읍 우곡리의 동해별미식당(733-0292) 은 대구탕과 영덕대게탕 전문집이다.
포항시 청림동 중앙의원 앞의 월성식당(292-1335) 은 물텀벙이탕 전문집. 물텀벙이의 본명은 물메기. 2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주인은 매일 죽도시장에서 식재료를 구입해온다. 물텀벙이는 큰 것일수록 좋은 맛을 내며 오래 끓일수록 진한 맛이 우러나온다. 6천원.
경주시 감포읍 전촌리 바닷가로 나가면 장진마을 포구가 나온다. 경주시 지정 횟집단지라는 안내판에서 볼 수 있듯이 별미촌으로 자리잡았다. 수도회식당(775-3072), 동은활어회직판장(775-1406) 등 20개 정도의 횟집이 있다. 요즘은 자연산 참가자미가 제철로 4만~6만원이다.(글·사진=유연태 여행PD email@example.com)
[김주영의 음식 향도학] 홍어 TOP
우선 입 속 전체를 쏘아대는 자극으로 콧등이 시큰해 오면서 눈물이 고인다. 입 안의 거북한 포만감과 이질적인 곤혹스러움을 재빨리 씹어 해결하고 싶지만, 손쉽지 않다. 당장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없어 한동안 입 안에 두고 우물거릴 수밖에 없는데, 공교롭게도 그때부터 온몸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예민한 촉수까지 자극하는 오묘한 향기의 파장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발효의 악취 뒤에 숨어서 만개되어 있는 매혹적인 향기를 몸 전체로 터득하는 것이 바로 홍어 본래의 맛을 즐기는 방법이다. 섣불리 갖은 양념을 곁들이거나, 거북함 때문에 대중없이 호들갑을 떨었다간 홍어 고유의 향기를 지나치게 되고 수월찮은 식대나 지급하고 물러나는 어쭙잖고 머쓱한 사람으로 지칭되기 십상이다.
이 부패한 육질에서 발산되는 매혹적인 향기를 자존심 하나로 지탱해 가는 사람을 만났다. 바로 목포시 용당동에 있는 홍어전문 식당이다. ‘금메달’이라는 식당의 이름에서부터 주인 박정숙씨가 19년 동안 지켜온 지극한 홍어 사랑을 명료하게 읽을 수 있다.
흑산도에서 잡히는 참 홍어만 써서 홍어찜, 홍어탕, 삼합과 홍탁을 격식있게 차려내는 박씨는 홍어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할 만큼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어서, 내 소설 ‘홍어’의 초판본까지 간직하고 있을 정도다. 스스로 ‘백설공주’ 아닌 ‘백살공주’로 자칭할 만큼 미모인 박씨는 예약하지 않은 고객들에겐 식당 문을 열어주지 않고, 흑산도에서 홍어가 잡히지 않는다는 시그널이 있을 땐 식당 문을 닫아버린다.
옛적에 왜구들의 등쌀에 시달림을 받아 온 흑산도 주민들을 영산포로 이주시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주한 어민들은 어장의 물때와 조류의 흐름에 밝은 흑산도로 조업을 나가 홍어를 잡았다. 2~3일이 걸리는 흑산도에서 영산포구까지 뱃길 중에서 낚은 홍어는 어창에서 자연발효가 되었는데, 우연하게도 그 맛이 갓 잡아 올린 것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삭힌 홍어가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다.
요사이 뱃길이 빨라지면서 집산지가 목포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값어치가 수월찮은 귀물이어서 냉동실에 보관된 홍어를 구경만 하려 해도 평소 가게 주인과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람의 곁부축을 받아야 가능하다.
더불어 낚시에 물려 있는 암컷을 끌어 올리다 보면, 짝짓기 중이던 수컷도 덩달아 따라 올라올 만큼 섹스 행위에 집념이 강한 생선이라는 것을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 적고 있다. 관절염을 치료해 준다는 드러난 약효 이외에도 기력을 보완해 주는 또 다른 효험도 있을 것 같은, 의미심장한 생선이다./ 김주영 소설까
[맛집] 홍어 맛있는 집은? TOP
서울에도 남도 손맛이 좋은 집, 홍어를 전문으로 하는 집들이 있다. 다만 흑산 홍어는 구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미리 전화로 문의하는 게 낫다. 비원 앞, 종묘 쪽으로 길을 건너면 순라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좁은 골목길이 있다. 그 길의 이름을 그대로 딴 순라길(02- 3672- 5513)은 서울에서 제대로 홍어 맛을 볼 수 있는 집이다. 잘 삭힌 홍어, 잘 익은 김치, 그리고 기름진 돼지고기의 삼박자가 잘 어우러진 삼합(三合)에 막걸리 한 잔 곁들이면 세상이 후련하다.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는 신안촌(02- 738- 9970)도 홍어 맛이 일품이다. 홍탁 삼합은. 부드럽게 먹을 수 있는 살점 부위만 떠낸 뒤 튀김가루를 입혀서 부친 따뜻한 홍어 전유어가 이 집의 별미다./ 고형욱·음식평론가
게재일 : 2003/07/19
시원한 강과 바다를 찾아 떠나자.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절로 강과 바다 찾아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지기 마련.
올여름 많은 인파가 해외로 떠나고 있지만 국내의 강과 바다에서도 얼마든지 멋진 휴가를 보낼 수 있다.
강
한탄강 동강 금강 밀양강 섬진강…
저마다 깊푸른 줄기에 절경 자랑
강가에 서면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 경기도
한강 하류 양화대교 중간의 선유도 공원은 서울의 새로운 명소. 정수장에서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한 이곳은 다양한 테마 정원과 산책로가 마련돼 있다.
경기도 한탄강 일대는 레프팅, 번지점프의 천국이다.
▶ 강원도
정선아리랑의 한 구절로 유명한 정선군 아우라지와 동강 일대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넓은 자갈밭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홍천 강변의 모곡 유원지에서 시작돼 말골까지 이어지는 고운 모래밭도 강가에서 오토 캠핑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다.
▶ 충청도
금강 하구언에 위치한 충남 서천군 신성리 갈대밭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촬영지로 널리 알려진 곳. 바람 속에 흩날리는 갈대의 모습이 볼만하다.
충북 단양의 깊고 깨끗한 남한강 한가운데 우뚝 솟은 도담산봉의 절경을 유람선을 타고 감상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 경상도
경남 밀양강 용두연을 기점으로 하류 1km를 따라 삼문송림과 체육공원, 일류제 등의 유원지가 있다. 상류지역에는 밀양강의 북천수와 동천수를 따라 넓은 백사장과 조약돌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용처럼 휘도는 경북 예천 회룡포도 명소. 인근 비룡산을 휘감으며 흘러가는 맑은 물과 백사장이 볼만하다.
경북 청송 병암하천의 40m 수직 절벽 아래는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정도로 더위를 피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 전라도
전북 무주읍 내도리 강변에는 모래와 조약돌이 뒤섞인 백사장이 있어 물놀이와 함께 야영을 즐길 수 있다.
순창 장구목도 섬진강에서의 최고의 절경을 가진 장소로 널리 알려진 곳. 강폭이 넓고 물이 얕아 온 가족 유원지로 안성맞춤이다. 특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요강처럼 움푹 패였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요강바위는 장구목 인근 마을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바다 TOP
해수욕 갯벌탐사 일출 유람선…
각지방 대표 바다들 진한 유혹
한여름 해변에선 추억이 익는다
▶ 경기도
인천 연안부두나 영종도를 통해 들어가는 무의도는 갯벌탐사와 낙조 등을 즐길 수 있다. 하나개, 실미 두개의 해수욕장도 서쪽 해안에 있다. 실미 해변에는 아름다운 은빛 모래가 깔려 있다. 하나개 해수욕장은 커다란 갯벌을 품고 있으며 고운 모래사장 해변이 반원으로 넓게 퍼져 있다.
▶ 강원도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에는 레이저를 쏘아 올리는 워터 스크린쇼가 매일 밤 펼쳐진다. 해변영화제 등도 함께 열려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인근 삼척, 맹방 해수욕장도 휴양지로 잘 알려져 있다, 신남포구 일대는 일출과 남근상으로 명성이 높은 곳. 동해에는 한적한 해변 휴식처가 많다.
▶ 충청도
대천해수욕장은 대형 백사장과 함께 자연 휴양림에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남쪽의 무창포 해변과 용두마을 해변도 놀기에 안성맞춤. 바닷길이 열리는 무창포 바다도 유명하다.
충남 태안 신두리는 마치 동해안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모래와 개펄이 섞인 백사장이 특색이며 거대 모래 언덕이 사막을 연상케 한다.
안면도 바닷가에서는 낙조가 백미. 고운 모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꽃지 바닷가와 방포항을 연결하는 다리 위에서 바위와 낙조를 보면 절로 술 한잔이 생각난다.
▶ 경상도
부산 해운대에는 해수욕장과 함께 지난해 완공된 광안대교 일대의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유람선도 새로운 명물로 등장했다.
포항 일대 바다는 푸른 물결과 함께 소나무 숲이 시원함을 더한다. 이 일대의 구룡포, 칠포, 월포, 화진포 등 많은 해수욕장에는 언제나 피서객으로 넘쳐난다.
▶ 전라도
전북 부안 변산 해수욕장 일대는 하얀 백사장과 푸른 소나무가 10리에 걸쳐 늘어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완만한 조수의 차로 물놀이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채석강은 층층의 단애가 책을 쌓아놓은 듯하고, 변산반도의 낙조는 강화 석모도, 태안 안면도와 더불어 '서해안 3대 낙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전남 한려해상국립공원 일대는 해양 휴양지의 대명사. 여수 일대의 오동도, 거문도, 백도 등 다도해 일대를 둘러볼 수 있는 유람선 관람은 필수다.<스포츠조선 김한석 기자 hskim@>
입력 : 2003.07.17 16:47 34' / 수정 : 2003.07.17 19:28 02'
◇ 백도해수욕장
백도는 바다에서 망을 보던 작은 섬. 원래 검은 빛을 띠었으나 갈매기들의 배설물로 뒤덮여 하얗게 되어, 지명이 백도가 되었다. 해변 길이는 800m 정도. 방파제와 붉은 등대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살려준다. 배 낚시와 갯바위 낚시 가능.
◇ 죽도해수욕장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다. 반원형 백사장의 한 쪽 끝으로 이어지는 죽도는 높이 50m 정도의 바위산으로 소나무와 대나무가 자란다.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는 남애항으로 내려가면 어촌계 도매회센터에 횟집이 밀집해 있다.
◇ 노봉해수욕장
망상역과 가까운 노봉해수욕장은 민박집 주인들이 조용한 분위기 유치를 위해 캠프파이어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에 묵호항에서는 싱싱한 횟감을 구입할 수 있다. 3일과 8일에는 북평 민속장이 열린다.
◇ 용화해수욕장
가족 단위 피서객들에게 어울린다. 용화 해변은 한가운데로 용화천이 흐르며 90여가구의 주민 대부분이 민박을 운영한다. 모래사장과 민박촌 사이 구역은 텐트촌으로 활용된다.
◇ 후정해수욕장, 구정해수욕장
두 해수욕장 모두 소나무 군락이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며 수심 1m 정도의 해변 모래 바닥을 발로 뒤집고 다니다 보면 조개가 잡히기도 한다.
◇ 경정, 남호, 대탄, 백석, 하저 해수욕장
간이해수욕장들. 강구항이나 축산항 등에서 수산물 쇼핑을 할 수 있다.
◇ 화진해수욕장
내연산, 보경사 등 주변 관광지가 좋다.
◇ 오류해수욕장
해변 길이 1㎞정도. 모래찜질을 즐기기에 좋다. 소나무숲이 캠프장 구실을 한다.
◎ 각 지역 수협 전화 (민박 정보를 알 수 있음)
(강원도 지역번호 033)
(경북 지역번호 054)
짐싸기가 휴가의 시작 TOP
긴팔옷·구급약…소설책은 챙기셨나요?
입력 : 2003.07.17 14:51 15' / 수정 : 2003.07.17 17:14 37'
휴가는 여행 짐 꾸리기에서 시작된다. 해외여행이건, 국내여행이건 꼭 필요한 물건을 빼놓지 않고 압축적으로 싸는 것은 여행을 백배 즐기기 위한 일종의 '예술'이다.
①여행가방은 꼭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더라도 바퀴가 달린 핸드 캐리어가 유용하다.
②2.해변에서 수영복은 화려할수록 좋다고 패션전문가들은 말한다. 수영복을 넣는 비닐 손가방도 준비하자.
③1㎝ 정도의 폭신한 바닥으로 된 통은 올 여름 최고 인기 품목. 고무나 플라스틱끈이 발에 닿아 아프지 않은지 확인한다.
④수영복 위에 랩스커트로 입거나 비치가운으로 쓸 수 있는 비치타월은 반드시 챙긴다. 인도네시아 전통 드레스인 사롱(sarong)은 모래밭에서 돗자리로도 쓸 수 있고, 물에 빨아 널면 금방 말라 편리하다.
⑥쌀쌀한 저녁시간에 걸칠 긴팔 카디건도 없으면 섭섭하다.
⑦진통제·지사제·모기퇴치약 등의 약품은 현명한 여행자의 필수품.
⑧파라솔 밑에서 조용한 휴가를 보내고 싶다면 책과 CD플레이어도 빼놓지 말고 챙기자. 신문사 홈페이지와 인터넷서점 홈페이지에는 여행지에서 읽을 만한 책 순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가방-만다리나덕, 비치타월-쿨하스, 카디건-베스띠벨리, 수영복-노티카, 원피스-데스틸)
여성들이 짐을 꾸릴 때 가장 신경쓰는 물건이 화장품이다. 항목 수가 많은 데다 하나라도 빠지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여름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외선 차단제. 얼굴용뿐 아니라 보디용도 준비한다. 해변에서 돌아와 울긋불긋해진 피부를 가라앉히는 제품도 얼굴용과 보디용을 함께 마련한다. 얼굴에는 마스크를 붙이고, 몸에는 보습젤을 바르면 시원하게 피부를 식힐 수 있다.
해변에서 화장을 할 때는 최소한이 좋다. 자외선 차단지수가 높은 트윈케이크(파운데이션과 파우더의 혼합 형태)와 물에 지워지지 않는 워터 프루프 마스카라(속눈썹을 풍성하게 하는 화장품), 립글로스 정도면 충분하다. 흰 다리가 부끄럽다면 구릿빛 피부를 만들어주는 태닝 로션을 발라 ‘보디 화장’을 하는 것도 멋내기 방법이다.
바닷가 맛집
-파도소리 곁들여 회 한접시 입력:2003.07.17 14:49 13'
강원도와 경상북도 해변의 주변 맛집 소개 TOP
수정 : 2003.07.17 19:33 51'
◆강원도(지역번호 033)
고성군 거진항 입구의 성진식당(682-1040) 은 북어국과 생태찌개를 잘 하는 집이다. 고성 토박이이자 수산물 중매인, 건어물 판매상도 했던 김창길씨와 평창 출신의 부인 황경남씨 내외가 운영한다. 거진항에서 추운 겨울에 잘 말려놓았다가 냉장고에 보관해두는 북어로 해장국을 끓여낸다.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며 밑반찬으로 6가지가 나온다. 술꾼들에게는 대환영을 받는 메뉴로 1그릇에 4000원.
화진포해수욕장 가는 길의 화진포막국수(682-4487) 는 100% 메밀로 만든 국수를 동치미 국물에 말아내 시원하고 뒷맛이 깔끔하다. 1그릇 5000원.
속초 대포항 위쪽의 외옹치항은 속초 주민들이 즐겨찾는 곳. 청이횟집(635-3318) 등 10여개 횟집이 영업 중. 요즘에는 ‘떡마리미’라는 이름의 생선이 제철이다. 정치망 어장에서 잡히는 자연산 횟감으로 1마리 2kg짜리가 6만원.
주문진항 어판장 맞은편의 주문진생선회센터 건물 1층에 자리한 뽀빠이횟집(661-9898)은 물회로 소문난 집이다. 주문진 토박이인 김남진씨가 주방을 책임지고 있다. 돌삼치, 전복치 등 도시인들로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잡어를 사용한 물회가 좋다. 값은 각각 1만원.
연곡해수욕장 연곡횟집(662-7979) 은 회에 딸려나오는 곁음식과 밑반찬이 푸짐하다. 해안도로가 90도로 꺾어지는 지점에 위치, 방안 어디에서건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회를 맛볼 수 있다.
강릉시 경포도립공원 내의 음식점은 대략 200여개. 그 중에서도 호텔현대 경포대 인근 바닷가에 자리한 원주횟집(644-2475)은 호텔 직원들이 추천하는 맛집으로 2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모듬회가 5만~7만원선. 강문동 강문해수욕장의 원조바다도매횟집(652-1064)은 우럭미역국을 잘 한다. 1인분 8000원~1만원선. 홍서범, 김종서, 문희옥 등 연예인 단골이 많은 집이다.
동해시 묵호동 부흥횟집(531-5209), 대진어촌계회센터(534-6668) 도 이름이 있고 삼척항 횟집촌에 자리한 평남횟집(572-8550) 은 대를 이은 맛집. 주인은 고깃배 입항 시간에 맞춰 나가서 싱싱한 횟감을 구입해 온다. 목선 모양의 접시에 담겨 나오는 회는 푸짐하다. 모듬회 4만~15만원. 삼척시내에서 해물탕이 입맛에 당긴다면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의 남양동 남해해물탕(572-0980) 을 찾아간다. 솥 크기에 따라 1만5000원~3만5000원.
◆경북(지역번호 054)
영덕군 축산면 축산항 용궁회타운(732-4338) 은 농어, 참돔 등 고급 어종의 회를 비롯해서 잡어를 가미한 모듬회 등을 내놓으며 해삼과 소라 등등이 미식가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모듬회는 4만~6만원. 축산항 북쪽, 대진항 인근 대진횟집(732-0046) 은 자연산 도다리나 산 오징어로 물회를 맛깔스럽게 차려준다. 고객 취향에 따라 도다리 반, 오징어 반을 섞기도 한다. 밥을 포함 1인분 값은 1만원. 주인이 집에서 담근 고추장으로 맛을 낸다. 12년 전부터 영업중이다. 영덕읍 우곡리의 동해별미식당(733-0292) 은 대구탕과 영덕대게탕 전문집이다.
포항시 청림동 중앙의원 앞의 월성식당(292-1335) 은 물텀벙이탕 전문집. 물텀벙이의 본명은 물메기. 2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주인은 매일 죽도시장에서 식재료를 구입해온다. 물텀벙이는 큰 것일수록 좋은 맛을 내며 오래 끓일수록 진한 맛이 우러나온다. 6천원.
경주시 감포읍 전촌리 바닷가로 나가면 장진마을 포구가 나온다. 경주시 지정 횟집단지라는 안내판에서 볼 수 있듯이 별미촌으로 자리잡았다. 수도회식당(775-3072), 동은활어회직판장(775-1406) 등 20개 정도의 횟집이 있다. 요즘은 자연산 참가자미가 제철로 4만~6만원이다.(글·사진=유연태 여행PD firstname.lastname@example.org)
더위에 지친 가족위한 여름별미 TOP
입력 : 2003.07.17 14:41 53' / 수정 : 2003.07.17 17:02 58'
삼복(三伏)이 들어 있는 한여름이 되면 대보름에 더위를 몇 번씩 팔았어도 견디기 힘든 건 매한가지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더위가 한창일 때 가족의 건강을 걱정하는 안주인의 마음은 한결같다. 이럴 때 저렴한 가격이나 다양한 조리법으로 늘 서민들의 식탁을 지켜온 보양식으 로 삼계탕을 빼놓을 수 없다.
닭은 삼복을 즈음해서 그 값이 뛰기는 하지만 맛이나 효용면에서 그 가치를 톡톡히 해내는데, 아마 이보다 더 좋은 맛과 쉬운 조리법을 가진 보양식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린 시절, 작은 드럼통을 잘라 만든 화덕에 불을 때서 끓여 주던 어머니의 삼계탕, 세월이 가 도 잊을 수 없는 그 맛을 재현해서 올여름을 탈없이 넘겨보자. 집에서 삼계탕 만드는 법을 소개 한다.
우선 깊은 맛을 내는 삼계탕을 만들기 위해서는 되도록 토종 삼계닭을 구하는 게 가장 중요하 다. 부재료로는 인삼이나 황기, 불린 찹쌀, 통마늘, 생강 약간, 말린 밤, 대추 등이 필요하다.
삼계탕의 맛은 고기와 함께 특별한 국물 맛이 비법이다. 뱃속에 이런저런 재료를 넣고 끓여 봐 야 구수한 국물이 우러나오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특별한 삼계탕의 국물을 내기 위해서는 육수 를 따로 마련하는 게 좋다.
이때 여분의 닭 한 마리로 국물을 내기도 하지만 보다 경제적이면서도 구수한 국물 맛을 내기 위 한 방법이 있다. 시장의 닭집에서 볼 수 있는 닭발로 끓이는 것이다. 손질하기가 만만치 않은 닭 발은 끓는 물에 데쳐서 그 겉의 노란 껍질과 발톱을 깨끗이 다듬어야 닭 특유의 노린내를 없앨 수 있다. 잘 손질한 닭발은 바락바락 주물러 충분한 양의 물에 양파와 마늘·생강을 넣고 뽀얀 국 물을 우려낸다.
이 국물에 준비한 삼계닭을 넣고 고기가 익을 정도로만 끓여 주면 국물은 국물대로 맛있고 살도 너무 무르지 않은 맛있는 삼계탕을 먹을 수 있다. 이때 처음부터 불린 찹쌀을 국물에 두어 수저 넣어 끓이면 더 맛있고 입에 착 붙는 국물을 얻을 수 있다. 이때 전라도식으로 불린 녹두를 넣 어 끓이면 녹두의 구수한 맛과 해독 작용을 기대할 수 있고, 이렇게 끓인 삼계탕 한 그릇은 유난 히 더울 거라는 올여름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맛이다. 구수한 국물 맛이 특별한 삼계탕 한 그 릇, 칼칼한 맛의 날배추 겉절이 한 접시, 애주가라면 이때 반주로 곁들이는 인삼주 한 잔을 빼놓 을 수 없다.
▒▒국물이 특별한 삼계탕▒▒
* 재료(4인가족 기준)
영계 3마리, 수삼3년생 3뿌리(머리부분은 잘라낸다), 말린 밤 6개, 대추 6 개, 통마늘 6개, 불린 찹쌀 1/2컵, 불린 녹두 1/2컵, 소금, 후추, 송송 썬 실파 적당량, 닭육수 3ℓ(국물용 재료:닭발 15개나 중닭 1마리, 통마늘 3알, 생강 1쪽, 대추 3알, 물4ℓ)
* 만드는 법
1.삼계탕용 닭은 내장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후 뱃속에 불린 찹쌀, 밤, 대추, 통마늘, 수삼 1 뿌리를 넣고 한쪽 다리에 칼집을 넣어 남은 다리를 엇갈리게 끼워 찹쌀 등 소(속 재료)가 빠지 지 않게 한다.
2.준비된 국물용 재료를 찬물부터 다 넣어 1시간 정도 푹 끓여 맛있는 국물을 낸다.
3.냄비에 육수와 준비한 삼계탕을 넣고 고기와 뱃속의 찹쌀이 익도록 끓인다.
4.익은 닭을 꺼내고 남은 국물에 불린 찹쌀 남은 것과 불린 녹두를 넣고 퍼지도록 끓여 국물을 낸다.
5.완성된 국물에 영계를 넣고 다시 한번 어우러지도록 끓여 소금과 후추, 송송 썬 파를 곁들여 낸다.
▒▒날배추 겉절이▒▒
*재료
알배추 400g, 실파 80g, 다진 마늘 1큰술, 다진 생강 1/2큰술, 멸치액젓 2큰술, 밥 갈은 것 3큰술, 홍고추 간 것 1/2컵, 설탕 2큰술, 고운 고춧가루 1큰술, 굵은 고춧가루 1큰술, 무채 100g
*만드는 법
1.배추는 중간 정도의 속알 배추를 준비한 후 길이로 길게 썬다.
2.실파는 3㎝ 정도로 자르고 무채에 고춧가루와 나머지 양념을 넣어 잘 버무린다.
3.넓은 그릇에 배추와 양념 실파를 넣고 살살 버무려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아낸다.
▒칼칼한 고추기름소스가 어울리는 해산물 냉채▒
삼계탕으로 몸보신한 저녁, 평상에 앉아 별을 보며 곁들이는 맥주 한잔, 이때 어울리는 안주로 땅콩이나 마른 오징어보다는 싱싱한 해산물을 데쳐 고추기름으로 무쳐 내는 콩나물냉채는 어떨 까? 일상적인 재료 콩나물은 무쳐 먹거나 국거리로 애용하는데 머리와 꼬리를 떼어 냉채에 섞으 면 그 씹는 맛이 아작아작한 게 별미다.
내장을 빼고 껍질째 데친 대하, 역시 껍질째 데쳐 얇게 썬 쫄깃쫄깃한 참소라살, 데쳐서 얇게 썬 한치살, 이런저런 해물과 어울리는 소스로는 칼칼한 고추기름으로 만든 소스가 좋다. 파·마늘 ·생강을 볶다가 끓인 기름에 고춧가루를 불려 거른 고추기름이 그 맛을 좌우한다.
새콤달콤한 소스에 차게 준비한 해물을 무쳐 내도 좋고, 넓은 접시에 고루 담아 소스를 곁들여 내도 좋은 해산물 냉채는 풍부한 영양가를 가지고 있는 해산물 요리다. 이번에는 칼칼한 고추기 름 소스로 버무려 내는 새로움을 만나보자.
* 재료
머리 꼬리 뗀 콩나물 300g, 홍피망 1/2개, 청피망 1/2개, 대하 5마리, 참소라살 5마리, * 한치 3마리, 닭가슴살 100g, 팽이버섯 1/2봉, 특수야채 적당량(소스:간장 3큰술, 2배식초 3큰 술, 설탕 5큰술, 다진 마늘 2큰술, 소금 1/2작은술, 고추기름 3큰술, 레몬 1/4개, 참기름 1큰술)
*만드는 법
1.콩나물은 머리와 꼬리를 뗀 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물기를 뺀 후 냉장고에서 얼른 식힌다.
2.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닭가슴살, 껍질 벗긴 한치, 내장을 뺀 대하, 참소라살을 차례로 데쳐 얼른 식힌다.
3.데친 한치는 몸통만 곱게 채 썰고 참소라살과 대하, 닭가슴살 데친 것은 적당한 크기로 썬다. 4.오이는 칼로 껍질을 듬성듬성 벗긴 후 길이로 곱게 썰어 얼음물에 담갔다가 물기를 뺀다. 5.모든 재료를 차게한 후 잘 섞어, 먹기 직전에 소스를 얹어 낸다. (박종숙·한식요리연구가·샘표식품 미각향상 고문)
입력 : 2003.07.10 10:47 40' / 수정 : 2003.07.10 17:21 08'
북한산은 명산이다. 평일에도 수만명이 찾는, 서울 시민 최고의 명소다. 연평균 탐방객 500만명. 기네스북에는 1㎢당 탐방 밀도 세계 최고(5만8000명)로 기록돼 있다. 북한산 탐방에는 계절별 편차도 별로 없다.
북한산을 오르는 사람은 금방 그 아름다움에 빠지고 만다. 처음 오르는 사람은 처음 오르는 대로, 수십년 거듭 오르는 사람은 또 그들대로 북한산을 찬양한다. 이 땅의 내로라하는 명산대첩은 물론, 지구촌 곳곳의 이름난 산악 몇 군데쯤은 직접 본 사람들도 북한산의 아름다움을 거듭 말한다. 그 아름다움의 비밀을 어느 예술가는 이렇게 말한다.
“동양화에서 산이나 바위의 입체감과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기법을 준법(峻法)이라 하는데, 모두 20가지가 넘는다. 그런데 그 준법을 구사할 대상을 모두 갖춘 산이 북한산이다.”
한강이 서울의 젖줄이라면 북한산은 숨통이다. 한강 이북의 서울과 경기 지역에 북한산의 산줄기는 넓고 깊게 뻗어 있다. 서울과 경기도 의정부시, 고양시, 양주군에 걸쳐 있는 북한산국립공원은 중부 지역 시민들의 더 없는 휴식처다. 휴일, 가족들 손을 잡고 북한산에 올라보자.
◆우이령을 경계로 북한·도봉산 나뉘어
북한산 국립공원은 우이령을 경계로 크게 북한산과 도봉산으로 나뉜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도 북한산파와 도봉산파가 있을 정도로 두 산은 쌍벽을 이룬다.
체력에 자신있는 사람이라면 5~7시간이 걸리는 북한산 주 능선이나 도봉산 주 능선 주파에 도전해 보자. 혹은 7~8시간 소요되는 북한산성 열두 대문 순례코스를 택할 수도 있다. 유사시에 왕이 도성에 있는 왕궁을 버리고 피란하는 행궁(行宮)을 지키기 위한 성이었던 북한산성의 유적지를 감상하면서 아기자기한 바윗길 산행의 묘미도 맛볼 수 있다.
◆식물관찰·역사소개 등 두시간까지 탐방코스
어린이를 둔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끼리 가볍게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라면 삼천사 코스, 용추계곡 코스, 무수골 코스 등 짧고, 비교적 호젓한 코스를 택하는 것도 좋다. 혹은 북한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추천하는 약 2시간짜리의 탐방코스를 돌면서 동·식물을 관찰하거나 자연생태해설을 듣든지, 역사문화해설을 듣는 것도 뜻 깊다.(김승진·월간산 부장 email@example.com) (김왕근 기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북한산 7시간 종주코스와 2시간 탐방코스 TOP
입력 : 2003.07.10 10:54 09'
▲문수봉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이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 보면서 쉬고 있다. /이덕훈기자
북한산은 남북으로 주능선이 길게 뻗어 있고 중간에 형성된 계곡과 지능선마다 수많은 갈래길이 있기 때문에 코스도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코스를 정리해본다.
◆북한산 백운대 코스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로 오르는 코스는 많다. 그 중 산중턱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한 우이동 기점 코스는 휴일마다 체증현상을 빚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도선사 주차장을 출발, 도선사 매표소~도선사~용암문~만경대~노적봉사잇길~위문~백운대~위문~백운산장~인수산장~하루재~도선사 주차장 방향으로 잡는 게 바람직하다.
오랜 역사의 북한산성 성곽과 성문의 모습을 엿본 다음 백운대를 비롯해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 염초봉, 의상봉 등 북한산을 대표하는 암봉들의 위압적인 면모와 멀리 서해 바다까지 둘러볼 수 있는 코스다. 용암문과 위문 사이의 벼랑길과 위문~백운대 구간에는 와이어로프 안전시설이 설치돼 있지만, 바위면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야 한다(약 4시간 소요).
◆도봉산 신선대 코스
도봉산 정상인 자운봉은 독립 암봉으로 전문 등반장비와 암벽등반 기술이 없으면 오를 수 없다. 건너편 주능선 상의 신선대가 도보 산행객들의 최고 도달지점이다. 신선대로 오르는 코스 역시 교통이 편리한 도봉유원지 원점회귀형 코스가 가장 인기 높다.
대다수가 도봉매표소~도봉서원~도봉산장~산악구조대~신선대 코스를 왕복하는 것으로 산행을 끝내지만, 그보다는 도봉산장에서 만월암~포대능선~신선대~산악구조대~도봉산장 코스를 원점회귀형으로 도는 것이 덜 지루하다. 도봉산 산세 감상과 더불어 짜릿한 바윗길 산행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포대능선 구간은 두 사람이 교행하기 힘들 정도로 좁으므로 피크 타임(12:00~14:00)에는 피하는 게 현명하다(약 5시간 소요).
◆짧고 호젓한 원점회귀형 코스
북한산이나 도봉산에서 호젓한 산행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과다한 욕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천사 코스, 송추계곡 코스, 무수골 코스는 비교적 호젓한 코스가 될 수 있다.
삼천사 코스는 삼천사 매표소(은평구 진관내동)~삼천사~문수봉·승가봉 사이 삼거리(주능선)~사모바위 직전 삼거리~삼천사계곡을 경유해 다시 삼천사로 하산하는 코스로, 약 3시간이 소요된다. 주능선에서의 혼잡만 감수하면 된다.
송추계곡 코스는 송추분소(양주군 장흥면)~사패산 남쪽 고개~포대능선~신선대~오봉 사거리~오봉능선 상 삼거리~송추폭포~송추계곡을 경유해 다시 송추분소로 내려선다(약 3시간30분 소요). 또는 오봉 사거리에서 오봉 제1봉까지 가서 송추남능선을 타고 오봉매표소까지 내려서는 것도 괜찮다. 이 코스 역시 주능선 상의 포대능선~신선대~오봉 사거리 구간에서의 혼잡만 감수하면 나머지 구간에서 호젓한 산행을 만끽할 수 있다.
무수골 코스는 무수골 매표소(도봉구 도봉동)에서 계곡을 타고 원통사로 오른 다음 주능선 상의 우이암에서 보문능선을 타고 도봉 매표소로 내려서는 코스다(약 2시간30분 소요).
모든 구간을 호젓한 코스로 구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한두 구간 정도는 호젓한 구간으로, 나머지는 일반 등산로를 따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런 구간으로는 ▲진관사계곡(은평구 진관내동)~비봉, ▲백화사(고양시 효자동)~가사당암문, ▲밤골 매표소(효자동)~백운대·숨은벽 사이 계곡, ▲안말 매표소(의정부시 호원동)~원효사~포대능선, ▲다락원 매표소(의정부시 장암동)~은석암~다락능선 등이 있다.
◆북한산 능선 종주 코스
북한산 주능선 종주 코스는 구기동이나 정릉에서 출발해 대성문을 거쳐 산성주능선을 타고 백운대로 잇거나(약 5시간 소요), 홍은동에서 출발해 탕춘대능선과 비봉능선을 추가해 백운대로 잇는다(약 7시간 소요).
◆북한산성 열두대문 코스
주능선 종주 코스 만큼이나 인기를 끄는 코스로 북한산성 열두대문 순례코스를 꼽을 수 있다. 북한산성 매표소를 출발, 대서문~의상봉~가사당암문~용혈봉~부왕동암문~나한봉~청수동암문~대남문~대성문~보국문~대동문~동장대~용암문~위문으로 이어지는 이 코스는 600여년 역사의 북한산성을 경유하며 북한산의 안팎을 두루 둘러보고, 아기자기한 바윗길 산행의 묘미도 맛볼 수 있다.
용암문~용암봉~만경대~위문의 암릉 구간과, 백운대~염초봉~북문~원효봉~서암문(시구문)의 암릉 구간까지 이어야 완벽한 열두대문 순례코스가 되지만, 암릉등반 기술과 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위험하기에 대개 위문에서 대서문이나 우이동으로 내려선다(약 7~8시간 소요).
◆도봉산 능선 종주 코스
도봉산 능선은 사패산~포대능선~신선대~우이남능선으로 이어진다. 일단 사패산으로 오르려면 안골 매표소, 사패산 매표소, 범골 매표소를 이용해 산으로 들어선 다음, 포대능선을 향해 남진한다. 사패산을 생략하고 바로 사패산 남쪽 고개로 오르려면 송추계곡 코스나 회룡골 코스로 오른다.
이어 아기자기한 암릉 구간인 포대능선을 통해 신선대에 오른 다음 계속 이어지는 암릉을 따라 오봉 삼거리를 거쳐 우이암에 닿으면 계속 암릉을 따르거나 원통사 사면길을 이용해 우이동으로 내려선다(약 6시간 소요).
◆관리사무소 추천 탐방코스
북한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산악 환경의 특색을 살려 환경해설 탐방코스(약 2시간 소요)를 마련해 놓았다. 방학을 맞아 자녀들과 이 코스를 따라 테마산행에 나서는 것도 바람직하다.
탐방코스는 ▲생물관찰=소귀천계곡~진달래능선(수요일 오전 10시) ▲식물·곤충 관찰=정릉계곡(토·일요일 오전 10시) ▲조류관찰=구기동계곡(금요일 오전 10시) ▲생태계관찰(해설판 위주)=도봉산 매표소 부근(토요일 오전 10시) ▲자연생태해설 =북한산성(토요일 오전 10시) ▲역사문화해설=북한산성(토요일 오후 1시)으로, 참가비는 없고 공원 입장료(일반 1300원, 중고생 600원, 초등학생 300원)만 내면 된다. 매회 코스별 20명 안팎으로 인원을 제한한다. 접수와 문의는 북한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보전과(02-909-0498) 및 북한산성분소(02-357-9698).(한필석·월간산 기자 email@example.com)
“하산길 피로 푼다” 북한산 맛집·온천 TOP
입력 : 2003.07.10 11:01 09' / 수정 : 2003.07.10 11:05 01'
▲ 옛날 민속집의 모듬 손두부.
북한산·도봉산 자락에는 미각을 즐겁게 하는 맛집들이 즐비하다. 또 산행 후에 목욕을 즐길 수 있는 온천 및 사우나도 있다.
■구기동 코스
옛날민속집(02-379-6100) 전두환 김영삼씨 등 전직 대통령들도 들를 만큼 유명한 집. 집에서 직접 만든 모듬손두부 한 쟁반 3000원. 한방제육보쌈 1만~1만9000원.
산가(山家 02-385-2196) "맛으로 승부를 건다"는 갈비 전문점. 제주토종흑돼지(200g), 한방돼지갈비(250g) 각 7000원. 왕갈비(1대 300g) 1만6000원. 냉면 5000원.
팔각정 숯불갈비(02-354-4440) 국립공원 매표소 앞쪽 상가마을의 팔각정에 위치. 산사랑(02-382-4440) 이라는 민속주점과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같은 건물에서 영업 중이다.
금강산장(02-389-0123) 대서문을 거치는 산행에서는 필연적으로 지나게 되는 집. 주인 이남해씨가 어렸을 때 이승만 대통령도 다녀갔다고 한다. 대서문에서 백운대로 오르는 길 1.5km지점 등운각(보리사) 앞쪽에 있다.
계곡산장(031-826-4046) 송추계곡 2.5km의 계곡가에서 영업하는 70여개의 음식점 중에서 대표 격. 송이 능이 사리 청 밤 표고버섯 등 자연산 버섯들을 한없이 채취하여 마음껏 요리를 할 수 있었다는 강필순 할머니가 지금도 옛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원도봉코스
진고개(031-873-2585) 산자락 음식점의 전형을 깨고 한정식전문점으로 출발했다. 돌솥밥 한정식이 1만원(2인 기준으로 상차림). 산행하는 사람들만이 아니고 의정부와 멀리 서울에서도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고 한다. 식당이용 손님들에게는 국립공원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의정부 시내나 전철역 닿는 곳까지 교통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다. 식당 마당에서 아름다운 도봉 능선을 바라볼 수 있다.
이 외에 전철역 1호선 망월사역에 내려 도봉산으로 접어 들면 지난 3월 문을 연 ‘산악인 엄홍길전시관’과 바로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오봉(031-876-4733) 원도봉산(031-873-7830) 양지뜰(031-872-0926) 덕수쌈밥해장국(031-872-63380) 등의 식당들이 늘어 서 있다. 만두버섯전골과 의정부찌개를 먹을 수 있고 감자탕도 먹을 수 있다. 양지뜰은 최근에 문을 연 깔끔한 토속음식전문점이다.
콩사랑 충청식당(02-955-6016) ‘도봉산 콩사랑’으로 통칭되는 이 집은 도봉산 하산길의 하산주 한잔과 해단식의 명소다. 하얀색과 검정색, 파란색과 빨간색 4가지 색깔의 두부를 쟁반에 담고 동동주 한잔에 ‘곤드레 만드레’를 외치는 산꾼들의 모습이 정겹다. 순두부찌개 1인 4000원. 두부보쌈 1만5000원.
도봉공원(02-956-0180 도봉산 자락에서 규모가 가장 큰 오랜 전통의 집. 도봉매표소 안쪽에 위치, 업소를 이용하는 고객들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5000원짜리 냉면부터 값싼 대중음식들을 훌륭한 시설의 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 옆, 맑은 물 계곡가에는 유서 깊은 정자 가학루(駕鶴樓)가 있다.
■우이동코스
산과 사람들(02-998-7722) 쎄로또레등산아카데미 이규태 원장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식당을 겸한 문화공간이다. 건강등산교실 등 각종 등산 관련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으며, 산사람들의 각종 모임이나 단체행사가 열린다. 책과 비디오, 옛날 등산장비와 최신 암벽장비가 전시되어 있고 멋진 산사진들이 걸려 있다. 이 집에서 조리하는 음식도 있고 이웃 식당에서 만드는 어느 음식이나 주문해서 한자리에서 먹을 수도 있다. 하산길에 들러 시원한 생맥주 한 잔도 할 수 있다. 버스종점에서 위쪽 200m 지점에 위치.
황성(02-992-0846) 5000원짜리 자장면부터 시작되는 값싼 음식들을 고급스런 분위기에서 먹을 수 있다. 4·19탑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넓은 공간의 식당이다.
백운산장(02-904-0909) 이영구씨 집안에서 3대째 관리해오고 있는 산장다운 산장이다. 국수나 두부로 요기를 할 수 있고 잠도 잘 수 있다. 전화번호 영구영구(0909)는 70평생 이 산장을 지켜오며 수많은 구조활동을 해 온 이영구씨의 이름이다.
■온천·목욕탕
북한산 게르마늄온천(02-381-5656) 고양시 온천허가 제1호로 북한산성쪽 고양시 지축동에 있다. 게르마늄과 셀레늄 등이 함유되어 있어, 하산길을 이 코스로 선택하는 산꾼들이 많다고 한다. 온천에서는 차량지원을 해주고 있다. 입욕료 4000원
백두산랜드(02-995-7676) 우이동코스 버스종점 맞은편에 있다. 찜질방(밤시간 이용료 5000원)이 있어, 숙박비를 내지 않고 밤을 지낸 다음 이른 새벽 산행길에 나설 수도 있다. 옥상 노천탕에서 바라다 보는 북한산 정상부가 절경.
도봉산 싱싱목욕탕(02-3491-8883) 도봉산 식당가 한편, 버스 종점 넓은 주차장에 인접해 있다. 입욕료 3500원. (박재곤·산악인. ‘산따라 맛따라’ 저자 firstname.lastname@example.org)
사랑 고백·다이어트·더위 탈출·경품…
입력:2003.07.10 11:05 11'/수정:2003.07.11 17:05 47'
“우리 주말에 어디 놀러 갈까?”
샐러리맨인 공 차장은 오랜 만에 가족들이 다 모인 금요일 저녁 식탁에서 ‘가족 나들이’ 제안을 했다. 하지만 부인 구 여사는 물론, 대학 다니는 아들과 고교생 딸, 누구도 이렇다 할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다. 머쓱해진 공 차장.
스트레스도 풀 겸 근무를 마친 토요일 오후 혼자 집 근처 야구장에 갔다. 같은 날, 구 여사는 “살림을 장만할 수 있다”는 옆집 부인네의 말에 솔깃해져 난생 처음 야구장으로 따라나섰다. 공 차장의 아들은 여자 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딸은 ‘다이어트’를 하려고 표를 샀다. 각자 딴 마음을 먹고 찾은 야구장. 거기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뜨거운 열기, 시원한 플레이
“딱!” “와!” 경쾌한 소리와 함께 포물선을 그리는 하얀 공. 파란 하늘, 녹색 잔디와 멋지게 어우러진다. 신나게 소리를 지르니 가슴 속 응어리가 확 풀어져 내린다. 공 차장이 앉은 1루 내야석 중간쯤엔 오늘 따라 파울볼도 자주 날아든다. 아무래도 홈런공만 기다려야 하는 외야 관중석보다는 자리가 좋은 것 같다. ‘공짜 공’ 하나에 탐을 내며 앉았다 일어났다 하다 보니 기분은 어느 새 동심. 차가운 생맥주 한 잔을 사 들고 포수 뒤편의 3층으로 자리를 옮겨봤다. 그라운드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와 즐거웠다.
◆경품, 경품, 경품
구 여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기 자체도 TV중계보다 훨씬 박진감 있는 데다, 팬 서비스도 무척 많았다. 화장품세트, 의류상품권, DVD플레이어, 여행권, 대형TV, 학용품까지…. 선물을 타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입장권 행운번호나 선착순, 관중을 대상으로 한 게임 등을 통해 재미와 함께 실속을 차릴 수 있었다. 특히 홈 팀의 마스코트들이 휴대용 대포(에어건)에 티셔츠나 인형을 넣어 관중석에 쏘아대는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신세대인 옆집 부인은 이번에도 네 살난 아이를 경기장 내 유아방에 맡겼다(잠실·문학).
◆내 사랑 고백은 다르지
얼마전 애인과 다툰 공 군은 여자친구를 야구장으로 부른 뒤 응원단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5회가 끝나자 전광판에는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라는 글과 함께 공 군의 얼굴이 떴다. 관중의 큰 박수에 용기를 얻은 공 군은 여자 친구에게 꽃다발과 함께 사랑의 고백을 건넸다(전 구장). 홈 팀 응원단 근처는 구장 내 카메라에 자주 잡히는 명당. 연인처럼 보인다면 ‘공개 키스’ 이벤트의 후보가 되기 딱 좋다. 공 군은 경기장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스카이 카페에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이어갔다(문학).
◆응원하면 살이 빠진다고? 공 양은 친구와 함께 늘씬한 치어리더의 율동에 맞춰 신나게 춤을 췄다. 입시공부 때문에 불어난 허리와 엉덩이 살이 쪽 빠지는 느낌이었다. 아예 댄스왕 선발대회에 나가면 돈 들이지 않고 몸매를 가꾸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사직). 훌라후프 돌리기, 릴레이, 야구공 멀리 던지기(대전) 역시 훌륭한 운동이 된다. 땀을 식힌 공 양은 평소 짝사랑하던 선수를 가까이서 보려고 1루(혹은 3루) 불펜 바로 옆 내야석으로 내려갔다. 연습 중인 선수들에게 말도 걸어보고,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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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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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1875
|
카렐리야어
|사용 국가||러시아, 핀란드|
|사용 지역||카렐리야, 트베리 주[1]|
|언어 인구||118,000여 명|
|문자||로마자|
|언어 계통||우랄어족
핀우그리아어파
발트핀어
카렐리야어
|언어 부호|
|ISO 639-1||—|
|ISO 639-2||krl|
|ISO 639-3||krl
카렐리야어(카렐리야어: karjala)는 핀란드어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핀우그리아어파 언어 변종(linguistic variety)이다. 표준 핀란드어와의 중대한 차이점은 표준 핀란드어에 없는 음운이 여럿 있다는 점과 19세기와 20세기 핀란드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카렐리야어의 표준어는 없고 글로 쓰는 이마다 각자의 방언을 쓴다. 적는 데 사용하는 문자는 핀란드어에서 쓰는 로마 문자에 몇 글자를 더한 것이다.
이 문서는 러시아령 카렐리야 공화국에서 쓰이는 언어형을 주로 다룬다. 핀란드에서는 보통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카렐리야 지협을 비롯한 옛 핀란드령 카렐리야가 소비에트 연방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새 국경을 넘어 핀란드로 이주한 이 지역의 카렐리야인 난민 42만명의 방언을 카렐리야어라고 한다. 이 방언들은 본토 핀란드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는 17세기 당시 핀란드를 지배하던 스웨덴이 잉그리아(Ingria)까지 확장하면서 특히 사보 지방의 핀란드인들이 이들 지역에 많이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카렐리야라도 러시아 정교회권인 러시아령 카렐리야와 루터교권인 핀란드령 카렐리야 사이의 언어학적 경계는 같은 루터교권인 핀란드의 사보와 핀란드령 카렐리야 사이의 언어학적 차이보다 아마 더 뚜렷했을 것이다. 오늘날 이들 방언들은 카렐리야인 난민 대부분이 정착한 핀란드의 남카렐리야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5개의 방언으로 나뉘어 있다.
독립된 언어? 방언?[편집]
일찍이 일부 핀란드 언어학자들은 카렐리야어를 핀란드어의 방언으로 분류하였다. 오늘날에도 러시아의 카렐리야 공화국에서는 카렐리야어를 핀란드어의 방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언어학적으로 보통 동카렐리야에서 사용되는 카렐리야어는 독립된 언어로 분류한다. 음운과 어휘의 차이로 인해 핀란드어와 이 지방의 카렐리야어 사이는 서로 정확한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
반면 핀란드의 남카렐리야 지역에서 쓰이는 방언은 핀란드어의 동남부 방언의 일부로 분류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옛 핀란드령 카렐리야에서 쓰이던 방언도 마찬가지로 핀란드어의 방언으로 분류되는데, '카렐리야 방언'이라 이르기도 한다.
문자[편집]
지금은 라틴 문자를 사용한다.
|A a||B b||Č č||D d||E e||F f||G g|
|H h||I i||J j||K k||L l||M m||N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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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르(Dakar, 문화어: 다까르)는 세네갈의 수도로 인구 207만9,000명(2000년)이 거주하고 있다. 대서양에 접해 있는 무역항이다. 아프리카의 최서단에 위치해 있고 대서양 횡단 무역 및 유럽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중요한 항만이다.
다카르는 프랑스에 의해 도시를 이루었다. 1902년에 생루이로 바뀌었고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수도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중 세네갈 식민지는 비시 정부에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1940년 9월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이 다카르를 공격했지만, 실패에 끝났던 적이 있다(다카르 해전). 1959년부터 1960년동안 말리 연방의 수도가 되었다. 후에 세네갈의 수도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유럽풍의 아름다운 시가가 있다. 3대륙의 십자로에 위치하여 해·공 교통의 요충이 되어 있다. 수에즈 운하 봉쇄 후에는 특히 케이프타운을 회항하는 선박들이 보급을 위해 많이 기항하고 있다.검은 아프리카 연구의 중심지로 다카르대학이 있고, 항구 밖의 골레 섬에는 노예 수용소 자리가 있다. 세네갈 강하류의 상루이는 18세기까지 무역 근거지로서 발전한 거리로 인구는 120만이다. [1]
다카르 랠리의 종착점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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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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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騎士)는 중세 유럽 때부터 기마로 싸우는 전사에게 주는 명예 칭호 및 그로부터 파생한 계급을 가리킨다. 기사는 분류상 귀족이지만 귀족 중에는 최하급 귀족에 속하며 흔히 부르는 귀족은 기사보다 상위의 귀족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단순히 명예칭호에 불과하며 칭호 뿐인 기사를 명예기사라고 부른다(이외의 기마부대에 대해서는 기병을 참조하라). 기사는 정말 초하급 귀족이며 평민이 기사가 되는 일도 있다. 기사는 기사가 되려면 7살부터 기사 훈련을 받아야 하며 14살이 되면 무기를 옮기거나 하는 심부름을 받게 된다. 21살이 되면 기사직위를 얻는데 칼로 어깨와 머리 위를 한번씩 대는 것이 기사가 되는 의식이다. 그러나 총과 대포가 등장하게 되면서 기사는 몰락했다.중세에 활동한 초기 기사들은 직업적인 기마전사들로서 일부는 영주에게서 봉토(封土)를 받고 군역(軍役)의무를 제공하던 봉신들이었으며 봉토를 받지 못한 기사들도 있었다. 기사들은 모두 자유민이었으나 항상 자유민만이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사제도가 가장 성행했던 11~12세기에는 봉토수여는 기사작위를 받는 것과 꼭 관련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의 봉사).Nyle Malik
기사가 되기까지[편집]
기사가 되는 과정은 거의 일정했다. 장차 기사가 될 소년은 7세 때부터 기사수업을 시작해 시동(侍童)으로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궂은 일을 했고, 대략 12세 쯤에는 군사수업을 포함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은 수련을 쌓기 위해 아버지가 섬기는 영주의 집에서 일을 했다. 이런 수련을 받는 소년을 가리켜 다무아조(damoiseau:'소공자'를 뜻함) 또는 발레(valet:독일어로는 Knappe)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그뒤에는 후원자를 따라 전장에 나가 그의 에퀴예(ecuyer:방패잡이꾼 또는 종자)로 일하거나 무기를 소지하고 다녔다(armiger). 그러다가 능력이 있다는 판정을 받고 기사가 갖춰야 할 장비를 살 자금 을 마련하면 기사작위를 받았다. 작위수여식은 형식상에 큰 차이가 있었다. 대축제일 또는 왕실에서 작위식을 올릴 때는 굉장히 공들여 의식을 치렀던 것 같으나 전쟁터에서는 간단하게 행했다. 그리고 수여식을 받는 기사는 자기가 원하는 의식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칼을 편편하게 뉘어 어깨에 가볍게 대는 방식을 썼는데 이 방법은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
활동[편집]
기사제도가 발전하면서 기독교 세계에서는 교회를 존경하고 영주와 군대의 상관에게 충성하며 자기 명예를 지키는 이라는 이상적인 기사상(騎士像)이 널리 퍼졌다. 이런 이상에 가까운 기사들이 나타난 것은 11세기말부터 유럽 기독교 세계의 기사들이 교회를 보호한다는 공동 대의 아래 모였던 십자군전쟁 때였다. 예수의 무덤에서 작위수여식을 치른 기사를 성묘기사(Knights of the Holy Sepulchre)라 불렀다. 십자군전쟁 때 최초의 기사단들, 즉 예루살렘의 구호기사단과 성전(聖殿)기사단이 생겼고 이보다 좀 뒤에는 나병환자 병원을 지키는 특별임무를 맡은 성(聖) 라자루스 기사단이 조직되었다. 이 기사단들은 그 목적이나 형태로 볼 때 종교적·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기사들은 독신생활을 했고 위계질서를 갖추고 있어 기사단은 교회의 직제(職制)를 그대로 본떠 기사단장과 관구장(官區長)을 비롯해 수도원장·분단장·일반기사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기사단의 기사 수와 재물이 늘어남에 따라 얼마 안가서 그들은 종교적 목적은 제쳐두고 정치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국가적인 문제에 더 비중을 둔 십자군 기사단들이 나타났다.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국에서는 이슬람교도와 싸우고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목적 아래 1156~71년에 칼라트라바·알칸타라·산티아고(성 야코부스) 등의 기사단이 각각 생겨났고 같은 시기에 포르투갈에서는 아비스 기사단이 조직되었다. 아라곤 왕국의 몬테사 기사단(1317)과 포르투갈의 그리스도 기사단은 성전 기사단이 해체된 뒤에야 비로소 생겨났고 독일 출신 기사들도 대규모 기사단을 조직했는데(→ 튜튼 기사단), 이런 국가편향적인 십자군 기사단들은 다른 국제적인 규모의 기사단들처럼 세속적인 입지를 넓히는 데 치중했다. 그러나 이들이 유럽에서 벌인 활동은 팔레스타인에서 벌인 국제적인 활약 못지 않게 오랫동안 해외의 기사들과 심지어는 기사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았다.
11세기말~13세기 중반에는 봉건제와 기사제도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봉건영주들은 기사들에게 봉토를 주고 보통 매년 40일 동안 군역의무를 지웠다. 이것은 왕의 영토를 지키고 봉사의무를 수행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십자군전쟁을 비롯해 백년전쟁 때 벌인 장기(長期) 침공작전처럼 잦은 장거리해외원정에는 맞지 않아 국왕이 토지보유자들에게 기사가 되라고 강요하는 일이 늘어났다. 또한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庸兵)들이 군대에 점점 많아졌으므로 과거 군대의 주류를 이루던 기사들은 소수파가 되어 일종의 장교계층과 비슷하게 되었다.
점차 십자군운동이 시들해지고, 기사들로 이루어진 기병대가 보병과 궁수(弓手)부대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하는 일이 생기는 한편 대포의 발달과 중앙집권제를 통한 왕권강화로 14~15세기에 걸쳐 전통적인 기사 제도는 무너졌다. 게다가 16세기에 들어와서는 군사적인 의미를 잃고 국왕이 마음 내킬 때 수여하는 명예 지위로 전락했다. 군주의 측근인 고위귀족들 사이에서는 이같은 명예작위를 갖는 것이 유행했다.
중세말부터 종교와 관계없는 세속적인 기사작위들이 많이 생겨 이들에게 훈장(勳章)을 주게 되었다. 이런 작위는 귀족이나 행정관리, 각종 직업과 예술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사람들에게 수여했다. 오늘날 이같은 작위는 영국의 경우 국왕과 작위를 받을 사람 모두 개인자격으로 참여하는 의식을 통해 받는 명예칭호에 불과하다. 오늘날 작위를 받는 사람이 국왕 앞에 무릎을 꿇으면 국왕은 용검(龍劍:영국 국가의식 때 국왕 앞에서 받드는 칼)을 칼집에서 뽑아 수상자의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에 차례로 가볍게 댄다. 수상자가 남자일 경우에는 이름에 '써'(Sir, 卿), 여자는 '데임'(Dame) 칭호를 붙인다.
영국 연방에서 기사작위(Knighthood·Damehood)에 해당하는 것들[편집]
- 가터 훈장
- 시슬 훈장
- 세인트패트릭 훈장
- 바스 훈장 1·2등급
- 인도성(星) 훈장 1·2등급
-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 1·2등급
- 인도 제국 훈장 1·2등급(2010년 폐지)
- 로열 빅토리아 훈장 1·2등급
- 대영 제국 훈장 1·2등급
- 오스트레일리아 훈장 기사장(1986년 폐지)
- 뉴질랜드 메리트 훈장 1·2등급
- Knight Bachelor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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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슬라브색은 슬라브족의 나라의 국기나 지역 기에 쓰이는 빨강, 하양, 파랑의 세 색을 말한다. 러시아 제국의 국기 색에서 유래했다. 19세기 범슬라브 운동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의 국기색이 슬라브족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 운동 전에 비슷한 색으로 국기를 정한 폴란드와 벨라루스 정도가 예외이다.
불가리아의 국기도 원래는 범슬라브색을 사용했으나, 1878년 독립 이후 농업 국가로 발달하면서 파랑을 녹색으로 바꾸었다.
이 세 색은 자유와 혁명의 상징으로, 슬라브족이 아닌 다른 나라, 예컨대 네덜란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국기에서도 즐겨 사용된다.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의 국기 중에도 슬라브족을 기반으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일부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 색깔을 사용하기도 한다.
범슬라브색을 사용하는 국기[편집]
범슬라브색을 사용하던 옛 국기[편집]
함께 읽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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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콥스타드
역사[편집]
대북방 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마을 대부분이 파괴되는 바람에 많은 주민들이 야콥스타드를 떠났다. 이 때 배를 갖고 있던 주민들은 바다를 건너 스웨덴에 피신했다. 배를 갖고 있지 않은 주민들은 숲이나 가까이의 섬에 도주했지만 대다수가 포로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1720년대에 주민들이 귀환했고 1731년 교회가 건설되었다. 이 때부터 타르 생산이나 담배 포장 등 담배 관련 사업의 중심지로 크게 발전했다.
19세기 전반에 일어난 스웨덴-러시아 전쟁, 1835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인해 크게 파괴되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발전은 계속 진행되었다. 1850년 이후에 맥주 양조장과 성냥 공장, 은행 등이 들어섰고 1859년에는 증기 기관을 이용한 제재소가 건설되었다. 크림 전쟁 당시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발트 해 봉쇄의 영향으로 인해 조선업과 무역에서 큰 손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비에트 연방 군대의 폭격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6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스웨덴어를 구사하는 주민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1960년부터 1970년대까지 산업 발전으로 인한 노동자 전입이 증가하면서 핀란드어를 구사하는 주민들의 비율이 증가했다. 현재는 스웨덴어를 구사하는 인구가 56%, 핀란드어를 구사하는 인구가 40%를 차지한다.
사진[편집]
출신 인물[편집]
자매 도시[편집]
외부 연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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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수학(數學)은 양, 구조, 공간, 변화 등 개념을 다루는 학문이다. 현대 수학은 형식 논리를 이용해서 공리로 구성된 추상적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수학은 그 구조와 발전 과정에서는 자연과학에 속하는 물리학을 비롯한 다른 학문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나, 여느 과학의 분야들과는 달리, 자연계에서 관측되지 않는 개념들에 대해서까지 이론을 일반화 및 추상화시킬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수학자들은 그러한 개념들에 대해서 추측을 하고, 적절하게 선택된 정의와 공리로부터의 엄밀한 연역을 통해서 추측들의 진위를 파악하려 한다.[1]
수학은 숫자 세기, 계산, 측정 및 물리적 대상의 모양과 움직임을 추상화하고, 이에 논리적 추론을 적용하여 나타났다. 이런 기본 개념들은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고대 인도, 고대 중국 및 고대 그리스의 수학책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유클리드의 원론에서는 엄밀한 논증이 발견된다. 이런 발전은 그 뒤로도 계속되어, 16세기의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수학적 발전과 과학적 방법들의 상호 작용이 일어나, 혁명적인 연구들이 진행되며 인류 문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2]
오늘날 수학은 자연과학, 공학, 의학뿐만 아니라, 경제학 등의 사회과학에서도 중요한 도구로서 사용된다. 수학을 이런 분야들에 적용한 응용수학은 그 결과로서 수학 자체의 발전을 이끌고 새로운 분야들을 낳았다. 응용이 아닌 수학 자체의 아름다움과 재미를 추구하며 연구하는 것을 순수수학이라 하는데, 긴 시간이 지난 뒤에 순수수학적 연구를 다른 분야에 응용할 방법이 발견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3]
현대에는 수학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목차
역사[편집]
수학은 기원전 600년 경에 살았던 탈레스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탈레스가 태어나기 전에도 수학을 연구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역•분배•과세 등의 인류의 사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계산을 수학이 담당해 왔고, 농경 생활에 필수적인 천문 관측과 달력의 제정, 토지의 측량 또한 수학이 직접적으로 관여한 분야이다. 고대 수학을 크게 발전시킨 나라로는 이집트, 인도, 그리스, 중국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는 처음으로 수학의 방정식에서 변수를 문자로 쓴 나라이다.
한국의 수학은 약 1,500년 전부터 기록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신라 시대에 수학을 가르쳤으며, 탈레스가 최초로 발견한 일식과 월식을 예측할 정도로 발달했다. 조선 시대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 대왕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수학 연구를 명하는 등, 조선의 수학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많은 서적들이 불타고, 천문학 분야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조선 후기의 한국의 수학은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다시 발전하였고, 새로운 결과도 성취되었다. 그렇게 해서 한국은 수학이 현재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세부 분야[편집]
수학의 각 분야들은 상업에 필요한 계산을 하기 위해, 숫자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토지를 측량하기 위해, 그리고 천문학적 사건들을 예견하기 위해 발전되어왔다. 이 네 가지 목적은 대략적으로 수학이 다루는 대상인 양, 구조, 공간 및 변화에 대응되며, 이들을 다루는 수학의 분야를 각각 산술, 대수학, 기하학, 해석학이라 한다. 또한 이 밖에도 근대 이후에 나타난 수학기초론과 이산수학 및 응용수학 등이 있다.
산술[편집]
수의 체계가 보다 발전하면서, 정수의 집합을 유리수의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유리수의 집합은 실수의 집합의 부분집합이며, 이는 또다시 복소수 집합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사원수와 팔원수 등의 개념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와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자연수를 무한대까지 세어나간다는 개념을 형식화하여 순서수의 개념을 얻으며, 집합의 크기 비교를 이용하여 무한대를 다루기 위한 또다른 방법으로는 기수의 개념도 있다.
대수학[편집]
수 대신 문자를 써서 문제해결을 쉽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학적 법칙을 일반적이고 간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포함한다. 고전대수학은 대수방정식 및 연립방정식의 해법에서 시작하여 군, 환, 체 등의 추상대수학을 거쳐 현대에 와서는 대수계의 구조를 보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선형대수학으로 전개되었다. 수의 집합이나 함수와 같은 많은 수학적 대상들은 내재적인 구조를 보인다. 이러한 대상들의 구조적 특성들이 군론, 환론, 체론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대수적 구조들을 연구하면서 다루어지며, 그것들 하나하나가 내재적 구조를 지닌 수학적 대상이다. 이 분야에서 중요한 개념은 벡터, 벡터 공간으로의 일반화, 그리고 선형대수학에서의 지식들이다. 벡터의 연구에는 산술, 대수, 기하라는 수학의 중요한 세개의 분야가 조합되어 있다. 벡터 미적분학은 여기에 해석학의 영역이 추가된다. 텐서 미적분학은 대칭성과 회전축의 영향 아래에서 벡터의 움직임을 연구한다. 눈금없는 자와 컴퍼스와 관련된 많은 고대의 미해결 문제들이 갈루아 이론을 사용하여 비로소 해결되었다.
기하학[편집]
공간에 대한 연구는 기하학에서 시작되었고,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비롯되었다. 삼각법은 공간과 수들을 결합하였고,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포함한다. 현대에 와서 공간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개념들은 더 높은 차원의 기하학을 다루기 위해 비유클리드 기하학(상대성이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함)과 위상수학으로 일반화되었다. 수론과 공간에 대한 이해는 모두 해석 기하학, 미분기하학, 대수기하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리 군도 공간과 구조, 변화를 다루는데 사용된다. 위상수학은 20세기 수학의 다양한 지류속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분야이며, 푸앵카레 추측과 인간에 의해서 증명되지 못하고 오직 컴퓨터로만 증명된 4색정리를 포함한다.
해석학[편집]
변화에 대한 이해와 묘사는 자연과학에 있어서 일반적인 주제이며, 미적분학은 변화를 탐구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발전되었다. 함수는 변화하는 양을 묘사함에 있어서 중추적인 개념으로써 떠오르게 된다. 실수와 실변수로 구성된 함수의 엄밀한 탐구가 실해석학이라는 분야로 알려지게 되었고, 복소수에 대한 이와 같은 탐구 분야는 복소해석학이라고 한다. 함수해석학은 함수의 공간(특히 무한차원)의 탐구에 주목한다. 함수해석학의 많은 응용분야 중 하나가 양자역학이다. 많은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양과 그 양의 변화율의 관계로 귀착되고, 이러한 문제들이 미분방정식으로 다루어진다. 자연의 많은 현상들이 동역학계로 기술될 수 있다. 혼돈 이론은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현상을 탐구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
수학기초론 관련 분야[편집]
수학의 기초를 확실히 세우기 위해, 수리논리학과 집합론이 발전하였고, 이와 더불어 범주론이 최근에도 발전되고 있다. “근본 위기”라는 말은 대략 190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어난, 수학의 엄밀한 기초에 대한 탐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수학의 엄밀한 기초에 대한 몇 가지 의견 불일치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수학의 기초에 대한 위기는 그 당시 수많은 논쟁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그 논쟁에는 칸토어의 집합론과 브라우어-힐베르트 논쟁이 포함되었다.
이산수학[편집]
응용수학[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Jourdain
- Eves
- Peterson
참고 자료[편집]
- Eves, Howard,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Mathematics, Sixth Edition, Saunders, 1990, ISBN 0-03-029558-0.
- Jourdain, Philip E. B., The Nature of Mathematics, in The World of Mathematics, James R. Newman, editor, Dover, 2003, ISBN 0-486-43268-8.
- Peterson, Ivars, Mathematical Tourist, New and Updated Snapshots of Modern Mathematics, Owl Books, 2001, ISBN 0-8050-7159-8.
바깥 고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 (한국어) 대한수학회(KMS)
- (한국어) KAIST 수학문제연구회
- (영어) Mathworld
- (영어) The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archive
- (한국어) 수리과학연구정보센터 용어 검색
수학의 주요 분야
|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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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유카
|실유카|
Y. filamentosa Adam's needle, in bloom
|생물 분류|
|학명|
|Yucca filamentosa
L.
|이명|
|Yucca smalliana|
실유카는 용설란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학명은 Yucca filamentosa이다.
분포[편집]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특징[편집]
줄기는 거의 없고 짧은 뿌리줄기가 비후하여 옆으로 뻗는다. 잎은 뭉쳐나며 긴 칼모양으로 가늘고 길이 30-45cm, 나비 2-3cm이다. 잎은 탄력이 있고 부드러우며 윗부분은 아래로 처지고 백록색을 띤다. 잎가장자리에서부터 흰실 같은 섬유가 나오므로 이 이름이 붙었다. 6-7월에 높이 1-2m의 꽃줄기에 원추꽃차례가 달리고 길이 약 4cm의 6장의 꽃잎을 가진 흰꽃이 아래로 향해 핀다.
이용[편집]
잎에서 섬유를 채취하여 직물의 원료로 쓰며,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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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리틀 포니
마이 프리티 포니 장난감은 1981년에 발표되고, 1983년에 출시되었다. 해당 장난감 생산공정은 1995년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총 네 세대가 있다.
역사[편집]
마이 리틀 포니는 1910년에 미국의 일러스트 레이터이자 디자이너인 보니 재컬리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조각가인 카를로스 뮌힝거, 경영자인 스티브 드아구안과 함께 일했다. 보니 재컬리는 1981년에 장난감 디자인 특허권을 신청했고, 1992년에 받아들여졌다.
세대[편집]
세대는 마이 리틀 포니 수집가들에 의해 나눠진 장난감 생산 공정 분류이다. 주로 인형의 외형에 따라 분류된다.
1세대[편집]
최초의 마이 리틀 포니 세대는 1982년에 어스 포니 장난감으로 시작했다. 뒤를 이어 페가수스 포니, 유니콘 포니, 플러터 포니, 씨 포니가 등장했다. 플러터 포니는 페가수스 포니보다 작고 가녀린 포니이다. 윈디윙 포니와 섬머윙 포니는 플러터 포니보다 크고, 나비 같은 날개를 가진 포니이다. 씨 포니는 해마와 비슷한 외형을 가진 포니이다. 남성은 '빅 브라더 포니'로 불리며, 조금 더 큰 몸과 클라이즈데일과 같이 발굽에 털을 가지고 있다.
많은 종류의 변형 포니 장난감이 제작되었고, 첫 번째 변형 포니는 1983년의 〈레인보우 포니〉였다. 그 외에는 플록 가공을 이용한 〈소 소프트 포니〉, 눈에 라인석이 있는 〈트윙클 아이드 포니〉, 몸이 무늬로 덮힌 〈트와이스 애스 팬시 포니〉, 기존 포니보다 더 긴 갈기와 꼬리 털이 장난감 안에 든 〈브러시 앤 그로우 포니〉, 다른 동물의 디자인을 차용한 〈포니 프렌즈〉, 크기를 줄여 망아지로 만든 〈베이비 포니〉가 있다. 마이 리틀 포니 TV 시리즈는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방영되었다. 1992년까지 미국에서 판매되었고, 그 후부터 1995년까지는 해외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2세대[편집]
2세대에서는 눈을 보석으로 만들고, 머리를 돌아가도록 하고, 더 작고, 날씬하게 만들고, 다리 길이를 늘이는 등 외형적인 수정을 거쳤다. 2세대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 하고, 1999년에 판매를 중단했다. 해외에서는 몇 년 간 판매를 지속했다. 대부분 어스 포니로 만들어졌고, 유니콘은 해외 시장에서 매우 조금 만들어졌다. 2000년대 초반에 와서 클립으로 날개를 고정할 수 있는 매직 유니콘이라는 포니가 만들여졌다. 두 망아지가 발표되었지만, 미국에서는 판매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판매가 중단되고, 2003년에 3세대가 시작하면서 유럽에서의 판매도 중단되었다.
3세대[편집]
3세대는 2003년에 시작되었다. 3세대의 포니들은 셀레브레이션 캐슬 중앙 근처의 포니빌이라는 마을에서 산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는 어스 포니만 출시되었지만,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페가수스 포니와 유니콘 포니도 출시하였다.
4세대[편집]
바깥 고리[편집]
- 마이 리틀 포니 - 공식 웹사이트
마이 리틀 포니: 우정은 마법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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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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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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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건
망건은 당과 편자, 앞과 뒤로 구성된다. 당은 윗부분을 졸라매는 띠로 '살춤'이라 부르기도 한다. 편자는 아랫부분을 졸라매는 띠다. 그물처럼 얽어매 이마 부분을 감싸는 것을 앞, 뒷머리를 싸매는 부분을 뒤라 부른다. 당과 편자에는 가느다란 줄(당줄)이 달려 있다. 망건을 겯는 과정은 편자를 머리 둘레만큼의 길이로 짜는 것부터 시작한다. 편자는 날과 씨를 모두 말총으로 댄다. 말총은 자주 부러지는데 물에 적셔 놓으면 한결 부드럽다. 편자가 완성되면 쳇데기('체'를 네 개 정도 얹어 만든 작업대) 위에 얹은 망건골(망건 짜는 데 쓰는 원형 틀)에 걸어놓고, 말총을 바늘에 꿰어 설주부터 바닥짜기(80도리)를 한다. 뒷바닥은 촘촘히 하고 이마에 닿는 앞가리 부분은 성글게 뜬다. 유난히 까다로운 작업은 당을 뜰 때다. 신축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편자와 바닥짜기가 끝나면 당에 당줄을 걸어매고 편자와 설주에 검은 명주싸개로 선을 둘러 관자(貫子 : 당줄을 걸어 망건의 크기를 머리에 맞게 조절하여 고정하는 작은 단추 모양의 고리. 신분에 따라 금·옥·광석·뿔·뼈 따위의 재료를 사용하며, 제주에서는 주로 옥이나 조개껍데기를 이용했다.)와 풍잠(風簪 : 망건의 당 중앙 위를 꾸미는 장식품)을 단다. 망건 하나를 만들려면 대개 열흘이 걸린다. [1]
각주[편집]
- “바늘귀에 꿰맨 망건인생”. 내 마음속의 굴렁쇠. 2007년 11월 27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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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쿄(恭仁京)는 740년부터 744년까지 일본의 수도였던 곳으로 쇼무 천황의 명령으로 오늘날의 교토 부 기즈가와 시에 구니 궁(恭仁宮)이 세워졌다. 구니쿄는 완성되지 못했고 4년 후에 다시 오사카에 있는 나니와쿄로 옮겨졌다. 2006년의 발굴 조사 결과 대불전(大極殿)과 내리(内裏) 같은 주요 건물이 중국식 바둑판 양식으로 세워졌음이 밝혀졌다. 궁은 동서 길이가 560m, 남북 길이가 750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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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도쿠
스도쿠(일본어: 数独, 數獨, Sudoku, 숫자넣기)는 숫자 퍼즐로, 가로 9칸, 세로 9칸으로 이루어져 있는 표에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채워 넣는 퍼즐이다. “숫자는 한 번씩만 쓸 수 있다”(数字は独身に限る 스지와 도쿠신니 가기루[*])[1]를 줄인 말로 2005년 전 세계적으로 이 말과 퍼즐이 퍼져나갔다. 퍼즐을 푸는 방법은 같은 줄에는 1에서 9까지의 숫자를 한 번만 넣고, 3x3칸의 작은 격자 또한 1에서 9까지의 숫자가 겹치지 않게 들어가야 한다. 스도쿠 문제에서 유일한 풀이가 존재하는 문제의 숫자 개수의 최솟값은 17이다. 17개의 경우, 48826개의 스도쿠 문제가 알려져 있다.
목차
역사[편집]
스도쿠의 역사는 189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의 일간지 《Le Siècle》가 두자리 숫자를 이용한 스도쿠와 같은 방식의 퍼즐을 게재했다. 1895년에는 다른 일간지 《La France》가 한 자리 숫자로 9×9의 바둑판을 채우는 퍼즐을 게재했지만, 여기선 3×3블록 룰은 없었다. 이 퍼즐들은 이따금 프랑스 몇몇 신문에 매주 게재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그 모습이 사라졌다.
스도쿠(Sudoku)는 18세기 스위스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창안한 Latin Square 를 기반으로 하여 1979년 당시 74세의 건축가였던 미국의 Howard Garns가 현재의 모습으로 변형하여 1979년 5월 미국의 '델 매거진즈'(Dell Magazines)가 잡지 《Dell Pencil Puzzles & Word Games》에 "Number Place"로 소개된 것이 시초이나, 1984년 4월 일본의 출판사인 '니코리'(ニコリ, Nikoli)가 출판한 잡지 《퍼즐 통신 니코리》(パズル通信ニコリ)에 '스도쿠'라는 이름을 붙여 수록하면서 대중에게 보급되기 시작하여 2005년 무렵에 이르러 온 세계로 퍼져 나갔다.
여러가지 정보[편집]
- 수학자 펠겐하우어와 자비스가 스도쿠로 가능한 모든 경우의 값을 구하였는데, 그 수는 6670903752021072936960 (66해 7090경 3752조 210억 7293만 6960) 개나 된다고 한다.
- 스도쿠 중에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도 있고, 답이 2개인 문제도 있다. 그래서 답이 1개인 문제를 만드는 것이 원칙이다.
규칙[편집]
기본 규칙[편집]
- 아홉 3×3 칸에 숫자가 1부터 9까지 하나씩만 들어가야 한다.
- 아홉 가로줄에 숫자가 1부터 9까지 하나씩만 들어가야 한다.
- 아홉 세로줄에 숫자가 1부터 9까지 하나씩만 들어가야 한다.
심화 규칙[편집]
- 숫자의 위치 (숫자와 상관 없이 들어간 위치) 가 좌우 대칭을 이루어야 한다.
- 숫자가 30개 이하여야 한다.
스도쿠의 풀이법[편집]
1칸/가로줄/세로줄/3x3 칸에 들어갈 숫자 맞추기 등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멘사에서 개발한 전문가용 방법 등도 있다. 방법이 상당히 많으므로 차라리 자신만의 방법을 만드는 것도 좋다.
스도쿠의 응용[편집]
직소 스도쿠[편집]
3X3 모양 스도쿠가 아닌 직소 모양으로 이루어진 스도쿠로, 규칙은 원래 스도쿠와 거의 같으나, 직소 모양 속에도 1에서 9까지의 숫자를 한 번씩만 쓸 수 있다는 것이 다르다.
대각선 스도쿠[편집]
스도쿠의 X자 모양의 대각선 속에도 1에서 9까지의 숫자를 한 번씩만 사용할 수 있다.
부등호 스도쿠[편집]
이는 주어지는 숫자가 없는 대신 부등호에 맞게(예:1<2<3<4<5<6<7<8<9) 숫자를 채우는것
점보 스도쿠[편집]
4X 모양 네모칸에 1에서 16까지의 숫자가 들어가는 대형 스도쿠다. 푸는 방법은 일반 스도쿠와 동일하다.
주석[편집]
- 즉 '숫자들이 겹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의 일본어 신조어인 이 게임은 일본에서는 Number Place를 줄인 난프레(ナンプレ 남프레[*])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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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WERTY 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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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WERTY 자판(쿼티 자판)은 영어 타자기나 컴퓨터 자판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자판 배열이다. 자판의 왼쪽 상단의 여섯 글자를 따서 이름 붙여졌다. 1868년 크리스토퍼 숄스가 이 배열에 대한 특허를 냈다. 이후 숄스는 1873년에 레밍톤에게 이 특허를 팔았으며 레밍턴은 이후 타자기를 만들때 처음 사용하였다. 효율면에서 드보락 자판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으나 가장 널리 쓰이는 영문 자판이며 이를 기초로 많은 독일어의 QWERTZ 자판, 프랑스어의 AZERTY 자판같은 다른 언어를 위한 자판이 만들어졌다.
역사[편집]
쿼티 자판은 미국의 밀워키 주에 살았던 신문 편집자인 크리스토퍼 숄스에 의해 발명되었다. 이전의 자판은 주로 알파벳 순서로 배열되었는데 자판을 타자기로 칠때 인접한 키를 연달아 치게 되면 자주 엉키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숄스의 동료였던 제임스 덴스모어는 이렇게 엉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절하게 문자들을 다시 배열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고 숄스가 이를 구현하였다. 키가 엉키게 되는 문제를 막기 위해서 자판의 배치를 바꾼것인데, 이것이 와전되어서 타이피스트가 느리게 치도록 설계된 자판이라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영어 낱말의 많은 경우가 왼쪽을 보다 쓰게 되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오른손잡이에게는 좀 더 힘든 입력 배열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컴퓨터 사용자 중 오른손잡이들에게는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편리하다고 볼 수 있다. 아래는 캐나다에서 사용되는 QWERTY 배열이다.
한글과 쿼티자판[편집]
두벌식 자판은 쿼티 자판과 공존하도록 만들어졌다. 왼쪽에는 자음이, 오른쪽에는 모음이 배치되어 서로 번갈아가면서 키를 치게 구성되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인간공학 키보드나 LG전자의 인간공학 키보드는 이 자판이 갈라져 배치되어 있는데, 왼손 자음, 오른손 모음으로 대체적으로 지켜지고 있으나 ‘b’(ㅠ)키만 왼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두벌식 자판으로는 한글을 입력하기가 불편하다. 그러나 세벌식 자판은 ‘b’(ㅜ)키와 ‘6’(ㅑ)키를 왼손으로 치는 게 더 효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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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경관 마테호른 - 스위스의 상징 Zermatt 마테호른과 스위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등반하기 까다로운 피라미드 모양의 산 꼭대기는 아마도 사진으로 가장 많이 찍힌 봉우리일 것이다. ''작은 마테호른'이라는 뜻의 클라인-마테호른(Klein-Matterhorn)은 퓨니큘라를 타고 오를 수 있으며, 마테호른과 근접한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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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핀의 기증
피핀의 기증이란 프랑크 왕 피핀이 자기의 왕위를 교황 자카리아에게서 승인을 받고, 그 대상으로서 다음대의 교황 스테파노 2세가 롬바르드 국왕의 압박을 받아 구원을 요청해 온 데 대해서 754년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라벤나 지방을 평정하고 그 땅을 교황에게 헌상 한 것이다. 이것이 피핀의 기부이며, 이후 종래의 베드로 세습령에 부가해서 기독교의 교황령이 국제적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수년 후 가짜 이시도루스 문서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증’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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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조
체조(體操)는 신체 단련과 균형을 위한 스포츠의 일종이다.
역사[편집]
체조는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되었으나 경기로 발전, 근대 스포츠로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근대 올림픽 부활 이후부터다. 오늘날과 같은 체조는 19세기 초 독일에서 프리드리히 얀이라고 하는 학교 선생이 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기계 체조는 여러 국제 체조 경기 대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경기 종목으로,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때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리듬 체조는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부터 정식 종목이 되었다.
종류[편집]
용어[편집]
- 곧추 뛰기 (Stride Vaulting Vertical Position): 도움닫기 후 발구르기를 하고 나서 뜀틀 위에서 두 손을 힘차게 아래로 누르며 일시적으로 곧추 선 자세를 취한 뒤 땅에 내려서는 뜀뛰기.
- 늑목 (Wall Bar): 높이 약 2.5m로, 2개의 기둥 사이에 수십 개의 나무를 평행으로 가로대어 고정시킨 스웨덴 체조의 대표적인 기구.
- 돛단배 (Handstand on Partners Knees): 한 사람은 누워서 무릎을 세우고 다른 한 사람은 누운 사람의 두 무릎을 두 손으로 짚고 물구나무 서는 동작.
- 레버 (Lever): 철봉, 링, 평행봉, 지표면 위에서 팔힘을 이용하여 몸을 수평으로 세우는 운동.
- 메디신 볼 (Medicine Ball): 체조 용구의 하나. 처음에는 무게 3 kg, 지름 33.35cm의 공을 사용하였으나, 오늘날 유럽에서는 무게 2~3 kg, 지름 26~28cm의 공을 사용함.
- 앤빌 코러스 (Anvil Chorus): 아령 체조의 하나. 간단한 다리 운동 및 뜀뛰기 등과 함께 두 팔을 여러 방향으로 들어, 흔들거나 휘돌려 아령의 같은 끝끼리 부딪치게 하면서 실시하는 율동 체조.
- 엘리펀트 워크 (Elephant Walk): 코끼리 걸음걷기. 즉, 엎드린 채 팔꿈치와 무릎을 펴고 걷는 재주.
- 워킹 스턴츠 (Walking Stunts): 무릎을 구부린 채 기어다니거나, 한쪽 발끝 또는 발뒤꿈치로 직선 위를 걸어가는 등 동물 흉내내기 재주.
- 트위스트 (Twist): 운동하는 도중 몸을 비틀어 방향을 바꾸는 것.
- 풋 서클 (Foot Circle): 발뒤꿈치의 회전. 양손으로 철봉을 잡고 양손의 바깥 또는 안쪽에 발바닥을 대고 앞뒤로 도는 것.
- 핸드 스프링 (Hand Spring): 팔 짚고 돌기. 적당한 거리에서 도움닫기를 한 후 기구 앞에서 몸을 일으켜 구르고, 두 팔을 위에서 앞으로 내리며 기구나 땅을 짚어, 몸이 앞으로 회전하는 데에 따라 손을 힘껏 밀면서 떼어 착지하는 동작.
참조[편집]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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